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2KKR_A9999_1_0005816&isEQ=true&kristalSearchArea=P, http://db.history.go.kr/url.jsp?ID=tc
http://ko.wikipedia.org/wiki/%EC%86%8C%EC%88%98%EB%A6%BC%EC%99%95
소수림왕(小獸林王)
고구려 제17대왕.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
생몰 : 미상∼384년(소수림왕 14).
재위 : 371∼384년.
이름 : 구부(丘夫)
가계
부왕 : 고국원왕
모후 : ?
동생 : 고국양왕
왕후 : 미상 ?
355년(고국원왕 25)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10월에 부왕이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평양 大城山城)까지 진격해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고국원왕대의 대외진출기도의 실패 등으로 말미암은 고구려 사회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련의 체제정비를 도모하였다. 즉 372년(소수림왕 2)에는 전진(前秦)에서 외교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각각 맞아들였고,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 省門寺의 잘못)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는 한편, 372년에는 유교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유교이념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상정책은 기왕의 부족적 관념체계를 극복하며, 나아가서는 초부족적 국가질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이념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373년에는 국가통치의 기본법인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는데, 이는 부족국가시대 이래의 관습법체계를 일원적인 공법체계로 재구성하고 성문화함으로써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련의 체제정비를 위한 시책은 고구려가 4세기말∼5세기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데 기틀을 마련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374년·375년·376년에 잇달아 백제를 공격하는 등 백제와의 충돌이 그치지 않았으며, 또 378년에는 거란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연(前燕)이 멸망한 뒤 북중국의 패자로 등장한 전진(前秦)과 372년과 377년에 외교사절을 교환하고 불교를 수용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국력의 분산을 막을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국가체제정비를 위한 일련의 시책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외적 조건이 되었다.
죽은 뒤에 소수림(小獸林)에 묻혔다.
http://ko.wikipedia.org/wiki/%EC%86%8C%EC%88%98%EB%A6%BC%EC%99%95
소수림왕(小獸林王)
고구려 제17대왕.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
생몰 : 미상∼384년(소수림왕 14).
재위 : 371∼384년.
이름 : 구부(丘夫)
가계
부왕 : 고국원왕
모후 : ?
동생 : 고국양왕
왕후 : 미상 ?
371년 음10월 23일 [고국원왕 41년 10월 23일 : 소수림왕 1년] 고국원왕 전사, 소수림왕 즉위함.
372년 음6월 [소수림왕 2년 6월] 전진왕 부견(蔀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
373년 [소수림왕 3년] 율령(律令)을 반포함.
374년 [소수림왕 4년] 승려 아도(阿道)가 옴.
375년 음2월 [소수림왕 5년 2월] 초문사(肖門寺)를 창건
375년 음7월 [소수림왕 5년 7월 : 근초고왕 30년 7월]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함락.
376년 음11월 [소수림왕 6년 11월] 백제의 북쪽 경계에 침입함.
377년 음10월 [소수림왕 7년 10월 : 근구수왕 3년 10월] 백제 군사 3만명이 평양성을 공격함.
377년 음11월 [소수림왕 7년 11월] 백제를 공격하고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냄.
378년 음9월 [소수림왕 8년 9월] 거란이 북쪽변경에 침입하여 8부락을 함락시킴.
384년 음11월 [소수림왕 14년 11월 : 고국양왕 1년] 소수림왕 죽음, 고국양왕 즉위함.
355년(고국원왕 25)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10월에 부왕이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평양 大城山城)까지 진격해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고국원왕대의 대외진출기도의 실패 등으로 말미암은 고구려 사회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련의 체제정비를 도모하였다. 즉 372년(소수림왕 2)에는 전진(前秦)에서 외교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각각 맞아들였고,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 省門寺의 잘못)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는 한편, 372년에는 유교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유교이념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상정책은 기왕의 부족적 관념체계를 극복하며, 나아가서는 초부족적 국가질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이념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373년에는 국가통치의 기본법인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는데, 이는 부족국가시대 이래의 관습법체계를 일원적인 공법체계로 재구성하고 성문화함으로써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련의 체제정비를 위한 시책은 고구려가 4세기말∼5세기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데 기틀을 마련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374년·375년·376년에 잇달아 백제를 공격하는 등 백제와의 충돌이 그치지 않았으며, 또 378년에는 거란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연(前燕)이 멸망한 뒤 북중국의 패자로 등장한 전진(前秦)과 372년과 377년에 외교사절을 교환하고 불교를 수용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국력의 분산을 막을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국가체제정비를 위한 일련의 시책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외적 조건이 되었다.
죽은 뒤에 소수림(小獸林)에 묻혔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海東高僧傳
高句麗 思想政策에 대한 몇가지 檢討(李萬烈, 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1971)
高句麗律令에 관한 一試論(盧重國, 東方學志 21,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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