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2KKR_A9999_1_0000394&isEQ=true&kristalSearchArea=P, http://db.history.go.kr/url.jsp?ID=tc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A%B5%AD%EC%96%91%EC%99%95
고국양왕(故國壤王)
고구려 제18대왕.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생몰 : 미상∼391년.
재위 : 384∼391년.
이름 : 이련(伊連), 이속(伊速), 어지지(於只支)
가계
부왕 : 고국원왕
모후 : ?
형 : 소수림왕
왕후 : 미상 ?
아들 : 고담덕(高談德) - 제 19대 국왕 광개토왕이 된다.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인 소수림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즉위하였다.
소수림왕 때의 여러 제도 정비를 통하여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쪽으로는 385년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군과 제3현도군을 점령하는 등, 《자치통감》권106에 실린 호삼성(胡三省)의 주에 의하면, 385년 이후 “후연은 고구려를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할 정도로 후연에 대하여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때 확보한 요동·현도의 두 군은 386년 다시 후연에 빼앗겼다.
또, 남쪽으로는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고, 389년과 390년 백제의 침공을 받는 등 백제와 공방전을 되풀이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북으로는 후연, 남으로는 백제와 대립하면서 국력을 신장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392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 내물마립간으로 하여금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내게 하였고, 또 불교신앙의 확대를 꾀하였으며, 국사(國社), 즉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고구려 세력권의 확대나 불교이념의 보편화 및 왕실시조신앙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제사체계정비 등의 사상정책을 전하는 주목할만한 기사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392년은 광개토왕 2년에 해당되는만큼, 그것을 고국양왕 말년의 사실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광개토왕의 사실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고국양왕 관련글
고국양왕(故國壤王) - 한국역대인물,한국사DB,위키 http://tadream.tistory.com/360
고국양왕 - 위키 http://tadream.tistory.com/359
고구려왕 일대기 (18대 고국양왕) - jo29694631 http://tadream.tistory.com/207 (비공개)
http://blog.naver.com/jo29694631/10109203941 (원문)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A%B5%AD%EC%96%91%EC%99%95
고국양왕(故國壤王)
고구려 제18대왕.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생몰 : 미상∼391년.
재위 : 384∼391년.
이름 : 이련(伊連), 이속(伊速), 어지지(於只支)
가계
부왕 : 고국원왕
모후 : ?
형 : 소수림왕
왕후 : 미상 ?
아들 : 고담덕(高談德) - 제 19대 국왕 광개토왕이 된다.
384년 음11월 [소수림왕 14년 11월 : 고국양왕 1년] 소수림왕 죽음, 고국양왕 즉위함.
385년 음6월 [고국양왕 2년 6월] 4만명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공격
385년 음11월 [고국양왕 2년 11월] 연왕 모용농(慕容農)이 침입.
386년 음1월 [고국양왕 3년 1월] 담덕(談德)을 태자로 삼음.
386년 음8월 [고국양왕 3년 8월] 백제를 침범함.
386년 음10월 [고국양왕 3년 10월] 날씨가 따뜻하여 복숭아·오얏꽃 핌.
388년 음4월 [고국양왕 5년 4월] 큰 가뭄 피해를 입음.
391년 음3월 [고국양왕 8년 3월]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고 명함.
391년 음5월 [고국양왕 8년 5월 : 광개토왕 1년] 고국양왕 죽음, 광개토왕 즉위함.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인 소수림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즉위하였다.
소수림왕 때의 여러 제도 정비를 통하여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쪽으로는 385년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군과 제3현도군을 점령하는 등, 《자치통감》권106에 실린 호삼성(胡三省)의 주에 의하면, 385년 이후 “후연은 고구려를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할 정도로 후연에 대하여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때 확보한 요동·현도의 두 군은 386년 다시 후연에 빼앗겼다.
또, 남쪽으로는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고, 389년과 390년 백제의 침공을 받는 등 백제와 공방전을 되풀이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북으로는 후연, 남으로는 백제와 대립하면서 국력을 신장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392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 내물마립간으로 하여금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내게 하였고, 또 불교신앙의 확대를 꾀하였으며, 국사(國社), 즉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고구려 세력권의 확대나 불교이념의 보편화 및 왕실시조신앙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제사체계정비 등의 사상정책을 전하는 주목할만한 기사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392년은 광개토왕 2년에 해당되는만큼, 그것을 고국양왕 말년의 사실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광개토왕의 사실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廣開土大王陵碑文
資治通鑑
고국양왕 관련글
고국양왕(故國壤王) - 한국역대인물,한국사DB,위키 http://tadream.tistory.com/360
고국양왕 - 위키 http://tadream.tistory.com/359
고구려왕 일대기 (18대 고국양왕) - jo29694631 http://tadream.tistory.com/207 (비공개)
http://blog.naver.com/jo29694631/10109203941 (원문)
'고구려 > 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개토왕(廣開土王) - 한국역대인물,한국사DB,위키 (0) | 2011.11.01 |
---|---|
광개토왕 - 위키 (0) | 2011.11.01 |
고국양왕 - 위키 (0) | 2011.11.01 |
소수림왕(小獸林王) - 한국역대인물,한국사DB (0) | 2011.10.31 |
소수림왕 - 위키 (0) | 2011.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