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Ⅳ. 韓國獨立軍과 吉林自衛軍·中國國民救國軍의 연합 항일" 중 "2. 한국독립군과 길림자위군의 연합작전"만 가져왔습니다
2. 한국독립군과 길림자위군의 연합작전
한국사총설DB > 국사관논총 > 國史館論叢 第44輯 9·18事變後 東北義勇軍과 韓國獨立軍의 聯合抗日述略 > [국문] 9·18事變後 東北義勇軍과 韓國獨立軍의 聯合抗日述略 > Ⅳ. 韓國獨立軍과 吉林自衛軍·中國國民救國軍의 연합 항일
1932년 1월, 일본군은 치치하얼/치치할(齐齐哈尔/齊齊哈爾/제제합이)과 진저우/금주(锦州/錦州)를 침점(侵佔)하고 또 대규모 병력을 집중하여 북만(北滿)의 중요도시 하얼빈/할빈(哈尔滨/哈爾濱/합이빈)을 침공하였다. 일본관동군은 위선즈/우심징(于深徵)註 059 부대를 선두로 비행기와 대포, 장갑차의 배합하에 할빈을 대거 침공하였다. 1월 26일 길림성 및 할빈동성(东省/東省)특별행정구 경내의 항일군 리두(李杜), 딩차오/정초(丁超), 펑잔하이/풍점해, 싱잔칭/형점청(邢占淸), 자오이/조의(赵毅/趙毅) 등 부대 주력군은 일제히 할빈에 집결하여 명성이 떨친 할빈보위전(保衛戰)을 벌였다. 전투는 1월 27일 이른 새벽에 시작되어 28일 오후에 위선즈(于深澂)의 위군(僞軍)을 물리쳐 부득불 아청/아성현 이남지구로 몰아냈다. 동월(同月) 31일, 제1차 할빈보위전에 참가한 항일군 각 부대의 장령들은 리두/이두, 딩차오/정초의 주최하에 군사회의를 거행하고 정식으로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을 성립하였으며 리두/이두를 자위군 총사령으로, 펑잔하이/풍점해를 부사령으로 추천하였다. 그리고 왕즈요/왕지우(王之佑)(자/字 리산/립삼/立三)를 전위 총지휘로, 딩차오/정초註 060를 호로군(護路軍) 총사령으로 위임하였다. 동시에 길림자위군과 호로군(護路軍) 연합사령부를 성립하기로 결정하고 리두/이두와 딩차오/정초가 함께 병권을 장악하였다. 회의 후 리두/이두는 자위군 총사령의 명의로 길림자위군성립선언을 발표하였다.
* 침점(侵佔) : 침노하여 빼앗아 차지함
* 위군(僞軍) : 괴뢰군
1932년 2월 2일, 일본군 다몬(多門/다문)사단의 2개여단, 보병 5개대대, 기병 1개중대, 야포병 3개중대, 그리고 비행기와 장갑차 및 위선즈(于深澂)부의 괴뢰군의 배합하에 두갈래로 나누어 할빈을 향해 침공하였다. 이외 치치할에 주둔한 일본군 스즈키 요시유키(鈴木美通/령목미통) 부대의 제4여단도 명령을 받고 합만철(哈滿鐵)로선을 따라 할빈을 침공하여 할빈은 3면 공격을 받게 되어 아주 위급하게 되었다. 동월 3일, 길림자위군 각부는 적들과 맞서 제2차 할빈보위전을 벌였다. 2주야의 혈전끝에 끝내는 실패하여 이두는 팡정/방정(方正)으로, 딩차오/정초와 싱잔칭/형점청 등은 통화로, 자오이/조의와 왕즈요/왕지우는 주허/주하(珠河)(오늘의 상지)·옌쇼/연수(延寿/延壽)지방으로 철거하였다. 펑장하이/풍점해는 철퇴 가운데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바옌/파언(巴彥)으로 철거하였다가 후에 펑정/방정으로 옮겼다. 2월 5일 할빈이 함락되었으며, 6일 빈현도 빼앗겼다. 청윈/성윤은 펑잔하이/풍점해 부대를 따라 바옌/파언(巴彥)으로 철거하였다가 후에 이란/의란(依兰/依蘭)으로 갔다.
* 철퇴 : 거두어 가지고 물러남
* 배합 : 협동
두차례의 할빈보위전에서 각 대대가 채 집중하지 못한 한국독립군은 이청천이 사령부의 부분 관병을 거느리고 펑잔하이/풍점해 부대를 따라 행동하였다. 무기가 부족한 탓으로 많은 관병들은 빈손이었다. 빈주가 일본인들에 의해 강점당한 후 이청천 등은 옌쇼/연수로 철거하여 그곳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다음의 행동을 상의하였다. 회의에서는 이청천이 사령부의 관병 일부분을 거느리고 계속 펑잔하이/풍점해를 따라 북쪽으로 철거함으로써 펑잔하이/풍점해 부대와의 양호한 합작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외 참모 이우정이 일부분 한국독립군을 거느리고 중동로를 접근하여 방법을 내어 로야령동쪽의 한국독립군과 연락을 취하도록 하였다. 이 두 부분의 한국독립군은 모두 청장년을 보충하고 대오를 확대해야 하였다. 그들은 중국방면에 무기를 보충해줄 것을 청구하였다. 당시 연수 경내에 새로 개편한 길림자위군의 한개 독립단이 있었는데 단장은 考鳳林으로 綠林출신이며 字는 ‘愛國’註 061으로 하고 퍽 애국열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독립군이 같이 항일할 것을 퍽 환영하는 태도인데 연수의 정황에 익숙한 이우정은 고봉림과 합작 항일의 관계를 맺었다.
* 중동로 = 중동선(中東線) = 중국동방철도 = 동청철도 = 북만주지역 만주횡단철도
동월 중순, 자위군 각 부대의 장령들은 옌쇼/연수전적(前敵) 총지휘부에서 군사회의를 열었다. 당시 원 길림군 27여 676단 3영 영장(營長) 왕더린/왕덕림(王德林)이 옌지/연길 샤오청즈/소성자에서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선포하였는데 불과 수일이 지나 그의 대오가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한때 둔화/돈화(敦化), 자오허/교하(蛟河), 어무/액목(额穆/額穆) 등지를 탈환하여 일본군과 위군(僞軍)을 놀라게 하였다. 길림자위군 장병들은 여기서 큰 고무를 받았다. 이에 비추어 회의에서 펑잔하이/풍점해(冯占海/馮占海)는 적들이 할빈에 갓 발을 붙이고 교만하고 태공하는 기회를 빌어 먼저 아청/아성(阿城)을 들이친 다음에 할빈을 공격함으로써 아군의 위풍을 다시 떨칠 것을 제의하였다. 의론 끝에 펑잔하이/풍점해의 부대를 기초로 그외 다른 부대에서 얼마간의 병력을 뽑아내어 선견군(先遣軍)을 조직하여 아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때 카오펑린/고봉림(考凤林/考鳳林)의 단(團)은 이미 펑잔하이/풍점해의 부대 제5여(여장/旅長은 양웬린/양문린/杨文麟/楊文麟, 자/字는 즈빈/质斌/質斌/질빈)에 편입되어 5여의 제10단으로 되었으며 단장은 여전히 카오펑린/고봉림이 담임하였다. 이우정의 한국독립군도 계속 카오펑린/고봉림의 단과 같이 행동하게 되었다. 펑잔하이/풍점해는 대오를 거느리고 파죽지세로 진공을 들이대여 며칠만에 중동로 할수선(哈綏綫/합수선)의 중요한 곳인 이몐포/일면파(一面坡)를 탈환하였다. 아청/아성을 진공하는데 선봉이었던 양웬린/양문린여(旅)는 수차 공을 세웠으며 그 중 한국독립군 전사 안해천(安海天)의 용맹한 사적은 더욱 중국항일동지들의 찬양을 받았다.註 062
* 전적(前敵) : 전방, 선봉, 전선
* 태공 : 태업하다
* 진공 : 적을 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감
2월 28일, 길림자위군전위 총지휘는 적의 두목인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토비원현이)와 의화(議化)하여 소위 ‘정화협의(停火恊議)’를 달성하여 지휘부는 부대가 철로연선을 철수할 것을 명령하니 적들이 기회를 빌어 거침없이 쳐들어와 자위군은 엄중한 실패를 당하였다. 3월 8일, 옌쇼/연수가 함락되었으며 적들은 펑잔하이/풍점해부대의 퇴로를 끊어 놓았다. 펑잔하이/풍점해의 부대는 부득불 아청/아성을 진공하는 전투를 정지하고 팡정/방정으로 갔다. 통즈고우/통자구(筒子沟/筒子溝)전투에서 위군(僞軍) 리웬빙/이문병(李文炳)부대에 큰 살상을 주었다. 옹건 3개월 동안 기본상 매일 전투를 벌렸는데 한국독립군 이우정부대는 계속 카오펑린/고봉림부대를 따라 행동하고 4월초에 팡정/방정일대에 도착하여 정돈 휴식하였다.
* 의화(議化) : 협상
* 정화(停火) : 휴전, 정전
* 옹건 ?
그해 4월 하순, 이우정은 팡정/방정에서 총사령 이청천의 편지를 받았다. 원래 2월달에 이청천은 펑잔하이/풍점해의 부대를 따라 북으로 철거하여 바옌(巴彥)을 거쳐 둥싱/동흥(东兴/東興), 칭청/경성(庆城/慶城)일대에 도착하여 항일무장을 확대하였는데 한국독립군 총사령부를 둥싱/동흥에 두었다. 얼마후 펑잔하이/풍점해의 부대가 하동/합동(哈东/哈東)에 돌아왔으나 이청천은 의연히 둥싱/동흥에 남았다. 3월에 펑잔하이/풍점해가 아청/아성을 진공할 때 한국독립군 각 부대는 중동로 할수선에 집중하였었는데 총사령인 이청천이 멀리 흑룡강성에 있다보니 임시로 군사회의를 열고 군사경험이 있는 김창환(金昌煥)이 총사령을 대리하고 이우정이 참모장을 대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번에 이청천은 편지에서 이우정에게 속히 베이핑/북평, 상해 등지와 연계를 취하여 그들을 통해 난징국민정부(南京國民政府)에 구원을 청해 한국독립군의 무기와 탄약이 부족한 정황을 개변시킬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당시 남경정부는 중국의용군에 대해서도 제한하고 해제하는 정책을 취하였는데 하물며 한국독립군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우정은 물론 이 지시를 집행할 방법이 없었다. 바로 이때 정돈휴식한 길림자위군이 할빈을 반공하는 전역을 발동하였다.
* 개변 : 상태, 제도, 시설 따위를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발전적인 방향으로 고침
* 반공하다 : 공격을 받다가 반대로 공세를 취하다
이번 할빈을 반공하는 전역에 3로(路) 대군이 참전하였다. 우로(右路)는 펑잔하이(馮占海)가 총지휘를 담임하였고, 공장하이/궁장해(宫长海/宮長海)가 부지휘로 되어 부대를 거느리고 팡정/방정의 통허바/통하파(桶河垻), 휘파헝/회발항(会发恒/會發恒), 까오리마오즈/고려모자(高丽帽子/高麗帽子)(오늘의 성리전/승리진(胜利镇/勝利鎭) 등지를 거쳐 빈주를 공격하였다. 중로(中路)는 양야오쥔/양요균(杨耀钧/楊耀鈞)이 총지휘를 담임하고 싱잔칭/형점청(邢占淸), 첸둥샨/진동산(陈东山/陳東山)이 부총지휘로 되어 이란/의란에서 출발하여 팡정/방정, 쟈신/협신(夹信/夾信), 옌쇼/연수, 주허/주하를 거쳐 하동(哈东/哈東/합동)으로 진격하였다. 좌로(左路)는 마셴장/마헌장(马宪章/馬憲章)을 총지휘로 하여 마챠허/마교하(马桥河/馬橋河)에서 출발하여 하이린/해림(海林), 이몐포/일면파의 적을 소탕하며 할수선을 따라 아청/아성방향으로 전진하기로 되었다. 삼로(三路) 대군이 예정지점에 도착한 후 다시 할빈을 포위 공격하기로 하였다. 펑잔하이/풍점해의 부대는 출발후 선후로 팡정/방정, 휘파헝/회발항을 들이친 후 5월 2일 빈저우/빈주진(宾州镇/賓州鎭)을 탈취하여 할빈교구를 접근하였다. 이와 동시에 양야오쥔/양요균의 부대도 옌쇼/연수, 주허/주하 등지를 점령하였으며 좌로군의 선봉인 류완퀘이/유만괴(刘万魁/劉萬魁)의 부대도 이몐포/일면파를 차지하였다. 이우정이 인솔하는 한국독립군은 펑잔하이/풍점해의 부대를 따라 5월초에 하동/합동(哈东/哈東)까지 왔다. 이때 이청천이 오광선 대대장을 파견하여 이우정에게 중동로 할수선으로 접근하라고 지시하였다. 랴오예/로야령(老爷岭/老爺嶺) 동쪽의 한국독립군과 연락을 취하는데 편리하기 위해서였다. 5월 5일, 이우정은 카오펑린/고봉림 여장註 063을 만나 총을 비는 일을 이야기하면서 한국독립군이 명령을 받고 중동로방향으로 이동해야겠다고 알렸다. 카오(考)여장은 한국독립군의 곤란한 처지를 매우 동정하면서 그러나 본여의 병사들도 빈손이 많으므로 방조할 재간이 없다고 했다.註 064 한국독립군은 부득불 계속하여 카오펑린/고봉림의 대오를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방조 : 곁에서 도와줌
5월 15일, 양야오쥔/양요균은 리두/이두의 명령을 받고 원래의 자위군, 구국군, 호로군(護路軍)을 합쳐 중로연합군(中路聯合軍)을 구성하였다. 원 우로군 카오펑린/고봉림의 여를 중로연합군 제3군 제1여로 개편하고 카오펑린/고봉림이 여전히 여장을 담임하였다. 양야오쥔/양요균은 랴오닝/요녕 싱징/흥경사람으로서 원 동북군 가운데서 유지인사였다. 애국적인 한교(韓僑)에 대하여 동정심을 품고 있던 차라 중로연합군이 성립된 후 한국독립군 이우정부대의 장비가 약간의 개선을 가져왔다(3군 참모장 자오린/조린(赵麟/趙麟)은 한차례 한국독립군에 38식 보총 50자루를 발급하였다).註 065 후에 또 이우정을 중로군 제3군 참모로 초빙하여 이우정이 군부작전계획의 제정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잇따라 3군 군부 부관인 리펑린/리봉림(李凤林/李鳳林)이 한국독립군의 上尉副官으로 초빙되어 한국독립군에서 직접 사업하게 되었다. 중한 부대간의 연합은 한걸음 발전하였다. 얼마 후 이청천 총사령이 총부의 관병들을 이끌고 둥싱/동흥에서 중동로로 와서 이우정 등과 회합하여 한국독립군이 3,000여 명으로 되었다. 이 기간에 한국독립군은 펑잔하이/풍점해의 길림자위군과 양야오쥔/양요균의 중로연합군과 배합하여 아래와 같은 전역, 전투를 벌렸다.
① 5월 30일 아침, 길림자위군 양즈빈/양질빈(杨质斌/楊質斌)려와 공장하이/궁장해(宫长海/宮長海)의 기병대(騎兵隊) 등 3,000여 명은 펑잔하이/풍점해의 자위군 총부의 지휘하에 아청/아성현성을 일거 공파하였고 현성을 지키던 위군 제8여 첸더차이/진덕재(陈德才/陳德才)부대의 대부분이 포위되어 무기를 바쳤다. 그 외에 보병 1개 영, 박격포와 기관총 각 1개연이 여장 첸더차이/진덕재를 따라 할빈으로 도망쳤다. 얼마 후에 여러대의 적기가 성안을 연속 투탄 폭격하고 여러 곳에서 불지르고 또한 일군(日軍) 나카무라(中村)여단과 괴뢰군이 점점 반격해오므로, 자위군은 상민(商民)들의 큰 손실을 받는것을 피하기 위해서 성 밖으로 퇴거시켰다. 전투속에서 한군(韓軍) 별동대장 안종선(安鍾宣)註 066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용맹하게 적을 족쳐 칭찬을 받았다. 이번 아청/아성현성을 공격하는 정황을 적방(敵方)의 〈성경시보(盛京時報)〉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있었다.
* 적방(敵方) : 적측, 적편
據在該地之于險舟本日致電政府報告 : 反吉軍楊部 3,000人先於(5月) 28日 夜攻擊阿城 駐城吉軍善戰防禦 比及 29日夜 吉軍子彈全盡 而反吉軍以大炮炸破城角 以破竹之勢侵入城內吉軍第8旅司令部逮捕張參謀長 魏縣長及公安局長等數十人 張參謀長被匪軍切斷兩腿 陷於死境 又城內被匪放火 烈風吹火 勢如炎天 瞬間而延燒大半 其損失頗鉅云註 067
② 6월 22일, 양야오쥔/양요균의 중로연합군 제3군 1부와 한국독립군 이우정(李宇精)부는 연합하여 아청/아성현 용파/영발둔(永发屯/永發屯)에 둥지를 틀고 있는 괴뢰군 위환장/우환장(于煥章)부를 습격하여 적 100여 명을 소멸하고 이 한간(漢奸)무리들을 호되게 징벌하였다. 적기의 폭격으로 하여 제1여 카오펑린/고봉림부는 10명 사망되었고 한군(韓軍)은 손실이 없었다.
* 부(部) : 부대
* 한간(漢奸) : 매국노
③ 8월 12일, 길림자위군 중로총지휘부에서 제3군과 한국독립군 이청천부에게 연합하여 쐉청/쌍성(双城/雙城)을 공격함으로써 펑잔하이/풍점해부의 지린/길림성성(吉林省城)의 포위작전을 지지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에 한군(韓軍)이 쐉청/쌍성을 공격할 때 지나야 할 아청/아성, 쐉청/쌍성의 양현 경내에 괴뢰군 위선즈(于深澂)부와 일본군 1개 연대의 병력을 주둔하고 있는데 방어는 든든하였다. 중한부대는 양현성을 에돌아 200여 리(화리)를 전전하여 동월 14일 밤, 적에 대해서 불의공격을 가하였다. 카오(考)부(部)는 성 동쪽을 공격하고 한군은 이청천의 지휘하에 우익으로부터 성 서쪽을 쳤는데 3시간의 치열한 싸움을 거쳐 성을 탈취하였다. 이번 싸움에서 일본군 20여 명을 소멸하고 괴뢰군反正者 1,200여 명, 박격포 5문, 직사포 3문, 총알 50상자 등 기타 전리품도 있었는데 전군이 몇달동안 넉넉히 쓸 수 있었다.
④ 9월 14일, 중로군 총지휘부의 동의를 거쳐 한국독립군은 중로연합군 제1군과 연합하여 아청/아성 경내에 있는 다스허/대석하(大石河) 일본군 거점을 족치려 하였다. 그런데 아군이 아직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군은 이 일을 알고 동월 15일 먼저 줄행랑을 놓았다. 이청천은 너무 아쉬운 일이라고 한탄하였다.
⑤ 11월 17일, 중로연합군의 각 부와 한국독립군은 연합하여 다시 쐉청바오/쌍성보(双城堡/雙城堡)를 공격하고 러허/열하(熱河)로 통하는 길을 개척하려 했다. 한군 2,000명은 선참에 서서 성을 치는 임무를 맡고 중한연합군은 삼면에서 포위 공격했는데, 두시간 동안 싸움하여 성 안에 들어가 다시 쌍성을 수복시켰다. 동월 20일 일본군은 육군과 공군을 동시에 풀어놓고 또 땅크가 선참에 서서 길을 내고 있었다. 중한연군은 중무기가 없어 막아낼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중국부대는 먼저 철퇴하고 카오펑린/고봉림군장註 068과 1패관병이 뒷수습하는데 괴뢰군 1부에게 포위당하였다. 이때 계속 성안을 지키고 있던 한군이 소식을 듣고 일부 병사들을 파견하여 성 동쪽문 밖에 매복하게 하고 고부를 포위하고 있던 적들을 향해 돌연 습격을 가하였다. 考는 위험에서 벗어나 대오를 거느리고 바쟈즈/팔가자(八家子)부근으로 철거하였다. 21일 적군의 원군이 또 도착하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중한연합군은 우창/오상현(五常县/五常縣) 충허/충하(冲河)부근으로 철퇴하였는데 중로연합군(中路聯合軍)은 절반나마 손실을 보고 한군은 거의 아무런 손실도 없었다.
* 선참 : 남보다 먼저 시작하거나 자리를 잡음.
* 패관병 ?
쌍성전투 후 카오펑린/고봉림부의 사기가 저락되어 절반 이상의 관병들이 흩어지고 도망가고 하였다. 카오펑린/고봉림도 더 싸울 마음이 없어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정설분자(精說分子)가 모두 깊은 산으로 숨어 들어갔고 나머지 무리는 투항(投降)했다. 내년에 풀이 푸르게 되면 다시 모일 것을 기대했다.註 069 우군(友軍)이 흩어지자 충허/충하는 또한 한간(漢奸) 위선즈/우심징의 악당 롄핑산/렴평산(廉平山) 괴뢰보위단이 경상적(經常的)으로 진출하는 곳임으로 한군은 부득불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했고 새로운 연합대상을 찾아야 했다.
* 정설분자(精說分子) ?
* 경상적(經常的) : 정상(正常)의 상태(狀態)로 늘 변(變)함이 없는 것. 일상적
주
註) 059 : 위선즈/우심징(于深澂)(1887∼1944), 자(字) 험주(险舟/險舟). 지린성쐉청현/길림성쌍성현(吉林省雙城縣)(현 헤이룽성黑龍江省)인(人).
註) 060 : 딩차오/정초(丁超)(1876∼1950), 자(字) 결침(洁忱/潔忱), 랴오닝싱징/요녕흥경인(遼寧興京人).
註) 061 : 《순시원성관어아성정치·경제·군사급당적공작정황보고(巡視員成關於阿城政治·經濟·軍事及黨的工作情況報吿)》 (1932.9.8 ;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滙集)》 갑(甲) 제11책).
註) 062 : 주 52)와 같음.
註) 063 : 이때 그는 길림성자위군우로군(吉林自衛軍右路軍) 제7려 여장(旅長)으로 되었다.
註) 064 : 〈위길림성경무청당안(僞吉林省警務廳檔案)〉(《구서림정보풍궁등부정황(邱瑞林呈報馮宮等部情況)》, 1932.6.24).
註) 065 : 〈한국독립군여중국의용군연합항일기실(韓國獨立軍與中國義勇軍聯合抗日紀實)〉.
註) 066 : 어떤 자료에서는 안종선(安鍾宣)이 안해천(安海天)으로 씌임.
註) 067 : 〈성경시보(盛京時報)〉 1932년 6월 3일.
청윈/성윤(誠允) 등의 회상에 의하면, “左路第五旅旅長楊質斌已將阿城克復 擒僞縣長魏福錫 公安局長徐成東”, 《혈염백산흑수기(血染白山黑水記)》 속간(續刊)에서(1932년 9월 동북민중구국의용군정부편인/民衆救國義勇軍政部編印).
註) 068 : 카오펑린/고봉림은 9월사이에 중로연합군 제1군 군장으로 승급하였다.
註) 069 : 〈한국독립군여중국의용군연합항일기실(韓國獨立軍與中國義勇軍聯合抗日紀實)〉 앞의 책. 고봉림은 1933년 후 다시 항일에 나섰다. 그는 동북항일연군에 가입하고 동북항일연군 제3군 조상지부(趙尙志部)의 사장(師長)직을 맡음.
'근현대사 > 독립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한국독립군의 편성 - 근대사료DB (0) | 2024.10.17 |
---|---|
[단독] 독립유공자 후손 1700여 명, 내년 지원금 못 받을 위기 - KPI뉴스 (0) | 2024.10.15 |
1) 일제의 만주침략정책 - 근대사료DB (7) | 2024.10.13 |
4)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활동의 역사적 의의 - 근대사료DB (3) | 2024.10.12 |
사라졌던 홍범도 장군 묘비, 40여년 만에 찾았다 - 경향 (7) | 2024.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