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seoulpost.co.kr/news/10187
기지로 목숨을 구한 '후녀'
고구려 10대 산상왕 편- 동한이 몰락하고 마침내..
임동주 서울대 겸임교수 (발행일: 2009/06/22 02:28:19)
산상왕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한다는 취수혼의 풍습에 따라 우씨를 왕후로 맞이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다. 우씨는 아기를 잉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사왕은 신성한 산천을 돌며 천지신명에게 왕자를 점지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왕이 잠을 자는데 천신(天神)이 나타나 일렀다.
“너의 소후(小后)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터이니 근신하여라.”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천신이 말한 소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산상왕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정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왕은 다가오는 동맹에 더욱더 정성을 기울이라고 신하들에게 지시했다. 왕은 추성돈을 불러 제물로 바칠 돼지를 맡기면서 단단히 일렀다.
“제물에 조금이라도 부정이 타면 가만히 있지 않겠노라.”
추성돈은 왕명을 받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 큰일이 벌어졌다. 모친이 위급하다는 소식에 추성돈은 돼지를 돼지지기에게 맡기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때 돼지가 우리를 부수고 달아났던 것이다. 돌아온 추성돈은 돼지가 달아난 것을 알고 하늘이 노래졌다. 추성돈이 부하들과 함께 돼지의 흔적을 찾아 주통천(酒桶村)에 이르렀다. 수풀 속에서 낯익은 돼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추성돈은 성큼 돼지를 잡으려했지만 돼지는 재빨리 달아났다. 우여곡절 끝에 한 여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돼지를 잡을 수 있었다. 여인은 부용이 사람으로 환생한 듯 미모가 수려했다. 추성돈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심장이 멎는 듯했다. 여인은 돼지를 잡아 군사에게 넘겨주고 자리를 떴다.
한편 궁궐에서는 돼지가 없어진 것을 알고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크게 화가 난 산상왕은 군사들에게 명해 당장 추성돈을 잡아 오게 했다. 그러나 추성돈이 돼지와 함께 돌아오자 왕의 분노도 누그러졌다.
“네 어찌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돼지를 놓쳤더란 말이냐?”
“죽을죄를 졌사옵니다. 하오나......”
추성돈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왕이 좌우를 물리치자 그는 주통촌까지 가서 돼지를 잡은 얘기와 아름다운 여인에 대해 소상히 아뢰었다. 왕은 그녀가 궁금했다. 왕은 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추성돈을 앞세우고 주통촌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지고 있었다. 수소문해 본 결과 여인은 후녀라 했고 동생과 같이 살고 있었다. 왕이 후녀의 집으로 찾아오자 그녀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대왕께서 무슨 일로......“
“여인은 고개를 들라.”
후녀가 고개를 들자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교교한 달빛을 받아 요염한 자태를 더 했다. 왕은 후녀가 자기의 운명이라 생각했다.
“너는 오늘 내 청을 들도록 하라.”
후녀는 당황했지만 속으로 사태를 정리했다.
‘만약 내가 거부한다면 목숨도 온전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왕의 씨라도 잉태한다면 궁에 들어가 호의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마음을 정한 후녀는 왕에게 단호하게 나왔다.
“어찌 지엄한 왕명을 거부하겠나이까? 하오나 만약 아기가 생긴다면 소첩을 버리지 말아주옵소서.”
왕은 후녀의 청을 흔쾌히 허락하고 합방에 들어갔다. 후녀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번져 갔다.
산상왕이 주통촌에 여자를 숨겨 놓고 자주 드나든다는 소문을 들은 우씨 왕후는 질투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우왕후는 심복에게 후녀를 죽이라고 명했다. 심복은 군사를 이끌고 주통촌으로 달려갔다. 후녀는 놀라 산으로 도망쳤지만 이내 잡히고 만다.
후녀는 기지를 발휘했다.
“너희가 나를 죽이려함은 왕의 명령이냐? 아님 왕후의 명령이냐? 지금 내 뱃속에는 대왕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 내 몸 죽는 거야 괜찮지만 왕자까지 죽일 작정이냐? 나중에 그 죄는 너희 삼족을 멸해도 모자랄 것이다.”
왕자라는 말에 군사들은 크게 놀랐다. 고구려에서 왕이 얼마나 자식을 원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나중에 왕이 자초지종을 알고 후녀를 후궁에 봉했음은 불문가지다. 후녀는 말로 본인은 물론 아들(동천왕)까지 살렸으니 기지가 훌륭한 여인이다.
▣ 서울대학교 겸임교수, 도서출판 마야 대표 (임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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