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찬 어린 왕자
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무휼이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며 당찬 기상을 갖고 있었다. 서기 9년 부여의 사신이 고구려에 왔다. 부여 사신은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이를 거절하면 고구려가 멸망당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유리명왕과 대신들은 부여의 힘에 눌려 이 요구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런데 어린 무휼 왕자가 이 소식을 듣고 조정에 나가 부여가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부여를 섬기지만, 협박을 한다면 섬길 수 없다면서 부여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4년 후, 부여가 고구려를 공격해오자, 무휼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학반령에서 매복작전을 펼쳐 부여군을 격퇴했다. 그 공으로 무휼은 다음해에 태자로 책봉되고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그가 11세에 태자가 되고, 15세인 서기 18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하였지만, 그의 나이는 다소 착오가 있는 듯하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3년 후, 부여 대소왕은 고구려를 협박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왔다. 부여 사신은 붉은 색 까마귀를 고구려에 주었는데, 머리는 하나고 몸은 둘인 새였다. 부여가 고구려에 까마귀를 선물한 것은 이것이 장차 부여가 고구려를 합병할 징조이니 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는 의미로 준 것이었다. 하지만, 총명한 대무신왕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부여 사신에게 대답했다.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하여 남방의 색인 붉은 색이 되고, 또 붉은 새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부여에서 얻어 우리에게 보내니 두 나라의 운명이 장차 어떻게 될지는 그대도 알 것이다.”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고, 부여를 상징하는 검은 색 까마귀가 고구려를 상징하는 붉은 까마귀가 되었다는 것이니, 이는 장차 부여 땅에 고구려의 깃발이 휘날림을 의미한다고 대무신왕이 해석한 것이다. 사신을 통해 그의 말을 전해들은 대소왕은 크게 놀라며 후회를 했다. 고구려의 사기를 꺾으려다가 오히려 반대가 되었으니, 대무신왕의 총명함에 대소왕의 콧대가 꺾인 셈이었다.
부여 정벌에 나선 대무신왕
대무신왕 4년 12월. 고구려 역사상 처음으로 대무신왕은 군사를 내어 부여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부여는 1회에 5만 대군을 동원할 정도로 강대한 국가였다.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대무신왕은 주변 세력들을 설득해가며 부대를 진군시켰다. 고구려군은 비류수 강변에서 솥을 생산하는 부정(負鼎)씨 집단을 만났다. 이들을 만나 고구려군은 군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장장이 집단 또는 비류수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판단된다. 얼마 후 고구려군은 이물숲에서 금으로 만든 임금의 도장과 각종 무기 등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역시 이물숲 지역 장인집단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를 공격하는 길에 대무신왕이 얻은 가장 큰 보물은 솥이나 금도장, 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흰 얼굴에 눈에 광채가 빛나는 거인인 괴유와 창을 잘 쓰는 마로란 사람을 얻은 것이었다. 여러 세력을 규합한 대무신왕은 다음해(서기 22년) 2월 부여국 남쪽에 도착할 수 있다.
부여 대소왕을 죽였으나
부여의 남쪽에는 진흙수렁이 많았다. 대무신왕은 평지를 골라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했다. 부여군이 기습해오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만주 일대 최강국인 부여는 결코 얕잡아 볼 나라가 아니었다. 부여의 대소왕은 고구려군이 경계를 하지 않고 쉴 때를 기회로 여겨 기병대를 주축으로 습격을 해왔다. 돌연 나타난 부여군의 기습은 고구려군을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부여의 군대도 너무 성급히 공격하느라고 진흙수렁에 빠져 앞뒤로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였다.
대무신왕은 괴유를 시켜 대소왕을 향해 공격하게 했다. 괴유는 칼을 빼어 고함을 지르며 돌격하였다. 부여 군사들은 이리저리 밀려 쓰러지며 괴유를 막지 못했다. 괴유는 곧장 대소왕에게 달려들어 순식간에 대소왕의 머리를 베어 버렸다. 전투에서 지휘관이 죽으면, 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후퇴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부여군은 왕이 죽었다고 해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부여의 여러 왕자들과 부족장들의 지휘 하에 힘을 내어 고구려 군을 겹겹으로 둘러쌓아 버렸다. 사방이 포위된 고구려 군은 식량마저 다 떨어져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드넓은 평원에서 포위되었으니 도망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대무신왕은 하늘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올렸다. 기도 탓인지 고구려 군에게 행운이 다가왔다. 홀연히 큰 안개가 끼어 7일 동안이나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대무신왕은 사람들을 시켜 짚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손에다 무기를 쥐게 하고, 고구려군 진영 곳곳에 세워 놓았다. 허수아비로 적을 속이고, 군사들과 함께 몰래 밤에 탈출을 했다. 급히 도망치느라 식량과 군수물자 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돌아올 때 군사들은 너무나 배고파 사냥을 해서야 겨우 굶주림을 면할 정도로 비참한 모습이었다. 처참한 패배였다.
하심(下心)의 정치학
대무신왕은 돌아와서 잔치를 베풀며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내가 못나서 부여를 얕잡아 보고 섣불리 공격하여 비록 그 왕을 죽였지만, 우리의 피해가 너무나 컸고, 부여를 멸망시키지도 못했다. 나의 잘못이다. 이번 전쟁에서 죽은 자들을 위해 함께 명복을 빌 것이며, 병들고 다친 자들을 위로하겠노라.”
대무신왕은 이번 원정이 실패였다고 반성했다. 왕이 이렇게 겸손하게 반성하자, 고구려의 유력한 귀족들 역시 대무신왕을 중심으로 다시 뭉치기로 결의를 했다. 만약 패전한 고구려가 내분까지 한다면 부여국에게 침략의 빌미를 주어 나라가 망할 수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대무신왕은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부여 원정의 실패를 계기로 오히려 내부의 단결력을 높일 수 있었다.
부여의 내분과 고구려의 성장
전쟁에서 패배한 고구려가 더욱 단합하여 앞으로 발전을 기대한 반면, 고구려를 물리친 부여는 내분이 일어났다. 대소왕의 뒤를 이어 누가 왕이 되느냐는 문제로 여러 왕자들은 서로 싸움을 했다. 전쟁에서 승리가 도리어 화를 부른 셈이었다. 고구려가 물리친 지 불과 2달 만에 왕위 계승 경쟁에서 패한 대소왕의 아우가 부여를 탈출하여 갈사국을 세웠다. 이 나라는 46년이 지난 후 고구려에 항복하게 된다.
갈사국의 건국은 부여국의 분열을 알려주는 신호에 불과했다. 그해 7월 대소왕의 사촌 동생이 부여가 분열되어 곧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백성 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대무신왕은 그에게 낙씨성을 주고, 왕이라 부르게 하고 연나부에서 살게 했다. 낙씨왕은 대무신왕의 명을 받는 제후였던 셈이다. 낙씨왕이 고구려에 항복한 사실은 고구려와 부여 두 나라의 국력의 역전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무신왕은 국력을 다진 후, 서기 26년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주변의 개마국을 정복하고 그 왕을 죽였다. 하지만 대무신왕은 그 백성들을 위로해주고, 약탈을 하지 않고 군현으로 삼아 버렸다. 주변 나라들에게 고구려가 잔인한 정복자가 아니라, 발전하는 나라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개마국 옆에 있던 구다국은 고구려와 맞서 싸울 자신이 없자 스스로 항복해왔다. 정벌하되 약탈하지 않는 정책은 고구려가 주변의 작은 소국들을 통합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무신왕은 점점 고구려 영토를 확대할 수 있었다.
부드러운 것이 승리한다
대무신왕은 부여와의 전쟁에서의 교훈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서기 28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대무신왕은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智)의 계략을 받아들여 먼저 나가 싸우기 보다는 적이 지치기를 기다리는 작전을 펼쳤다. 천혜의 요새인 위나암성에 들어가 수십일 동안 방어를 했다. 한나라 군대는 포위를 풀지 않았다. 그러자 을두지가 성안 연못에서 잡힌 생선을 수초로 싸서 술과 함께 적진으로 들어가 적장을 대접했다. 한나라 장군은 고구려의 성안에 물이 풍부하니 쉽게 이길 수 없음을 알고 퇴각하고 말았다. 대무신왕은 무리하게 전쟁을 하지 않고 강적을 물러나게 했다.
서기 37년 대무신왕은 강국 낙랑국을 멸망시켰다. 낙랑국을 쉽게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들 호동의 역할이 컸다. 호동 왕자는 5년 전 낙랑국을 방문했다. 그는 낙랑왕 최리의 신임을 얻어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그런데 호동은 최리의 딸을 시켜 낙랑의 보물인 자명고(自鳴鼓-적군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북)를 부수게 시켰다.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의 비극’이 이때 일어난 것이다. 호동은 왕자였지만, 첩자 역할을 한 셈이었다. 대무신왕은 자명고가 부서졌다는 보고를 받자, 곧 낙랑을 공격했다. 낙랑국은 자명고를 믿고 방어를 하지 않고 있었다. 대무신왕의 기습작전은 성공하여, 최리왕의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5년 후에는 낙랑국을 완전히 멸망시킬 수가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의 강직함과 불같은 승부욕을 가졌었다. 하지만 부여와 전쟁에서 패배를 계기로 지략가로 변신을 했다. 스스로를 낮추고, 남을 무조건 억압하지 않으며, 무리한 전쟁을 피하고, 승리할 수 있는 전쟁만을 했다. 그는 노련한 임금으로 변신을 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고구려인이 오래 기억한 임금
그는 용맹한 장수 괴유, 뛰어난 지략가인 을두지, 비류부의 혼란을 잘 다스린 추발소 등 현명한 신하를 기용해 정치를 잘 하기는 했지만, 불운도 있었다. 그는 어려서 자신의 형인 도절이 일찍 죽고, 동생 여진이 물에 빠져 죽은 모습을 보았다. 무엇보다 형 해명이 아버지 유리명왕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자결 명령을 받고 죽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대무신왕 역시 이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자신의 둘째 부인에게 낳은 아들 호동을 첫째 부인의 모함을 듣고 그만 의심을 해 버린 것이었다. 호동은 스스로 변명하지 않고 자결을 해버렸다.
불행한 역사의 반복은 아직 왕실의 권위가 크지 않은 상태에서 왕비를 배출한 세력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신하들의 권력 다툼을 왕이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부여된 대무신이란 호칭은 그의 개인적인 행복과는 전혀 무관하다. 하지만 그는 추모왕이 건국하고, 유리명왕이 다져놓은 고구려가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을 만든 임금으로, 고구려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된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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