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187
산성입보책(山城入保策)
2012년 최종석(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고려 정부가 몽고침입에 대응하여 지방 군현민을 험준한 산성으로 입보시킨 정책.
연원
고대 삼국시대에는 다양한 입지의 성(城)들이 활용되면서도 주로 군·현(郡縣) 중심지의 성인 치소성(治所城)이 방어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외적이 침입해오면, 군현민은 해당 지역의 군·현 중심지의 성으로 들어갔다. 고구려의 수·당 제국과의 전쟁이나 신라의 삼국통일전쟁도 치소성을 중심으로 하여 펼쳐졌다. 고려의 경우에도 몽고의 침입 이전에는 유사시 군현민의 입보처는 주현(主縣)과 속현(屬縣)의 구분 없이 설치된 군·현 중심지의 성이었다.
그런데 1231년(고종 18) 몽고의 제1차 침략 당시 그간 평상시는 물론이요 유사시의 방어 거점으로 기능해 온 군·현 중심지의 치소성은 비교적 광범한 지역에서 몽골의 침입에 한계를 드러내고 무력화되었다. 몽고의 제1차 침략을 저지하고자 화친(和親)은 했으나, 몽고과의 장기전을 도모한 최우정권(崔瑀政權)은 강화천도(江華遷都)의 결정·추진과 병행하여 각 도(道)에 사신을 보내 민인들을 산성과 해도(海島)로 입거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당시 해도와 더불어 입보처로 선택된 산성은 그 동안 활용되어 온 군·현 중심지의 성과 달리 군·현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험준한 산성이었다.
내용
최우정권은 몽고의 제1차 침입 이후 1232년(고종 19) 6월 강화천도와 병행하여 산성입보책(山城入保策)과 해도입보책(海島入保策)을 대몽항전을 위한 국가전략으로 확정하였다. 이미 해도입보는 1231년 몽고 제1차 침입 당시 북계(北界) 청천강 유역의 몇몇 주·현에서 시행된 바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국가에 의해 수용되어 1232년 전국적으로 확대 적용된 정책이 해도입보책이었다. 전국적 규모의 대몽항전을 위해 입보처로서 해도 이외에 산성이 추가되었다. 해도입보는 모든 지역을 대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해도입보가 용이하지 않거나 아예 불가능한 지역도 많았으므로 대개의 경우 산성이 입보처로 선택되었다.
산성입보책은 1232년 이후 몽고침략에 대응하여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그것은 몽고와 강화를 체결한 이후로도 출륙환도(出陸還都)하기 전까지는 무인정권에 의해 몽고에 대항하는 수단들 가운데 하나로 중요시되었다. 이후 충렬왕대에 고려 정부는 카단〔哈丹〕의 침입에 대응하여 산성입보책을 시행하였고 커다란 효과를 보았다.
몽고의 침입이 있거나 임박하였을 때, 국가는 민인들에게 명령하여 산성으로 입보하게 하였고, 사정이 나아지면 원래 지역으로 되돌아오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산성입보는 대개 지방의 수령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입보처에는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 산성겸권농별감(山城兼勸農別監) 등이 파견되어 입보민을 지휘·통제하였다.
산성입보의 기본 단위는 해도입보와 마찬가지로 주현과 속현의 구분이 없는 군·현 단위였다. 지방관이 입보를 지휘한다고 했을 때, 주현 및 예하 속현들은 각각을 개별 단위로 하면서 지방관 통솔 하에 산성으로 입보하였다. 그리고 입보처인 산성에는 단수가 아닌 복수의 주·현 및 예하 속현들이 입보하고 있었다. 입보처인 산성에는 여러 주·현들의 지방관이 존재하였기에, 방호별감이 파견되었을 경우에 이들은 복수의 지방관들 상위에서 입보민 전체를 관할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산성입보는 해도입보와 마찬가지로 삶의 터전을 떠나 멀고 험한 곳에 위치한 산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민인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기대하기 어뤄웠다. 따라서 고려 정부는 강력한 정책적 의지를 가지고 이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고려 정부는 안정적·효율적으로 산성입보책을 운영하기 위해 입보처인 산성에 37명에 이르는 방호별감을 파견하여 산성을 수축하거나 별초군(別抄軍)을 지휘하거나 입보한 민인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하였다.
변천
유사시 산성으로의 입보는 고려말 이후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몽전쟁기와 같이 활성화되지는 못하였다. 고려말 이후 방어 방식은 기본적으로 외적의 침투 지역인 변경지대를 집중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산성의 군사·방어적 기능 내지 입보처로서의 활용은 이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기왕의 성들 가운데 다수가 폐기·방기되었다. 이러한 점과는 달리 고려말 이후로도 입보처로서 계속 활용된 산성에 여러 군·현의 민인들이 한꺼번에 입보하는 점은 대몽전쟁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편, 고려말 이후 입보처로 활용된 성의 경우 대몽전쟁기와 달리 여러 성격의 성들이 혼재된 특징을 보여준다. 대몽전쟁기에 입보처로 활용된 산성들 중의 일부가 여전히 활용되기도 하였고, 고려시대 군·현 중심지의 성들 가운데 일부가 입보처로 기능하였으며, 고려말 이후로 주로 평지에 신축된 읍성(邑城)들이 입보처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신축된 읍성 외에도 구래의 것들 가운데 전략적으로 유용한 몇몇 성이 입보처로 활용된 것이다.
의의와 평가
산성입보책은 해도입보책과 더불어 대몽전쟁기 몽고침입에 대응할 수 있는 주요한 방어전략으로 기능하였다. 산성입보책은 소극적인 방어책이기는 하였지만, 몽고과의 장기전을 이끄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산성입보책의 시행은 방어처로 기능한 성이 군·현 중심지의 치소성에서 이와 이질적인 산성으로 변화한 사실을 의미한다. 군·현 중심지의 성은 읍치(邑治)에 있으면서 구릉 내지 높지 않은 산에 자리하였다. 반면, 강화천도 이후 등장한 산성은 일반적으로 당시 치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험준하고 산속 깊숙한 곳, 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하였다.
몽고침입 이전의 군·현 중심지의 성이 평상시와 유사시를 불문하고 군사·방어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자위 거점이기도 했으며 향리층의 지방지배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몽고침입 이후 군·현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험준한 산성으로의 입보책은 외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정책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몽고침입 이전의 지역방어 방식이 군·현 중심지의 성을 방어 거점으로 하는 개별 군·현을 단위로 하는 것과 달리, 산성입보책은 복수의 군·현을 포괄하는 광역이 방어 단위가 되어 그곳 군·현들이 산성에 입보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곧, 산성입보책은 기왕의 개별 군·현 단위의 방어에서 벗어나 복수의 군·현을 포괄하는 광역을 단위로 한 방어가 입보처로 지정된 산성에서 시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한국 중세축성사 연구 (유재춘, 경인문화사, 2003)
「대몽항쟁·원간섭기 산성해도입보책의 시행과 치소성 위상의 변화」(최종석,『진단학보』105,2008)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윤용혁,『한국사』20-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국사편찬위원회,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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