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70419090116732
[풍납토성 발굴20년] 2천년 역사도시 서울 기원
입력 2017.04.19. 09:01 수정 2017.04.19. 10:11
1997년 한성백제 왕성 풍납토성 발굴 본격 시작
700년 백제 역사 퍼즐 완성..서울 역사 BC 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서울=연합뉴스) 최윤정 기자 = 700년 백제 역사의 마지막 퍼즐인 풍납토성이 본격 발굴된 지 올해로 20년을 맞았다. 전설처럼 전해지던 고대왕국 백제 한성시대의 화려한 모습이 드디어 세상에 드러났다.
풍납토성 등 한성백제 시대 유적이 확인되며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는 새로 쓰였다. 수도 서울의 역사도 조선시대 600년에서 기원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2천년으로 확장됐다.
그러나 1천년 넘게 땅 속에 묻혀있던 역사가 현 시대 삶에 스며드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서울시는 송파구 백제유산을 잘 보존하기 위해 주민 보상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 풍납토성 발굴 20년…드라마 같은 사건
1997년 정초 연휴, 한성백제 시대는 우연히 포착됐다. 풍납토성 안쪽 한 아파트 공사장에서 터파기를 마친 땅에 백제 유물이 나뒹구는 것을 당시 선문대 이형구 교수가 발견한 것이다.
그 때부터 문화재당국이 개입돼 공사를 중지하고 정식 발굴을 시작했다. 당시 출토된 유물은 그간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었던 대형 주거지와 백제 와당 등이었다.
2000년도 풍납토성 건물터 발굴현장
1999년도에는 성벽 규모가 드러났다. 확인된 성벽 밑변 너비만 43m에 높이는 11m, 길이는 3.5㎞로 추정됐다. 전형적인 백제 토목기술이 사용됐다.
함께 나온 유물이 3세기 중반 이전 것이었으니, 그 전에 백제가 고대국가 기틀을 확립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학계에 오래된 백제 위례성 논쟁이 끝난 셈이다.
2000년에는 신전 건물까지 발견되며 풍납토성이 왕성임이 다시 확인됐다. 제사 후 남은 제수를 묻은 구덩이에서 말머리뼈 10마리 분과 생선뼈 따위가 1천점 이상 쏟아져나왔다.
풍납토성이 처음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 1925년으로 거슬러 간다. 대홍수로 풍납토성 성벽과 암사동 선사주거지 등이 드러났다.
일제는 1936년 문화재로 지정했지만, 아쉽게도 눈에 보이는 성벽, 3만 6천평 규모만 포함됐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생기며 풍납토성은 그대로 사적 제11호로 지정된다. 그 무렵 학계에서 북쪽 성벽과 왕궁터 사이쯤에 구덩이 몇 개를 파서 조사를 했더니 기원 전후부터 5세기 말∼6세기 유물이 나왔다.
그럼에도 풍납토성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주류학계는 백제가 부여로 이전하기 전 왕성(위례성)을 경기도 광주 춘궁동 등으로 추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30년이 흐르는 동안 일반주거지역으로 남겨진 풍납토성 안쪽으로 자꾸만 주택이 들어섰다. 땅 위로 드러난 토성벽은 의미 없는 흙무더기처럼 발에 채였다. 공사 중 유물이 나오면 신고해야 하는 법은 무용지물이었다.
몽촌토성 전경[서울시 제공=연합뉴스]
◇ 고대왕국 백제 미스터리 푸는 열쇠
풍납토성 발굴로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가 새로 쓰였다.
예전에는 백제 678년 역사 중 무려 약 500년을 차지하는 한성백제 시대가 전설처럼 언급됐다.
온조가 기원전 18년 한강 하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나라를 세웠다고 했지만,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공주와 부여가 백제 수도로 부각된 것과 달리 정작 493년 수도인 서울은 가려졌다.
학계가 풍납토성을 한성백제 왕성인 위례성으로 인정한 것은 불과 10년 전인 2000년대 말이다.
풍납토성에서 도로와 건물, 기와집 흔적에다가 신전 건물까지 나왔으니 왕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70∼80㎡(약 20평)에 달하는 당시로는 최고급 주거지가 있었다.
풍납토성은 왕성임이 명확하다는 점이 돋보인다. 다른 백제 수도와 심지어 경주 월성까지도 왕성 논란이 종결되지 않았다고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19일 말했다.
위례성과 한성은 같은 의미로 풀이된다. 또 한성이 대성인 북성과 남성으로 이뤄졌다는 문헌을 토대로 할 때 풍납토성이 북성, 몽촌토성이 남성이라고 보는 것이 대세다.
풍납토성은 웅진·사비시대 백제 뿌리를 확인시켜주는 의의가 있다.
백제 특유 토목 기법 원형이 발견됐고, 한강을 앞에, 남한산을 뒤에 두고 북쪽 아단성(아차성)과 서쪽 사성(삼성동토성)으로 방어하는 도성 구도가 공주, 부여로 그대로 이어졌다.
한강을 따라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며 동아시아 교류 중심지로 활약했던 것도 후기 백제로 연결된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정림사지 전경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서울시는 2020년까지 풍납토성 주민 보상을 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는 구상을 2015년 말 발표했다.
그 해 7월 먼저 등재된 공주·부여·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왕실무덤인 석촌동과 방이동 고분군 등 한성백제 유적을 추가하는 확장 등재 방식이다. 올해 상반기 내 송파구 동의를 구해 문화재청에 신청하는 일정이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 인류공통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중요 유산으로 천명되는 데 의의가 있다. 역사 문화지역으로 발전도 기대된다.
세계유산이 되더라도 현재 수준 이상 규제가 늘어나지는 않는다고 서울시는 밝혔다. 현재 문화재보호법이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이를 위해 과감히 지방채를 발행하고 국·시비 2천855억원을 더해 5천137억원을 투입, 풍납토성 핵심지역 주민을 우선 보상한다는 계획이다.
선택과 집중 원칙을 적용해 핵심 지역 위주로 보상, 발굴해 실효성을 높이려고 한다.
오랜 기간 국가 차원 종합 대책 없이 방치된 풍납토성이나 지역 주민 모두를 위해 박원순 서울시장이 내놓은 해법이었다. 그러나 보상 수준을 둘러싼 해묵은 주민 불만과 갈등이 20년 전 풍납토성 첫 발굴처럼 극적으로 풀리지는 않고 있다.
풍납토성 전경
merci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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