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손권 등이 활약한 중국의 삼국시대는 소설 [삼국지연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우리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위나라, 오나라와 교류도 하고, 전쟁도 했던 고구려 동천왕(209~248)은 백성들이 사랑한 임금으로 그에게는 조자룡, 관우에 비견할 만한 충신들이 있었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
돼지가 맺어준 인연으로 탄생한 임금
고구려 10대 산상왕은 아들이 없어 늘 고민이었다. 하지만 산상왕은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만든 우씨왕후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여인을 후궁으로 삼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사용할 돼지가 우리를 탈출해 달아나는 일이 생겼다. 관리가 돼지를 쫓았지만,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주통촌, 즉 술을 빚는 마을에서 20세쯤 된 곱고 어여쁜 여자가 돼지를 잡아 주었다. 관리가 돌아와 산상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산상왕은 주통촌 여인이 궁금하여 밤에 몰래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는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마을에 점을 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겠다고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낳자 후녀 즉 왕후가 될 여자라고 이름 지었다. 왕은 후녀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었다. 그런데 4개월 후 우씨왕후가 산상왕이 후녀와 몰래 만난 것을 알게 되고 말았다. 우씨왕후는 질투에 눈이 멀어 군사들을 보내어 후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군사들이 후녀를 죽이려고 포위를 하자, 후녀가 당당히 말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죽이려는 것은 대왕의 명령이더냐, 아니면 왕후의 명령이더냐. 지금 내 뱃속에는 아이가 들어 있으니 이는 대왕께서 남기신 것이다. 내 몸을 죽이는 것은 허락하지만, 왕자까지 죽일 셈이냐.”
관리들도 못 잡았던 돼지를 잡을 만큼 씩씩한 그녀의 단호한 말에 군사들은 감히 그녀를 해칠 수가 없었다. 우씨왕후는 매우 화가 났지만, 아이까지 임신한 그녀를 죽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후녀가 임신한 사실을 안 산상왕은 우씨왕후에게 말하여, 그녀를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후녀는 마침내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은 제사에 쓸 돼지로 인해 후녀와 만나 아이를 얻게 되었으므로, 아이 이름을 제사에 쓸 돼지라는 뜻을 가진 교체(郊彘)라 하고, 교체가 5살이 되자 태자로 삼았다. 산상왕이 죽게 되자, 227년 교체가 왕이 되니 곧 동천왕이다.
어진 성품을 가진 임금
동천왕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우씨태후(왕의 어머니를 태후라고 함)가 동천왕이 타던 말의 말갈기를 잘라버리거나, 시녀를 시켜 식사를 할 때 국을 그의 옷에 엎지르게도 하는 등 심술을 부렸지만, 동천왕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성품만 인자했던 것이 아니라, 힘이 세고 용감했으며, 사냥과 활쏘기도 잘했다. 그의 용맹함은 이웃 나라에게도 알려질 정도였다.
고구려와 오나라의 만남
동천왕이 재위하던 시기는 중원 땅에서 위, 촉, 오의 삼국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나라와 고구려 사이 요동지역에 서기 190년경부터 238년까지 공손씨 세력이 반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위나라와 경쟁하던 오나라에서 공손씨에게 사신을 파견해 서로 협력하자고 제의를 했다. 공손씨가 이를 수락하자, 233년 오나라는 진기한 보물을 보냈다. 그런데 공손씨가 태도를 바꿔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국경을 접하고 있던 위나라에게 보냈다. 이때 간신히 살아남은 오나라 사신들이 도망치다가, 고구려에 도착했다.
동천왕은 처음 만난 그들을 환영하고, 잘 접대를 해주었다. 게다가 오나라 사신들을 호위할 조의 25명과 담비가죽 1,000장, 갈계피(鶡雞皮) 10벌 선물을 갖추어 고구려 배에 태워 황해를 건너 양자강 유역에 있는 오나라로 돌려보냈다. 동천왕이 오나라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은 적국인 공손씨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오나라 손권은 정식으로 사신을 보내 동천왕에게 각종 진귀한 보물과 옷을 바치고자 했다. 그런데 고구려에 마침 위나라 사신이 왔다. 그러자 오나라 사신은 동천왕을 뵈러 가지 않고 압록강 하구에서 머물렀다. 동천왕이 급히 신하들을 보내 오나라 사신을 맞이하게 했다. 그러자 오나라 사신 일행은 동천왕이 보낸 30명을 인질로 잡고 위나라와 사신왕래를 한 것에 대해 따졌다. 동천왕이 미안하다며 말 수백 필을 선물로 보내 달래자, 그들도 인질을 풀고 이어서 진기한 보물을 동천왕에게 바쳤다.
동천왕은 오나라에게 화가 났다. 오나라의 경쟁자인 위나라와 사신왕래를 한 것이 오나라에게는 기분이 상하는 일이었겠지만, 고구려가 여러 나라와 사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를 핑계로 고구려에서 보낸 신하들을 인질로 잡고 따진 오나라의 행동은 무례한 것이었다. 236년 오나라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고자 했다. 그러자 동천왕은 오나라 사신들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선물로 보내주었다. 동천왕은 단호하게 오나라와 절교를 선언했다. 오나라는 감히 고구려에 항의할 수가 없었다. 동천왕이 오나라를 버리고 위나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한 것은 단지 오나라 사신의 무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천왕은 바로 이웃한 공손씨를 무너뜨리고, 요동 땅을 차지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단순한 분노 때문이 아니라, 오나라보다 위나라와 협력하는 것이 더욱 이익을 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이다.
위나라와 전쟁
238년 위나라는 4만 군대를 동원해 공손씨를 공격했다. 동천왕은 1천 군대를 보내 위나라를 도와 공손씨의 배후를 공격했다. 고구려군의 숫자는 적었지만, 공손씨를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런데 4년 후, 동천왕은 장수를 보내 위나라를 공격했다. 그것도 요충지인 서안평을 공격했다. 고구려가 공격한 원인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위나라가 공손씨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에게 어떤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해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탓일 것이다. 동천왕은 당시 위나라가 촉, 오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반격해오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공격을 한 것이다.
하지만 위나라는 강국이었다. 촉, 오와의 경쟁에서 이미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던 만큼, 고구려를 공격할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선비족, 부여국의 도움도 받으면서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244년 위나라 관구검이 이끈 대군을 상대로 동천왕은 직접 2만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섰다. 첫 전투에서 적 3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고, 양맥 계곡까지 추격해 또 승리를 거두어 적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포로로 잡았다.
교만이 낳은 불행
거듭 승리를 거두자, 동천왕은 너무도 자신만만해졌다.
“위나라가 큰 나라라고 자랑하더니, 그 많은 군대를 이끌고도 우리의 적은 군사보다 못하구나. 관구검이 명장이라고 하더니, 오늘 그의 목숨이 내 손바닥 안에 있구나!”
하지만 자만심으로 적을 얕보게 되면 그것은 늘 위험에 처하게 된다. 동천왕이 5천 철갑기병대를 직접 이끌고 적을 공격했다. 그런데 위나라가 갑자기 방진(方陣,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는 진영)을 펼치며 반격해 오자 고구려군은 크게 패하여 1만 8천 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동천왕은 1천 기병과 함께 도망을 쳐야 했다. 교만이 낳은 실수치고는 대가가 혹독했다.
위나라군은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으로 쳐들어와 마음껏 약탈했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부하인 왕기를 시켜 동천왕을 추격했다. 동천왕이 죽령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는 고구려 군사들이 다 흩어진 상태였다. 동천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신하인 밀우가 자신이 결사대로 적을 막을 터이니 피신하라고 청했다. 밀우가 결사대를 모집해 적군에게 달려가 힘써 싸우는 동안, 동천왕은 샛길로 도망쳤다. 위험에서 빠져나오자 동천왕은 밀우 생각이 났다. 왕은 신하들에게 밀우를 구해올 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때 유옥구란 자가 나서 전쟁터로 달려가 적을 물리치며 너무나 지쳐 땅에 쓰러진 밀우를 발견했다. 유옥구는 밀우를 업고 돌아왔다. 동천왕은 밀우를 자신의 무릎 위에 뉘었다. 얼마 후 밀우가 깨어났다. 옆에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왕이 신하를 아끼는 모습을 보고 힘을 냈다.
동천왕은 적군의 추격에서 벗어나고자 남옥저 땅까지 도망을 갔다. 하지만 적군은 여전히 동천왕을 추적했다. 동천왕은 이제 정말 앞이 깜깜했다. 이때 유유란 자가 나섰다. 유유는 음식을 가지고 위나라 진영에 가서, 고구려왕이 항복하려 한다고 알렸다. 위나라 장군은 자신이 고구려왕을 사로잡는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고 흥분하는 바람에 아무런 의심 없이 유유가 준 음식을 받아먹으려고 했다. 이때 유유가 식기 속에 감추어 있던 칼을 빼어 위나라 장군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부대를 이끄는 장군이 죽자 위나라 군대는 크게 혼란에 빠졌다. 이를 놓치지 않고 동천왕은 그간 모은 군사로 급히 공격하니 위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동천왕이 싸움에 이겼다는 소식이 들리자, 각지에서 고구려 사람들이 힘을 모았고, 위나라 군대는 서둘러 퇴각을 하게 되었다. 동천왕은 드디어 적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다.
백성들이 사랑한 동천왕
동천왕은 위나라 군대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운 밀우, 유옥구, 유유에게 큰 상을 내렸다. 동천왕은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곤란을 겪었기에 요동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천왕은 위나라를 물리친 후 245년에는 지금의 강원도 지역을 지나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에서는 병마사 석우로가 나가서 대항했지만,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2년 후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와 두 나라는 화친을 맺게 되었다. 동천왕 시기 고구려가 위축된 것만은 아니었다.
동천왕이 위기를 극복한 후 248년 죽자,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그를 가까이 모신 신하들 가운데는 왕과 함께 죽는 순장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천왕의 아들인 중천왕이 산 사람이 죽는 것을 금지했지만, 장례일이 되자 동천왕의 무덤에는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죽은 후의 세계가 현실세계의 연장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순장을 하게 되면 저승에서도 왕 곁에서 보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순장이 금지되었지만, 동천왕의 무덤에서 죽겠다는 자들을 모두 말릴 수가 없었다. 비록 한때 교만하여 나라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동천왕은 신하들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좋은 임금이었다.
글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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