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 현장 명장면을 찾아서
고구려사 명장면 142
임기환 2022. 2. 3. 15:03
지난 회까지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고구려 역사의 명장면을 살펴보는 이 기획도 이제 마무리되는 분위기로 생각하는 독자분도 계실 듯하다. 사실 필자가 '고구려사 명장면'이라는 이 기획을 시작할 때에는 50~60회 정도로 추려서 소개할 생각이었는데, 연재 중에 고구려사를 좀 더 풍부하게 알고 싶다는 독자분들의 요청이 적지 않았고, 막상 연재를 진행하다 보니 필자 자신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점점 늘어났다. 그래서 명장면의 주제도 좀 더 풍성하게 다시 고르고, 내용 서술의 밀도도 높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140회까지 진행하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 수 있고 알고 싶은 고구려 역사 중에 명장면이 아닌 역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독자분들에게 전해드리고 싶은 고구려 역사의 주요 장면들을 필자 나름으로는 신중하게 선택하였다.
지난 연재 목차를 되돌아보니 대략 광개토왕대까지는 애초 기획한 연재 회수에 맞춰 이른바 '명장면'에 해당하는 주제를 고르고 골랐으니 명장면 중의 명장면쯤 되겠다. 하지만 지금 보니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생략하고 빼놓은 주제가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초기 연재글은 원고 분량도 대체로 10매 내외로 한정하여 맞추다 보니 글의 호흡도 짧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름 흥미진진한 고구려 초기 역사가 어찌 보면 겨우 골격만 갖춘 모양새가 되었다.
고구려사 명장면 연재글의 전체 흐름을 보면 초기 역사는 소략한데 점점 역사 장면들이 늘어나고 풍부해졌으니, 고구려사 전체 맥락에서 앞뒤 균형이 맞지 않은 셈이다. 앞서 이런저런 변명을 하였지만 어쨌거나 필자의 생각이 짧았던 탓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건국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초기 역사를 좀 더 풍성하고 제법 번듯하게 다시 서술하고픈 생각이 굴뚝같았다. 다만 이런저런 공백들을 메운다고 새삼스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꺼내는 방식도 그리 썩 내키지는 않는다.
그동안 명장면의 연재는 주로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풀어나갔으며 고구려 역사 현장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는 거의 하지 않았다. 애초에 현장 탐방은 연재 뒷부분에서 따로 진행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만주 일대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 유적과 역사 현장을 가장 많이 발로 뛰어다니며 돌아본 연구자 중 한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1993년에 첫 답사를 시작으로 25여 년 동안 거의 매년 한두 차례 이상 만주 땅 고구려 유적 탐방을 다녔다.
필자가 이렇게 부지런히 유적 탐방을 다닌 이유는 소략한 문헌 자료가 전해줄 수 없는 고구려 역사를 현장에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탐방을 갈 때마다, 가는 곳곳마다 새롭게 고구려 역사를 탐색할 수 있었다. 때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문헌 자료의 내용에 대해 역사 현장에서 그 해석의 단서를 찾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경험담을 하나 소개하겠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답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1년여 준비를 하고 1993년 여름에 동료 연구자들과 마침내 중국 고구려 유적 첫 탐방길에 나섰다. 요새는 아침 일찍 인천공항을 출발하면 선양을 거쳐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당일 저녁에 지안시에 도착할 수 있다. 지안시는 고구려 수도 국내성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때는 톈진시로 입국하여 베이징을 거쳐 비행기로 창춘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퉁화로 이동한 뒤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지안에 도착하기까지 참으로 먼 길을 돌고돌아서 갔다. 물론 창춘이나 퉁화도 고구려 영역이었으니 그곳에서도 고구려의 자취를 볼 수 있었지만, 마음은 내내 서둘러 장군총과 광개토왕릉비가 있는 국내성에 들어가고픈 생각뿐이었다. 기차로 노령산맥을 넘어 지안시로 들어가는 순간 기차 차창 밖으로 장군총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던 그때 그 장면이 지금까지도 필자의 마음에 최고의 '명장면'으로 뚜렷하게 남아 있다. 어쩌면 그 감동적인 장면이 25여 년 동안 고구려 역사 탐방길에 나서게 하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https://blog.kakaocdn.net/dn/lJKxa/btsKIuIulhe/MEWfPYFtDkkMYXes8qAN80/img.jpg)
집안의 우산에서 내려다 본 집안 시내 삼실총 /사진=필자, 1993년
그때는 오녀산성이 있는 환런시는 외국인 출입이 통제됐었는데 멀리서나마 오녀산성을 보고 싶어서 버스로 지안에서 환런까지 먼길을 다녀왔다. 그런데 이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현장 공부의 장점을 깨닫게 되었다. 비포장도로로 굽이굽이 분수령을 넘고 천변의 평야지대를 지나면서, 비로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삼국지' 고구려전에 등장하는 '나(那)'와 '노(奴)'라는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독자분들도 알고 있다시피 고구려 초기에는 5부가 있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비류나부(沸流那部), 연나부(椽那部)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같은 5부가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나(那)'와 '노(奴)'는 같은 말로 우리말의 '내(川)'와 서로 통하고 혹은 천변의 평야를 뜻하는 말이다.
지안에서 환런을 오가는 내내 이런 '나(那)'의 지리적 형세와 풍광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천변의 평야를 달리다가 산길에 접어들어 분수령을 넘어가면 다시 천변의 평야가 나타나는 식이었다. 천변의 들녘 곳곳에는 여기저기 작은 마을이 둥지를 틀듯 자리 잡고 있었다. 집이 중국식 벽돌집이라는 점만 빼놓고는 아마도 고구려 시대에도 그런 풍광은 마찬가지 아니었나 싶었다.
마치 분지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 크고 작은 천이 흐르고, 천변 곳곳에 마을과 읍락을 이루면서 이들이 하나의 작은 정치체를 형성하였는데 고구려인들은 스스로 이런 정치집단을 '나'라고 불렀던 것이다. 고구려의 발상지는 압록강과 중상류와 혼강 일대였다. 많은 지류가 모여 흘러 압록강과 혼강을 이루듯이 이런 지류천이 흐르는 곳곳에 '나'와 '나국(那國)'이 이루어지고, 이들 나와 나국이 모여 고구려를 구성했음을 현장에서 비로소 제대로 체험할 수 있었다. 지안과 환런 사이 땅. 여기가 고구려의 발상지라는 점을 실감했다.
역사 현장을 탐방할 때 학문적 탐구 외에도 역사의 현장에서 받는 직관적인 인상과 마음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감흥, 이런 것들도 과거와 소통하는 매우 중요한 방식임을 그동안의 탐방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역사 현장을 탐방하는 것은 연구자만이 아니라 역사에 애정을 갖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역사를 이해하는 소중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마음먹으면 갈 수 있는 백제사나 신라사의 역사 현장과는 달리 고구려 역사 현장을 탐방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북한에 있는 현장은 아예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고,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 탐방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굳게 마음먹고 고구려 역사 현장을 다녀온 분들은 모두 그 감동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고구려 역사 현장에 대한 소개가 값지다고 나름 생각한다.
고구려 역사 현장을 소개한다고 해서 고구려 유적 답사기 같은 내용을 쓰려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 전기의 역사를 담뿍 담고 있는 도성인 졸본(중국 랴오닝성 환런시)과 국내성(중국 지린성 지안시)에서 역사 현장과 밀착된 고구려 역사를 풀어보도록 하겠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듬성듬성 소략하게 지나친 고구려 전기 역사를 그렇게 보완하고자 하는 의도이기도 하다.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고구려 역사 현장 명장면을 이어가고자 한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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