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99213
동생은 8살에 살해되고... 덕수궁에 갇힌 공주는?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사극 <화정> 첫 번째 이야기
15.04.19 21:58 l 최종 업데이트 15.04.19 21:58 l 김종성(qqqkim2000)
▲ MBC 월화드라마 <화정>에서 광해군 역할을 맡은 배우 차승원. ⓒ MBC
선조 임금의 적장자, 영창대군(1606~1614년). 그는 정말로 본의 아니게 광해군(1575~1641년)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났다. 그것도, 무려 31년이나 어린 이복형제로 출생했다.
그런데 늦게 태어난 그가 그 집안의 적장자였고, 일찍 태어난 광해군은 서얼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말로 본의 아니게 광해군을 곤란하고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광해군의 정적으로 태어나고 만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 적장자는 서얼보다 늦게 태어나도 서얼보다 더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지만, 영창대군의 경우는 달랐다. 그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광해군이 차기 가장의 지위를 상당 부분 확보해두었다. 그래서 그는 상황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광해군이 왕이 된 뒤 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영창대군은 참 어이없게도 불행한 왕자였다. 그는 광해군의 적이 될 생각도 없었고, 그럴 만한 연령도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주변 환경에 의해 광해군의 적이 되어 불행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광해군이 훌륭한 족적을 남긴 좋은 임금인 것과 별도로, 영창대군도 분명히 불행하고 불쌍한 왕자였다.
영창대군과 비슷하면서 달랐던 정명공주
▲ 드라마 <화정>에서 정명공주 역할을 맡은 배우 이연희 ⓒ MBC
이런 불행한 삶을 산 영창대군과 같은 뱃속에서 태어난 인물이 있다. 그래서 영창대군과 비슷한 운명을 걸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영창대군과는 좀 색다른 운명의 길을 걸은 인물이 있다.
영창대군의 누나이자 MBC 드라마 <화정>(월·화 방송)의 주인공인 정명공주(1603~1685년, 이연희 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영창대군의 삶은 분명 불행했지만, 정명공주의 삶은 불행한 듯하면서도 행복한 측면이 있었다. 같은 뱃속에서 태어났지만, 정명공주의 삶은 영창대군과 상당히 판이했다.
정명공주의 아버지인 선조는 임진왜란 종전 4년 뒤인 1602년에 인목왕후와 재혼했다. 정명공주는 그 이듬해에 출생했다. KBS 드라마 <징비록>의 주인공인 유성룡이 1600년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해서 회고록인 <징비록>을 쓰고 있을 때 정명공주가 태어난 것이다.
정명공주의 초년은 불행했다. 그가 출생한 지 5년 만에 아버지 선조가 죽고 이복오빠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공주는 여섯 살이었다. 그는 이복오빠보다 아홉 살 어린 엄마(인목왕후·인목대비)와 세 살밖에 안 된 동생(영창대군)과 함께, 신(新)정권의 주시를 받는 불편하고 두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광해군 정권 하에서 정명공주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광해군 정권이 출범한 지 6년 뒤인 1613년, 여덟 살 된 동생 영창대군은 역모사건에 휘말려 왕자에서 서민(평민)으로 강등되고 강화도에 유배를 갔다가 이듬해인 1614년에 살해당했다. 이때 공주는 열두 살이었다.
시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4년 뒤인 1618년에는 어머니 인목대비가 서궁(덕수궁)에 유폐되면서 공주 본인도 함께 갇히게 되었다. 이때 인목대비는 후궁으로 강등됐고, 공주는 옹주(후궁의 딸) 대우를 받는 서민으로 강등됐다. 공주가 열여섯 살 때 일이다. 남들은 이미 시집가서 첫아이의 돌잔치를 할 나이에, 공주는 한층 더한 시련의 늪으로 떨어진 것이다.
서궁에 갇힌 공주가 어머니와 함께 심취한 것 중 하나가 붓글씨였다. 조선 후기 정치가인 남구만이 쓴 <약천집>에서는 공주가 어머니를 위로할 목적으로 어머니와 함께 붓글씨 취미에 푹 빠졌다고 한다. 이들 모녀는 선조 임금의 후원을 받은 한석봉(1543~1605년)의 필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서궁에서 공주가 남긴 글 중의 하나가 '華政'(화정)이란 작품이다. 드라마 <화정>의 제목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화정'을 '화려한 정치'로도 번역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아름다운 정치'로 번역하는 게 자연스러울 듯하다. 서궁에 갇힌 공주로서는 당시의 정치가 아름답지 못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므로 '아름다운 정치'를 지향한다는 의미로 그런 글자를 썼을 수 있다.
인목대비는 아들 영창대군을 먼저 보낸 불행한 어머니였다. 그는 정명공주마저 잃지 않을까 초조해 했다. 이 때문에 인목대비가 자기 딸이 죽은 것처럼 가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광해군 쪽 사람들이 공주의 소식을 물으면 이미 죽었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정명공주는 서궁에서 쥐 죽은 듯 지내며, 손에 먹물을 묻히고 화선지만 한 장씩 한 장씩 쌓아갔다. 붓글씨에 심취한 외형적 모습과 달리, 그의 심장은 광해군 정권에 대한 두려움으로 항상 쿵쿵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물한 살, 갑자기 확 바뀐 운명
정명공주의 운명은 스물한 살 때 갑자기 확 바뀌었다. 1623년인 그 해에 광해군이 쿠데타로 실각했던 것이다. 정변을 일으킨 인조는 공주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원종으로 추존)의 아들이었다. 공주가 인조한테 고모였던 것이다.
인조 정권은 정통성 확보의 차원에서 인목대비와 정명공주의 지위를 회복시켜주고 이들 모녀를 극진히 대우했다. 선조 임금의 부인인 인목대비를 자기편으로 만들면 정권의 정통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게 쿠데타 정권의 계산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인조 정권은 사치 금지에 관한 규정을 어기고 정명공주에게 화려한 집과 많은 토지를 안겨주었다. 또 공주의 뒤늦은 결혼을 위해 국가적으로도 애를 써주었다. 그래서 공주 입장에서 인조는 조카인 동시에 구세주였다.
▲ 정명공주가 인목대비와 함께 유폐됐던 덕수궁(서궁). ⓒ 김종성
인조는 정명공주에게 한없이 공손했다. 그랬던 인조가 1632년 인목대비의 죽음을 계기로 정명공주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된다. 인목대비 쪽 사람들이 인조를 저주한 듯한 정황과 함께 새로운 임금의 추대를 논의했다는 정황이 포착된 게 그 계기였다. 이런 음모의 몸통으로 지목된 인물이 바로 정명공주였다. 그래서 인조의 태도가 확 바뀌었던 것이다. 이때 공주는 서른 살이었다.
인조는 정명공주를 수사하고 처벌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권의 핵심인물들이 반대했다. 정권의 정통성을 해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인목대비의 지지를 전제로 성립한 인조 정권이 인목대비 모녀가 정권을 저주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게 되면 정권의 존재 의의가 훼손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인조는 정명공주를 어찌할 수 없었지만, 공주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는 않았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나타나듯이, 인조는 특별한 이유 없이 병에 걸리기만 하면 공주의 저주 때문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곤 했다.
이로 인해 정명공주는 광해군 때 못지않은 감시를 받으면서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광해군 때는 그나마 붓글씨라도 썼지만, 인조 때는 그나마도 하지 못했다. 정권의 눈총을 사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공주 입장에서는 한층 더 가시방석 같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심장은 광해군 때 이상으로 훨씬 더 쿵쿵 했을 것이다.
이 같은 정명공주의 고통은 1649년 인조의 죽음과 함께 극적으로 해소됐다. 어머니가 죽은 1632년 이후로 17년간 인조의 지독한 의심을 받은 공주가 마흔일곱 살이 되어서야 정권의 감시에서 비로소 해방된 것이다.
인조 이후의 왕들인 효종·현종·숙종은 정명공주를 극진하게 받들었다. 이런 가운데, 정명공주는 딸 하나와 아들 일곱을 두고 편안하게 인생을 보냈다. 그는 만 8세에 죽은 동생보다 열 배도 더 많은 만 82세까지 살았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장수였다. 동화 속의 상투적인 끝 문장처럼 그는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다.
정명공주는 어머니와 동생으로 인한 한을 평생 품고 살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보다 먼저 죽은 영창대군에 대해 특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 내면을 품고 살았을 테지만, 그는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자식도 많고 땅도 많은 부잣집 안방마님으로 살다가 세상을 끝마쳤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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