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038
태조왕(太祖王)
1997년 서영대 2009년 김선주(중앙대학교)
이칭 : 국조왕(國祖王), 태조대왕(太祖大王), 궁(宮), 어수(於漱)
출생일 : 47년(민중왕 4)
사망일 : 165년(차대왕 20)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6대(재위:53~146) 왕.
국조왕(國祖王) 또는 태조대왕(太祖大王) 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궁(宮)이며, 아명은 어수(於漱)이다. 유리왕(瑠璃王)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夫餘) 출신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능히 볼 줄 알았고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고 한다. 53년에 모본왕(慕本王)이 살해되자 여러 관리들이 재사를 왕으로 추대했으나, 재사가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양하므로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주변의 소국을 병합하였으며, 후한(後漢)의 군현(郡縣)을 공격하여 한나라 세력을 축출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생애 / 활동사항
즉위 당시 나이가 7세에 불과해 태후(太后)가 섭정하였다. 56년(태조왕 4) 동옥저(東沃沮)를 정복해 성읍(城邑)으로 삼음으로써 동으로는 동해,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68년에는 부여의 망명세력인 갈사국(曷思國)을 병합하였다. 72년에는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공격하여 그 왕을 사로잡았고, 74년에는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로 하여금 주나(朱那)를 공격하게 하여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는 등, 주변 소국(小國)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98년 8개월에 걸친 책성(柵城)의 순수(巡狩), 102년의 책성 안무(安撫), 114년의 남해(南海)지방 순행(巡幸) 등을 통해 확보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갔다.
한편,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고구려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후한에 대해서 때로는 사절을 파견해 평화공세를 펴기도 하고, 때로는 적극적인 투쟁을 통해 그들의 압력을 극복하고 서방진출을 꾀하기도 하였다.
즉, 55년 요서지역에 10성을 쌓게 하여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105년에는 후한의 요동군(遼東郡)을, 111년과 118년에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玄菟郡) 및 낙랑군 소속의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121년 1월 후한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玄菟郡太守) 요광(姚光),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의 침공을 받았지만, 겉으로는 항복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요동·현도를 공격하고 현도군 소속의 후성(候城)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鮮卑族)과 더불어 요동군 소속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해 태수 채풍을 살해하였다. 12월과 이듬해인 122년에는 마한(馬韓)·예맥(濊貊)과 함께 현도군·요동군을 공격하였다. 146년에는 요동군의 신안거향(新安居鄕)과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살해하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생포하는 등, 후한과 낙랑과의 교통로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조왕은 재위기간 동안 후한의 압력 차단과 서방진출 기도를 통해 고구려의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68년에는 투항해온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를 우태(于台)로 삼았고, 74년에는 이미 복속했던 주나의 왕자 을음을 고추가에 임명하였다.
이로써 주변 소국의 지배세력들을 왕권 하에 흡수해 전제왕권적 지배체제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태조왕은 후한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의 침입을 격파하면서 점차 권력을 장악한 동생 수성(遂成)이 왕위까지 노리자 좌보(左輔) 고복장(高福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46년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후 별궁(別宮)에서 은거하다가, 165년 나이 119세로 사망했다. 이 때 신대왕(新大王)에게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
상훈과 추모
태조왕이 사망한 해에 대해서『삼국사기(三國史記)』와『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모두 165년이라고 한 반면에,『후한서(後漢書)』에는 121년이라고 되어 있다. 만약『후한서』에 따른다면, 재위도 121년에 끝나므로 122년 이후의 사실은 태조왕의 업적이 아닌 것이 되므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그런데 태조왕이라는 왕호나 119세라는 지나치게 긴 수명, 중국측 사서와의 차이 등으로 인해 이전의 왕계와는 단절된 모습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대체로 학계에서는 태조왕대에 고구려 왕계의 변동이 있었다고 본다. 모본왕 피살 이후 고구려 연맹체 내부에 상당 기간 분쟁과 혼돈이 진행된 뒤 태조왕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 통합을 추진했으며, 소수림왕(小獸林王)대에 태조왕계에 태조왕 이전의 왕계를 연결시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조왕계와 그 이전 왕계를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태조왕의 수명과 재위기간이 지나치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식의 변동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비류부(沸流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의 변동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계루부 내에서 이전의 왕계와는 다른 방계(傍系)로의 변동이라는 견해 등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후한서(後漢書)
「고구려 국가 형성기의 왕계」 ( 김기흥 ,『고구려의 국가 형성』,고구려연구재단,2005)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4,5세기 고구려 왕실(高句麗 王室)의 세계인식 변화(世系認識 變化)」 ( 조인성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4,1991)
「고구려왕비족고(高句麗王妃族考)」 ( 이기백 ,『진단학보(震檀學報)』20,1959)
「高句麗王系小考」 ( 鄭早苗 ,『朝鮮歷史論集』上,1979)
「高句麗王家の上世の世系について」 ( 池內宏 ,『東亞學』3,1940;『滿鮮史硏究-上世篇-』,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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