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eekly.hankooki.com/lpage/culture/200604/wk2006042010573182710.htm


한주와 안장왕, 백제 미녀 사랑한 고구려 태자 국경넘어 '절개지킨 꽃' 쟁취
풍류의 향기 ⑪ 한주와 안장왕 - 구슬아씨, 성주 유혹 뿌리쳐… 신분·국가 초월 로맨스
입력시간 : 2006/04/20 10:57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


[사진] 고구려 안장왕 즉위 당시 백제의 영토였던 고양시. 역사를 간직한 땅이다.

경기도 고양시의 고봉산은 그 옛날 고구려의 22대 임금 안장왕(安藏王)과 백제의 미인 한주(韓珠)의 극적이며 아름다운 사랑의 사연이 서린 풍류사의 현장이다.

서기 519년 고구려의 안장왕이 즉위할 무렵 오늘의 행주산성과 오두산성 일대인 한강 하류의 이 전략적 요충지 고양시는 백제의 영토로서 개백현이라고 불렸다.

그 해는 백제 무령왕(武寧王) 19년. 도읍은 오늘의 충남 공주인 웅진성이었다. 또한 신라는 법흥왕(法興王) 6년, 중국은 북위와 양이 겨루던 남북조 시대 말기였다.

이러한 무렵에 백제 개백현에는 한씨라는 호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한주라는 아리따운 딸 하나가 있었다. 한은 성이니까 그녀의 이름은 우리말로 하면 구슬아씨였을 것이다. 안장왕은 장수왕(長壽王)의 손자인 문자명왕(文咨明王)의 아들로서 태자 때의 이름은 흥안(興安)이라고 했다.

이 흥안태자가 어느 날 부왕의 허락을 받고 상인으로 변장한 채 강을 건너 개백현으로 몰래 넘어와 적정을 살피다가 그만 백제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달아나게 되었다.

사랑의 포로가 된 구슬아씨

정신없이 도망치던 흥안태자가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자 다급한 나머지 어느 큰 저택의 담장을 훌쩍 타넘어 몰래 숨었는데, 그 집이 바로 구슬아씨의 집이었다. 그렇게 해서 흥안태자와 구슬아씨는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천생연분이었는지 씩씩하고 잘 생긴 고구려의 태자와 아리따운 백제의 처녀는 그만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며칠 숨어 지내는 동안 두 청춘 남녀의 가슴에는 사랑이 싹트고 샘솟아 그만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고야 말았다.

흥안태자는 그렇게 구슬아씨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고 이렇게 약속했다.

“나는 사실 고구려의 흥안태자라오. 언제까지나 이렇게 숨어 있을 수는 없기에 사실을 밝히고 내 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당신에게 약속을 하고 가려 하오. 내 반드시 군사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그대를 모셔가리다! 그리고 정식으로 혼인을 하여 당신을 대고구려의 황후로 맞이할 터이요!”

그리고 나서 흥안태자는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한 번 간 태자는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그것은 새로 부임한 성주가 구슬아씨의 미모가 매우 빼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혼인을 강요해온 것이었다.

그 성주가 미혼이었는지, 아니면 유부남인데 구슬아씨를 첩으로 삼으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구슬아씨는 이미 정혼한 남정네가 있다면서 한사코 거절을 했다. 마침내 성주가 애가 타고 노해서 구슬아씨를 잡아들여 매질을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옥에 가두고 말았다.

성주가 매일같이 혼인을 강요하며 야욕을 채우려고 하자 구슬아씨가 이런 시조를 읊어 자신의 매서운 절개를 표시했다.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든 없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독자들은 이 시조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읊었던 ‘단심가’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에서 그때 한주가 읊었다는 게 바로 이 단심가라고 했다.

어쨌든, 이 노래를 전해들은 성주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알자 구슬아씨를 아예 죽여 없애기로 작정했다. 그 며칠 뒤가 성주의 생일이었다. 성주가 구슬아씨를 불러내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노라! 너는 내 각시가 될 터인고? 만일 또다시 거절한다면 오늘이 바로 네 제삿날이 되리라!”
“하늘이 무서운 줄 아시오! 내가 죽으면 내 제삿날이 되려니와 만일 내 뜻을 꺾지 못한다면 오늘이 성주의 제삿날이 되리라!”

성주가 분기충천하여 “저 년 죽여라!” 하고 악을 쓰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와 하는 함성이 울리더니 수십 명의 장사가 창검을 들고 잔치판에 뛰어들더니 성주의 부하들을 마구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계속해서 고함쳤다.

“악독한 성주 놈을 죽여라!” “고구려 군사 수만 명이 강을 건너왔다!” “모두 항복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구슬아씨의 목숨이 위급한 순간에 고구려 군사들이 나타난 것일까. 사실은 이러했다. 고구려로 돌아간 흥안태자는 부왕이 세상을 뜨자 뒤를 이어 즉위했는데, 단 하루도 구슬아씨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개백현을 수복하고 한주를 구출해오는 장수에게는 천금의 상과 높은 벼슬을 내린다 하고, 중신들을 불러 계책을 논의했다.

이때 안장왕의 누이 안학공주(安鶴公主)를 사모하는 을밀선인(乙密仙人)이 앞으로 나서서 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개백현을 수복하고 한주를 구해오겠노라고 했다. 그 대신 성공하면 안학공주와 혼인을 허락해달라고 했다. 을밀선인은 고국천왕(故國川王) 때의 명재상 을파소(乙巴素)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을밀선인이 특공 결사대를 이끌고 그 전날 밤에 몰래 강을 넘어 숨어 있다가 성주의 잔치판을 급습한 것이었다. 무사히 구슬아씨를 구해낸 을밀선인이 말했다.

“지금 대왕께서 저 강 건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봉화를 올리면 군사를 휘몰 아 이내 강을 건너오실 것입니다!”

구슬아씨가 그 말을 듣자 을밀선인과 그의 부하들을 안내하여 고봉산으로 올라가 봉화를 올렸다.

강 건너편에서 대군을 거느리고 있던 안장왕이 그 봉화를 보자 이내 도강작전을 개시하여 질풍노도처럼 개백현을 휩쓸고 마침내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았다. 동시에 사랑하는 구슬아씨를 구출하여 고구려의 도성 평양성으로 데려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안장왕은 531년 재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아우 보연(안원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했으니, 이로 추측컨대 한주가 왕후가 되었든 후비가 되었든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마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백제는 중요한 군사적 거점인 국경지역의 군사와 행정 책임자로서 자질이 모자라고 탐욕스러운 자를 임명한 탓에 천심이라는 민심도 잃고, 나라 땅까지 빼앗기게 되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교훈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지금 고봉산 정상은 군사시설이므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일천오백년 전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은 이미 끝난 지 오래 전이지만, 이제는 남북이 바로 그 강을 사이에 두고 맞서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고구려 태자였던 안장왕과 백제 미녀 한주의 풍류 한마당, 국경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로맨스는 <삼국사기> ‘잡지’ 지리편,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그리고 단재 신채호가 <해상잡록>이란 책을 인용한 <조선상고사>에 실려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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