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왕위에 올라
소수림왕 없는 광개토왕은 생각할 수 없다. 소수림에게 광개토는 조카였다. 아들 없이 죽은 소수림을 이어 그의 동생 고국양왕이 등극했고, 광개토는 고국양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관계만으로 광개토의 소수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수림왕이 즉위하던 371년, 고구려는 일찍이 없었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아버지인 고국원왕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백제군이 평양성까지 쳐들어와 벌인 전투에서였다. 다행히 355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충분한 정권 이양 훈련을 받은 소수림이었다. 그렇기는 하나 남쪽으로 백제의 위협과 북쪽으로 만주 지역의 복잡한 정치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왕위에 있었던 기간 불과 13년, 그 사이에 그는 이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광개토는 그런 바탕에서 고구려 대국의 문을 활짝 열었다.
부왕이 전쟁 중에 사망하는 절대 위기를 소수림왕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전해지는 역사상의 몇 가지 사실들로 우리는 그의 시대를 구성해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실들은 고구려의 국격이 만들어지는 데 무척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는 것들이다. 372년 불교공인과 태학의 설립, 373년 율령의 반포가 그것이었다. 소수림왕은 사상과 교육과 법률의 틀을 즉위 3년 안에 발 빠르게 마무리 지었다.
로마의 기독교 공인과 유사한 고구려의 불교 공인
서양에서 313년은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이라는 큰 사건으로 기억된다. 서방의 정제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를 만나 자신의 동생과 결혼하게 하고, 제국의 여러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기독교를 공인하기로 한다. 이른바 밀라노칙령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 진흥 정책을 쓴 데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내전에 내전을 거듭하는 전쟁 끝에 권력을 잡은 콘스탄티누스에게 확고한 권력 기반은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는 여기에 기독교의 힘을 이용하기로 한다. 황제는 교회의 권위와 하느님의 권위에 따라 임명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공인 10여 년 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를 제거하고 로마 제국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서양에서의 기독교가 동양으로 오면 불교로 바뀐다. 종교의 정치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묻노라면 그것은 거의 틀림없다. 로마의 기독교 공인으로부터 꼭 60여 년 뒤, 고구려도 같은 상황을 맞고 있었다.
“소수림왕이 즉위한 지 2년 되는 임신년(372)은 곧 동진(東晉)의 함안(咸安) 2년으로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한 해이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경전을 보내왔다. 또 4년 갑술년(374)에 아도(阿道)가 진(晉)나라에서 왔다. 다음 해 을해년(375) 2월에 성문사(省門寺)를 짓고 그곳에 순도가 있게 하였으며,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짓고 그곳에 아도가 있게 하였다.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교가 비롯된 바이다.”
먼저 [삼국사기]가 쓰고 [삼국유사]가 그대로 인용한 고구려의 불교 전래 사실이다. 불교의 전래가 왜 하필 소수림왕 때인가. 우리는 그 답을 로마의 기독교 공인과 비교하며 생각해 볼 수 있다.
불교의 정치적인 효용에 눈을 떠,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해
이 시기의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이다. 위(魏) 나라를 이어 진(晉) 나라가 중국의 정통왕조를 이었으나, 북방 오랑캐에게 쫓겨 동쪽으로 달아나 동진이라 이름 하고 있을 때, 장안(長安)은 전진의 부견이 차지하여 도읍을 삼고 있었다. [삼국사기]가 거추장스럽게도 동진의 연호를 가지고 연대를 나타낸 것은 사대주의의 한 표현이지만, 중원의 실질적인 주인은 전진이었다. 바로 그 나라에서 불교가 전래된다.
그런데 이것은 전래일까. 혹 소수림왕이 먼저 손을 내밀어 적극적으로 초빙한 것은 아닐까. 고구려는 실질적인 중국의 패자인 전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앞의 왕 때에 고구려를 괴롭히던 전연(前燕)은 전진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드디어 370년 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전연의 태부 모용평(慕容評)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시켰다.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위한 조치였다. 소수림도 아버지의 이러한 정책을 충실히 지키며, 남쪽으로 백제를 경계하고 있었다.
사실 이 무렵 중국의 불교는 도약의 시기였다. “혼돈된 사회상은 불교로부터 해답을 요구함으로써 영혼불멸설∙인과응보설∙전세윤회설 등 정신적 해탈을 추구하게 하는 불교 교의가 발달”(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하여 있었다. 이렇게 발달한 불교를 고구려는 중국과 가장 가까이 있다는 장점을 살려 왕이 전도승을 맞이해 사원을 세우고 승려와 신자들을 키웠다. 이 점이 중국 쪽에서 전파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보는 근거이다. 그것은 불교의 교리를 원용하여 만드는 왕의 불교적 권위였다.
국가의 공인 이전에 민중 사이에서는 이미 불교가 전파되어 있어
그러나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이때에, 고구려가 비로소 불교를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문명교류사 입장에서 종교의 전파는 초전(初傳)과 공전(公傳)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초전은 민중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수수되는 전파이다. 종교적 사명을 띤 전도자들의 비공식적인 전도는 상당 시간 앞서 진행된다. 이에 따라 저변에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때, 그리고 정치적인 입장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국가는 공인이라는 절차를 마련한다. 고구려에도 꽤 이른 시기에 불교가 전파되어 있었음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일연은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이라는 책에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곁에 탑이 있다”라고 쓴 다음, 노인들이 말하는 신이한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둘러보려 이 성에 이르렀소. 다섯 색깔의 구름이 땅을 덮고 있는 것을 보고, 가서 구름을 헤치며 찾자, 한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지. 가까이 가면 곧 사라지고, 멀리서 다시 나타나는 것이 보였소. 그 곁에 흙으로 된 3층 탑이 있었다오. 위는 솥을 덮은 것 같았으나 무엇인지 잘 몰랐소. 다시 가서 승려를 찾았지만 오직 마른 풀만 남았고, 한 길쯤 파보니 지팡이와 신발이 나왔지. 다시 파서 산스크리트어로 쓰여 새긴 글도 발견했고. 왕을 모시던 신하가 알아보고 말했소. ‘이것은 부처님의 탑입니다.’ 왕이 자세히 말하라고 재촉했소. ‘한(漢) 나라 때 있었습니다. 저 이름은 포도왕(蒲圖王)입니다.’ 왕은 부처님을 믿게 되어 7층 목탑을 세웠지. 뒷날 불법이 시작될 때에 이런저런 사정을 모두 알게 되었소.”
일연은 여기서 고구려 성왕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포도왕은 물론 부처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탑은 아소카왕이 온 세계에 불교를 전하려 세운 석주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법령의 3박자 정책으로 나라의 근간을 다져
소수림왕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절을 짓고 승려를 받아들였으나, 자신의 순수한 불심에 따라 행한 일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고구려의 불교 공인은 정치적인 목적의식이 더 뚜렷해 보인다. 불교 공인과 함께 태학을 설립한 것은 하나의 방증이 된다. 태학은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한 인재를 키워,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배출할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불교와 유교를 동시에 받아들인 셈이다.
바로 다음 해인 373년,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국가통치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규범들을 갖춘 것은 소수림이 펼친 정책 개발의 완성이었다. 율(律)은 형법법전, 영(令)은 비형벌적 민정법전으로 중국에서 성립된 성문법이라 알려져 있다. 불교∙유교∙법령의 3박자 정책은 이렇듯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소수림왕이 북쪽의 전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문명을 받아들인 다음, 백제의 예봉(銳鋒)을 꺾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불과 30여 년이 지나지 않아 결실을 맺었다. 13년간의 본인, 7년간의 동생을 거쳐, 한 사람의 조카이자 한 사람의 아들인 광개토왕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소수림왕 없는 광개토왕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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