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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싫어한 정약용, 정조가 따라준 술 마시고...
백성 위해 금주를 주장한 다산... 그가 남긴 술 이야기
허시명(sultour) 등록 2019.11.12 14:29 수정 2019.11.12 17:38
▲ 소내나루 전망대에서 바라본 두물머리의 아침 풍경. ⓒ 막걸리학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왔다. 아침 안개를 보려고 서둘렀지만, 날이 훤하게 밝고 말았다. 똬리처럼 틀고 있는 소내나루 전망대에서 열수(洌水)를 내려다 본다.
열수는 한강의 옛 이름이다. 강물에 해가 얼비쳐 눈부시다. 그래도 물안개가 깊어 강 건너 산능선은 묽은 붓자국처럼 흐리다. 등 뒤로는 실학박물관이 있고, 다산 정약용이 살던 고향집과 그의 무덤이 있다. 다산은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에 살면서 스스로 열수옹(洌水翁)이라 불렀다.
실학박물관에서 어디쯤이냐고 전화가 왔다. 오늘은 실학박물관에서 술 이야기를 할 참이다. 술 이야기만 할 수 없어서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오는 청명주, 연암 박지원이 근무했던 면천의 두견주, 가장 많은 술 제법이 기록된 옛 문헌 <임원경제지>의 저자 서유구의 후손이 빚은 별바당 약주, 그리고 다산이 유배를 살았던 강진 땅의 병영 설성동동주를 준비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 이르면 술의 제법을 기록하거나 술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농서들이 발간된다. 여러 성인들이 말했고 다산도 "무릇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하는 흉패한 행동은 모두 술로 말미암아 비롯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술의 강은 도도하게 흘러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다산 정약용의 음주관
▲ 다산이 살았던 여유당, 1925년 을축년 홍수에 유실된 것을 1986년에 새로 지었다. ⓒ 막걸리학교
두물머리 다산의 땅에 왔으니 오늘은 다산의 음주관을 통해서 술 이야기를 풀어내보려고 한다.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둘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 글에 자신의 음주관을 잘 밝혀놓았다. "너희들은 내가 술을 반 잔 이상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는 것이다. 소가 물을 마시듯 마시는 저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는 적시지도 않고 곧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무슨 맛이 있겠느냐.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물론 이 편지의 말미에, 아마도 둘째 아들이 술을 많이 마셔서 아비로서 속을 푹푹 썩다가 하는 말이었겠지만, "경계하여 절대로 입에 가까이하지 말아서, 제발 천애일각(天涯一角)에 있는 이 애처로운 애비의 말을 따르도록 하여라. 술로 인한 병은 등창이 되기도 하며, 뇌저(腦疽), 치루, 황달 등 별별스러운 기괴한 병이 있는데, 이러한 병이 일어나게 되면 백약이 효험이 없게 된다. 너에게 빌고 비노니, 술을 입에서 끊고 마시지 말도록 하여라"라고 했다. 웃음이 날 정도로 애처롭고 극렬하게 대학자 다산은 아들을 향해 술 단속을 하고 있는데, 아들 학유가 술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전해오지 않는다.
다산은 많은 글을 썼으니 술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남겼다. 성균관에 들어간 20대 때에 정조 임금으로부터 <병학통> 책을 선물받던 날, 큰 사발에 담긴 계당주(桂餳酒)도 받았다. 계당주는 계피와 꿀이 들어간 소주다. 다산은 임금 앞이라 사양하지 못하고 다 마셨고, 몹시 취해 비틀거리며 물러나왔다고 한다.
또 다산은 중희당에서 정조 임금이 짓궃게 옥필통에 가득 부어준 삼중소주(三重燒酒, 이 술이 어떤 술인지는 알 수 없다. 다른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심해본다. 정조도 언급한 적이 있는 삼해소주(三亥燒酒)의 오기가 아닌지?)를 사양하지 못하고 또 마신 적이 있다. 그때 다산은 '나는 오늘 죽었구나' 라고 생각할 정도였는데, 다행히 몹시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산은 맏형인 정약현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락주를 함께 마시고 싶다고 했다.
살기 좋은 땅 바람 연기에 하늘 높고 樂土風煙敞
벼슬 길에 세월만 바쁩니다 名途歲序忙
서늘해지면 바로 돛을 걸려 했더니 乘涼旋挂帆
더위에 지쳐 다시 침상을 의지합니다 病熱更支牀
나그네 제비는 봄 나기 괴롭고요 旅燕經春苦
푸른 매는 그 어느 날 날아오를까요 蒼鷹幾日颺
가을이 오면 상락주 秋來桑落酒
함께 마시려 술병과 술잔을 씻어둡니다 應共洗壺觴
상락주는 뽕잎을 넣은 누룩으로 만들어 중양절에 마시는 술이라고도 하고, 중국 하동의 상락 고을에 우물이 좋아 뽕잎이 지는 시기에 그 물을 길어다 술을 빚으면 맛이 좋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다산이 실제 상락주를 즐겼는지 알 수 없지만, 계절감 있는 가을 술이어서 상락주를 거론한 것으로 보인다.
남대문 옆 회현방에서 친구 홍운백과 여름에 술 마실 때에, "하삭음을 우리가 마다할쏘냐 (不辭河朔飮)/ 꽃과 버들이 온 성에 그늘 드리웠거늘(花柳滿城陰)"이라고 했다. 하삭음은 더위를 피하면서 어울려 마시는 술을 말한다.
이렇듯 다산의 글에서는 구체적인 술 이름과 사연이 등장한다. 많은 선비들이 그냥 익명의 술을 마시고 시를 썼다면, 다산은 좀더 구체적으로 술 이름을 남겼다.
금주를 주장한 다산
▲ 다산 정약용 초상화. ⓒ 이재형
다산은 <경세유표>의 '각주고'에서 중국의 주세 징수 제도를 나열하면서 "우리나라는 비록 동쪽 변경에 처하여 있으나 삼한 이래로 군주가 술과 초를 팔아서 이익을 취한 예가 없다"고 하면서, 중국인들은 주세를 거두면서 "오히려 중국이라고 자존하니 또한 수치스럽지도 않단 말인가?"라고 질타했다. 다산은 술이나 식초 같은 백성들이 먹는 음식을 국가가 독점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다산은 <목민심서> 진황 6조에서 "곡식을 소모하는 데는 술과 단술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술을 금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흉년에 술을 금하는 것은 지금 상례가 되었다. 그러나 아전이나 군교들이 이를 빙자해서 소민(小民)들을 침탈하매, 술은 금하지 못하고 백성만 더욱 견디지 못한다. 또 막걸리(濁酒)는 요기가 되므로, 길 가는 자에게 도움이 되니 반드시 엄금할 것이 없다. 오직 성안의 소주는 아전과 군교들의 음탕과 주정을 부리는 근거가 되는 것이니, 엄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마땅히 소줏고리(酒甑)를 - 속명으로는 고오리(古吾里)라 한다 - 거두어다가 누고(樓庫)에 저장하고 아울러 도기점(陶器店)에 타일러서 소줏고리를 새로 만들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만일 비밀히 술을 빚는 자는 모두 벌금을 징수하여 진자(賑資)로 보충한다. 성 밖의 창촌(倉村)과 시촌(市村)만은 모두 성안의 예를 따르면 도움이 있을 것이다. 서로(西路)와 동래(東萊) 연읍(沿邑)에서 모두 구리고리(銅甑)- 술이 배(倍)나 나온다-를 쓰는 것은 더욱 금하기 쉽다."
증류기를 한자로는 주증(酒甑)이라고 했고, 소리말로는 고오리(古吾里)라고 했다는 기록이나, 부산 동래 지방에서는 술을 두 배씩 뽑아내는 구리로 된 고오리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이제와 다시 보니 새롭다.
세상은 돌고 돈다. 돌다가 뒤집어지기도 한다. 다산의 시대에는 곡물을 어떻게 하면 아낄까 고민했지만, 지금 세상은 곡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세상이 되었다. 다산이 <목민심서>에서 밝혀둔 말을 뒤집어서 "곡식을 소모하는 데는 술과 단술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술을 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다.
다산은 앞서 둘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격물(格物)에 대해서 말한다.
"주자(朱子)의 격물 공부도 이와 같은 것이다. 오늘 한 가지 사물에 대해 끝까지 궁구하고 내일 한 가지 사물에 대하여 끝까지 궁구한다는 것도 이와 같이 착수하는 것이다. 격(格)이라는 것은 끝까지 연구하여 끝까지 도달한다는 뜻이니, 끝까지 연구해서 끝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이다."
나는 다산이 학유에게 닭 기르는 법을 권유하는 글을, 외람되게도 닭을 술로 삼아 이렇게 고쳐 읽어본다.
"네가 술[닭]을 기른다는 말을 들었는데, 술[닭]을 기르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중에도 품위 있고 저속하며 깨끗하고 더러운 등의 차이가 있다. 진실로 양조서[농서]를 잘 읽어서 그 좋은 방법을 선택하여 시험해 보되, 색깔과 종류로 구별해 보기도 하고, 누룩[홰]을 다르게도 만들어 양조[飼養] 관리를 특별히 해서 남의 집 술[닭]보다 더 맛있고[살찌고] 더 향기롭게[번식하게] 하며, 또 간혹 시를 지어서 술[닭]의 정경을 읊어 그 일로써 그 일을 풀어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독서한 사람이 양조[양계]하는 법이다.
만약 이익만 보고 의리를 알지 못하며 기를 줄만 알고 취미는 모르는 채 부지런히 힘쓰고 골몰하면서 이웃의 술[채소]을 가꾸는 사람들과 아침저녁으로 다투기나 한다면, 이는 바로 서너 집 모여 사는 시골의 졸렬한 사람이나 하는 양조법[양계법]이다. 너는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이미 양조[양계]를 하고 있다니 아무쪼록 백가(百家)의 서적에서 양조[양계]에 관한 이론을 뽑아 주경[鷄經]을 만들어서 육우의 『다경(茶經)』과 유혜풍의 『연경(煙經)』과 같이 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세속적인 일에서 맑은 운치[凊致]를 간직하는 것은, 항상 이런 방법으로 예를 삼도록 하여라."
▲ 다산의 터를 잡은 다산의 묘소. ⓒ 막걸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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