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80530.22016195507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10> 온돌을 발명한 옥저인
연해주 지역의 혹독한 겨울 나기 위한 지혜의 산물
기원전 4~1세기 옥저 유적에서 발견
고구려·발해 거쳐 남부지방까지 전파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08-05-29 19:55:47 | 본지 16면
2004년 연해주 불로치까 유적에서 발견된 기원전 2~1세기의 온돌(문화재연구소와 시베리아 고고민족학연구소의 공동발굴, 필자촬영).
한국을 대표하는 난방시설인 온돌을 빼고 우리의 전통적인 주거생활을 얘기할 수는 없다. 추운 겨울에 뜨끈한 아랫목에서 몸을 녹이는 우리 민족의 습관은 최근에는 외국인들에게서도 인기를 얻는다는 찜질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방바닥 밑으로 불을 때 연기도 빼고 열도 전달한다는 기상천외한 방법은 최근 들어서는 엉뚱하게 연탄가스 중독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세계 건축사에서 유례가 없는 발명품임은 분명하다.
온돌은 언제부터 만들어졌으며 또 그 기원은 어디일까? 얼마전까지 온돌의 기원하면 막연하게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고구려 사람들에 의해 널리 쓰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 연해주 남부의 끄로우노프까문화(옥저문화)에서는 기원전 4~1세기대에 이미 온돌을 만들었음이 확인되어서 환동해를 끼고 살던 사람들의 또다른 창조품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고 있다.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우리나라 동북한~연해주에 살던 옥저인은 사실 고고학적으로는 거의 밝혀진 바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를 봐도 옥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옥저라고 할 수 있는 고고학적 문화가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러시아 연해주의 철기시대문화인 끄로우노프까문화가 바로 옥저계통임이 확인되었고 또 현재까지의 자료로 볼 때 그들이 온돌을 처음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온돌은 우리가 생각하듯 바닥 전체를 다 고래로 덮은 것이 아니라 한쪽 벽면에 'ㅣ'자 아니면 'ㄱ'자로 고래를 넣은 것이다. 집안에서 취사도 하고 남은 열을 그냥 바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방안을 한번 돌려서 걸터 앉아서 몸을 녹이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했었다.
끄로우노프까문화의 온돌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빠르며 발견되는 온돌의 수도 많으니 한반도 온돌의 기원인 듯하다. 그렇다면 옥저인들은 왜 온돌을 발명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 답은 상대적으로 추운 겨울이 길었던 연해주의 기후와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수렵과 약탈에 의존했던 읍루와 달리 옥저인들은 강가의 넓은 평야지대에 수백호의 집을 짓고 농사를 짓던 정착민이었다. 그러니 주거지를 깊게 파고 연기구멍으로 출입하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했을 것이다. 게다가 잡곡을 매일 조리해서 먹으려니 발달된 취사시설도 필요했다. 온돌을 만들면 난방이 효율적으로 되고 주거지를 깊게 팔 필요도 없어서 출입이 용이해 따뜻한 시기에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 적당했을 것이다.
옥저인의 온돌은 이후 주변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어갔다. 고구려인들도 옥저인의 온돌을 계속 썼으며 이후 발해인에게도 전파되었다. 옥저 이후에 연해주에 거주했던 말갈인들은 온돌을 전혀 쓰지 않았으니, 온돌은 한반도 북방에 살던 예맥족으로 대표되는 주민들의 산물인 셈이다.
한편, 남한에서는 경남 사천 늑도에서 기원전 2~1세기대에 다소 원시적으로 만든 온돌이 발견되어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것으로 꼽힌다. 굳이 온돌이 필요없을 법한 남해안 바닷가에서 온돌이 나왔음은 뭘 의미할까? 사천 늑도는 당시 바다를 낀 국제무역항으로 일본, 낙랑계의 유물이 많이 확인되었다. 이 온돌도 환동해를 끼고 연해주의 옥저인들이 남하해서 남긴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 옥저인의 온돌은 바이칼 근처의 흉노 성지와 카자흐스탄에서도 발견된 바 있어 사천 늑도에서 나온 것이 아주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유독 겨울이 길고 추운 연해주에서 농업을 발전시키고 온돌이라는 난방시설을 만들어낸 옥저인들을 보면 19세기말 연해주와 간도로 흘러들어갔던 한국인이 생각난다. 춥고 황량한 연해주의 벌판에서 이들은 특유의 근면성과 솜씨로 농업을 발전시켰다. 심지어 고려인들은 추운 연해주 땅에 논을 만들어 아열대성 작물인 벼를 수확하기까지 했으니, 이는 연해주 농업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또, 봄이 되면 다른 러시아인들보다도 먼저 값싸고 싱싱한 채소를 시장에 내놓았다고 한다. 연해주를 발굴하다보면 가끔씩 백여년 전 우리 농가에서 쓰던 자기편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기도 하고, 버려진 집터들도 곳곳에 남아있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후에 고려인의 논밭은 풀밭으로 다시 버려지게 되었고 지금 연해주에서 소비되는 대부분의 야채와 곡식은 중국산이다. 옥저인과 고려인, 약 2000여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살았던 이들에게는 우리 특유의 환경에 적응하는 강인한 의지와 삶에 대한 애착이 느껴진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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