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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경제"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고려의 건국과 경제 역사 이래 처음으로 주조화폐를 만들어 쓰다
2003-05-13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전략)
고려의 경제
고려의 국토는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지역을 북쪽 경계로 하는 한반도 전부였다. 따라서 중부 이북은 산악지역이라 경제적 가치가 없었고 중·남부에 넓은 평야가 있어 이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했다. 삼면이 바다지만 수산업은 그리 발달하지 못했고 대신 바닷길을 개척해 중국 등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해외 무역을 활발히 했다.
나라의 살림을 운영하기 위해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주로 곡물로서 조세라 했고 이를 위해 토지와 농업제도가 잘 발달했다. 다음으로 경제를 뒷받침했던 것은 상업이다. 상업은 국내의 시장보다 해외 여러 나라와 장사하는 무역이 활발했다. 고려의 발전한 항해술과 조선술을 이용해 중국,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베트남, 태국, 또는 멀리 인도와 아라비아까지 왕래했다.
무역 등 상업의 발전으로 역사 이래 처음으로 고려는 쇠 화폐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고려가 처음으로 쓴 화폐는 지폐가 아니라 쇠로 만든 주조화폐로서, 주로 국내 상업에 쓰였다. 이밖에 귀족 이상 상류층이 필요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수공업과 배를 만드는 조선업도 매우 발달했다.
농업
고려는 함경도와 강원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땅이 논과 밭을 만들 수 있는 경작지로서 농업이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곡물을 재배할 수 있는 전국 농토의 크기는 50만 결이었다. 1결은 쌀 20석을 생산할 수 있는 면적으로, 연간 1천만 석의 곡물을 생산할 수 있는 넓은 농토다.
따라서 고려의 경제는 농업위주였고, 국가를 운영하는 세금도 곡물로 거두어들여 관리들의 녹봉은 물론 국가 기관을 운영하는 비용도 곡물로 썼다. 이렇게 국가의 경제가 농업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업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전시과(田柴科)라는 토지제도가 생겨났다. 녹과전 또는 과전법이라고 불렸던 전시과는 귀족이나 관리들 또는 군인들처럼 나라를 위해 일하는 대가로 주는 급여인데, 각자의 지위와 충성 정도에 따라 응분의 농토나 산을 녹봉으로 나누어주는 제도다.
토지제도의 또 한가지로 수조권이라는 것이 있었다. 국가가 세금으로 농민들로부터 수확량의 1/10을 거두어들이는 권리를 귀족이나 관리들에게 위임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세도가들이 갖는 특권으로서, 귀족이나 관료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착취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농민들을 괴롭혔다.
수조권 때문에 고려 때부터 농장이 많이 생겨났다. 수조권을 국가로부터 위임받는 왕족, 귀족, 관료나 사원이 농민들로부터 농토를 강제 매입하거나 곡물을 농민에게 빌려주고 높은 이자로 곡물을 받아내는 고리대곡, 농민을 동원해 강제로 개간시켜 착복하거나 세금을 내지 못하는 농민의 토지 몰수 등 악랄한 방법으로 토지를 넓혀 만든 농장들이었다.
이외에도 농민을 괴롭힌 것은 절이었다. 국가의 불교 보호정책으로 수조권을 가진 사원들이 절에 시주한다는 명목으로 신자나 농민들의 땅을 강제로 탈취해 재산을 늘려 대지주가 되곤 했다. 이런 토지제도를 악용한 권력층의 만행 때문에 서민들은 계속 빈곤을 면치 못했고, 세도가들은 부를 축적해 빈부의 차가 심했다.
상업
고려의 상업은 수도인 개경을 중심으로 해안도시와 지방의 교통요지에서 성행했다. 궁궐의 귀족과 관청의 관리 등 상류층의 수요품과 생활용품을 우선 공급하고, 백성들 사이에 물물교환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전했다. 고려의 상업형태는 크게 국내의 도시상업과 지방상업, 그리고 해외 무역으로 나뉜다.
왕이 있는 개경을 중심으로 대도시에는 연립 점포로 형성된 시전상업이 발달했다. 특히 개경의 번화가인 광화문 거리에는 수많은 점포를 가진 상설시장이 열려 궁궐과 관청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면서 나라에서 조세로 거두어들여 사용하고 남은 잉여품들을 판매하는 어용상업이 번창했다고 <고려원경>에 기록되어 있다.
지방에는 교통요지마다 시장이 생겨 주변 농어민들이 곡물이나 옷감 등 생산품을 화폐로 거래하거나 물물교환했고, 이들 지방시장은 대개 5, 6일마다 한 번씩 열렸다. 특히 지방을 중심으로 이 시장 저 시장을 다니며 물품을 사고 판매하는 보부상상업과 강이나 하천을 통해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하는 선상(船商)상업이 고려 때부터 발달했다.
이런 행상상업(行商商業)에서 거래규모나 상품운반규모가 컸던 쪽은 선상이었다. 배를 이용하기 때문에 등짐이나 조랑말로 운반하는 보부상보다 많은 상품을 운반할 수 있어 돈도 훨씬 많이 벌었다. 고려 때 선상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1983년 완도 앞바다에서 발굴된 해저 유물선이 증명하고 있다. 이 배에서는 청자 등 상품이 3만여 점이나 발견되어 고려시대 선상들의 거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해외 무역은 조선시대 중엽 이전까지 어느 나라보다 활발했다. 조선술과 항해기술의 발달로 개경을 중심으로 서·남해안 도시에서 송나라·일본·요나라·금나라 멀리는 대식국(아라비아)·인도까지 활발하게 교역했다. 이렇듯 고려가 해외무역을 활발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태조 왕건의 뛰어난 해상무역 경험과 해전기술에다 많은 선박까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태조로 등극한 이후 이런 해상 능력을 이용해 백제의 최대 국제항구인 전남 영산강변의 나주를 함락하고 영산강 수로를 장악해 고려의 무역이 해외로 활발하게 뻗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고려는 중기 이후 동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한국 역사상 마지막 해상 왕국으로 부상했다.
고려의 해외 교역은 주로 왕실과 귀족 등 상류층을 위한 생활용품과 사치품 등을 수입해 공급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고려는 특히 송나라와 무역을 활발하게 했다. 현종 때부터 260년간 무역을 위해 송나라를 왕래한 회수는 120여 회이고, 송나라 상인 5천여 명이 고려에 입국했다. 고려의 최대 국제항구는 개경 근방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였다. 이 항구가 대외무역 쪽으로 얼마나 번창했던지, 고려의 대학자이며 문신인 이규보는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조수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배가 꼬리를 연이었다. 아침에 벽란도를 떠나면 한낮이 채 못되어 남방의 하늘로 들어가는구나’라고 했다.
주조화폐
고려는 상업의 발달과 함께 역사 이래 처음으로 주조화폐를 만들어 상업에 이용했다. 고려가 만들어 사용한 첫 화폐는 쇠로 만든 둥근 철전으로, 서기 996년 성종 15년부터 앞면은 ‘건원중보’, 뒷면은 ‘동국’이라는 글자를 새긴 주화를 썼고, 중국 당나라의 주화와 같다고 하여 얼마 후에는 이름을 ‘동국중보’로 고쳐 사용했다. 초기에는 주로 도시에서 썼고 지방에서는 여전히 쌀과 옷감을 화폐 대용으로 쓰다가 본격적으로 주화를 쓰기 시작한 것은 서기 1097년 숙종2년부터다. 이때 조정에는 주전관이라는 돈 만드는 부서가 설치되었고 은으로 만든 `은병` 돈을 만들어냈다. 고려의 지형을 본떠 만든, 쌀 15섬의 가치를 가진 8가지 주화가 쓰였지만 서민들은 사용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어서 주로 귀족들의 축재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수공업
고려의 수공업은 농업만큼 발달하지 못했지만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왕족이나 귀족 또는 관청에서 필요한 가공품을 만들기 위해 이루어졌고, 상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의 수공업은 크게 관청수공업, 소수공업, 사원수공업, 일반수공업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관청수공업이다. 이는 다시 조정과 왕족 또는 귀족들이 필요한 무기, 생활도구, 사치품, 수레, 기구 등 관수품을 만들어내는 중앙관청수공업과 지방의 행정기관이 있는 도시에서 궁궐용 공물과 지방관청이나 관리들이 필요한 가공품을 만드는 지방관청수공업으로 나뉘었다. 지방관청수공업은 다시 금기방, 잡직방, 갑방 등으로 세분화되었고, 중앙관청수공업보다 규모가 작았으며 무기 등 중요한 가공품은 만들 수 없었다.
중앙관청수공업은 개경의 중앙관청 내에 설치되어 각 전문분야별로 14개의 소수공업관청이 있었다. 이들 14개 부서에서는 군수품과 국가행사에 필요한 물품 또는 왕족과 귀족들의 옷·장신구 같은 필수품, 사치품들을 주로 만들었다.
관청수공업에는 나라에서 최고의 분야별 전문기술을 가진 공장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공장들은 기능별로 세분화되어 각자 특기에 맞는 물건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철분을 함유한 청록색 또는 담황색 유약을 입힌 고려의 청자는 세계적인 자기예술품으로 유명하다. 청자는 원래 중국의 은나라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당과 송나라 때 매우 발달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 초기에 제조기술이 들어와 고유의 자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독창적인 기술과 갖가지 형태의 무늬로, 고려청자는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자 중에서 자기에 자개를 파묻어 무늬를 낸 12세기 후의 상감청자를 최고품으로 치는데, 이 청자들은 상류층 귀족들이 주로 썼고 무역상품으로 많이 거래되었다.
소수공업은 수공품을 만들 수 있는 원료, 즉 철·금·은·동·종이·기와·소금 등의 소재를 만드는 분야였다. 철소, 금소, 은소, 동소, 염소, 와소, 탄소 등 전국에 분포된 생산지에 공장을 세워 만들어낸 소재들을 중앙정부와 지방관청에 납품하고, 남은 물건들은 시장을 통해 백성에게 판매했다.
원수공업으로 불리기도 하는 사원수공업은 절에서 필요한 물건을 승려나 신도들이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옷감, 술, 기와, 소금 등을 생산해 절에서 쓰고 잉여품을 일반백성들에게 팔았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사원공업이 왕성해져 지방 시장을 거의 독점한 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반수공업은 가내수공업이라고도 한다. 일반인들이 농한기나 여가마다 옷감, 약제, 건어물, 육포, 가죽 등 비교적 만들기 쉬운 생활품을 만들어 관청이나 상류층에 공급하거나 시장을 통해 판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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