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원왕(平原王)

고구려 제25대 왕. 평강상호왕(平岡上好王)평강왕(平岡王)평국왕(平國王), 양원왕의 장자
생몰 : 미상∼590년(영양왕 1). 
재위 : 559∼590년.

이름 : 양성(陽成), 탕(湯)
       
부왕 : 양원왕
       
모후 : ?
       
왕후 : ?
             
장남 : 고원(高元) - 제 26대 왕 영양왕이 된다.
             
차남 : 고건무(高建武) - 제 27대 왕 영류왕이 된다.
             
3남 : 고태양(高太陽) - 태양왕(太陽王). 보장왕의 아버지.
             
딸 : 평강공주(平岡公主)
                   
사위 : 온달(溫達)

559년 음3월 [양원왕 15년 3월] 양원왕 죽음, 평원왕 즉위함. 
560년 음2월 [평원왕 2년 2월] 북제에서 왕에게 관작을 보내옴. 졸본에 행차 
561년 음11월 [평원왕 3년 11월] 진(陳)나라에 사신 보냄. 
562년 음2월 [평원왕 4년 2월] 진나라에서 왕에게 관작을 보내옴. 
562년 음8월 [흠명천황 23년 8월] 천황이 대장군 대반련협수언(大伴連狹手彦) 
564년 [평원왕 6년] 북제(北齊)에 사신 보냄. 
565년 음1월 [평원왕 7년 1월] 왕자 원(元)을 태자 책봉함. 
565년 음5월 [흠명천황 26년 5월] 고구려의 두무리야계(頭霧唎耶階)가 투항함. 
566년 음12월 [평원왕 8년 12월] 진(陳)나라에 사신 보냄. 
566년 [평원왕 8년] 평양성벽석각 새김. 
569년 [평원왕 11년] 평양성벽석각 새김. 
570년 음4월 2일 [흠명천황 26년 4월 2일] 표류한 고구려 사신 도착함. 
570년 음11월 [평원왕 12년 11월] 진나라에 사신 보냄. 
571년 음2월 [평원왕 13년 2월] 진나라에 사신 보냄. 
571년 음8월 [평원왕 13년 8월] 궁실을 중수함. 
571년 [평원왕 13년] 경사년(景四年) 신묘명(辛卯銘) 금동삼존불상  
572년 음5월 15일 [민달천황 1년 5월 15일] 고구려 사신의 표소(表疏)를 왕진이(王辰爾)가 해독 
572년 음7월 [민달천황 2년 7월] 왜의 송사(送使)가 고려사인 살해함. 
573년 [평원왕 15년] 북제(北齊)에 사신 보냄. 
574년 음1월 [평원왕 16년 1월] 진나라에 사신 보냄. 
574년 음5월 5일 [민달천황 3년 5월 5일] 고려사인 월해에 도착함. 
576년 [평원왕 18년] 의연(義淵)을 북제(北齊) 수도 업(鄴) 
577년 [평원왕 19년] 북주에 사신 보냄. 
581년 음2월 [평원왕 23년 2월] 그믐, 유성이 떨어짐. 
581년 음7월 [평원왕 23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 피해가 있었음. 
581년 음10월 [평원왕 23년 10월] 기근이 들어 왕이 순행 위무함.  
581년 음12월 [평원왕 23년 12월] 수(隋)나라에 사신 보냄. 
582년 음1월 [평원왕 24년 1월] 수나라에 사신 보냄. 
582년 음11월 [평원왕 24년 11월] 수나라에 사신 보냄. 
583년 음1월 [평원왕 25년 1월] 수나라에 사신 보냄. 
583년 음2월 [평원왕 25년 2월]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장려함. 
583년 음4월 [평원왕 25년 4월] 수나라에 사신 보냄. 
583년 [평원왕 25년] 겨울에 수나라에 사신 보냄. 
584년 음4월 [평원왕 26년 4월] 수 문제가 대흥전에서 우리 사신에게 잔치를 베품 
584년 [평원왕 26년] 봄에 수나라에 사신 보냄. 
585년 음12월 [평원왕 27년 12월] 진나라에 사신 보냄.  
586년 [평원왕 28년] 평양 대성산(大城山)에서 장안성(長安城)으로 천도 
590년 음9월 [평원왕 32년] 이 즈음, 진(陳)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590년 음10월 [영양왕 1년 10월] 평원왕이 죽음, 영양왕 즉위. 

양원왕의 장자로 태어나 557년(양원왕 13) 태자가 되고, 559년 왕위를 계승하였다. 담력이 있고 승마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560년(평원왕 2) 졸본(卒本)에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백성들의 재난을 구휼하기 위해 재위 중 왕의 음식을 줄이고 백성을 위로하고 농상(農桑)을 장려하며, 552년 이래 계속된 장안성(長安城)의 축성을 일시 중단하는 등 양원왕의 즉위 이래 계속된 내분과 민심의 수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왕의 전제적 권한은 이미 귀족세력들의 발호에 의해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586년에는 지금의 평양 대성산성(大聖山城) 일대에서 장안성으로 궁을 옮겼다. 외교면에서 당시의 중국은 남조의 진(陳)나라 및 북조의 북제(北齊)·북주(北周)가 대치하고 있었는데, 고구려는 전통적인 외교정책대로 이들과 두루 교섭관계를 가짐으로써 국제관계의 안정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560년에는 북제로부터 ‘사지절영동이교위요동군공고구려왕(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563년에는 진나라로부터 ‘영동장군(寧東將軍)’의 지위를 받았다. 또한, 580년에는 북주에 조공을 하고 ‘개부의동삼사대장군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581년에는 북주를 계승한 수나라와 외교관계를 가지고 ‘대장군요동군공(大將軍遼東郡公)’의 지위를 받았다.
 

이같이 표면적으로 순탄한 관계를 가진듯 하지만 양원왕 이래 북조와의 관계는 평탄하지 않았다. 북주 무제(武帝) 요동을 공격하여 왔을 때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에서 싸웠고, 또 590년에는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준비를 서두르게 하였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당시 중국의 통일이 고구려에 주는 정치적·군사적 부담이 점차 가중되어 갔던 것을 알 수 있다.
 

586년에 고구려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별부(契丹別部) 출복(出伏) 등이 이탈하여 수나라에 투항하였다. 돌궐(突厥)과의 관계도 겉으로는 커다란 충돌이 없었으나, 양세력의 긴장된 상태는 여전하였다.

한편, 한강유역의 점령을 둘러 싸고 기존의 나제동맹이 결렬되면서 
백제 신라 사이에 전쟁이 빈발하자, 고구려는 이들과 소강상태를 유지한 채 북방과 서방의 변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北齊書
周書
隋書
陳書
5·6世紀 東아시아의 國際情勢와 高句麗의 對外關係(盧泰敦, 東方學志 44, 1984)
高句麗の平壤城及び長安城に就いて(關野貞, 朝鮮の建築と藝術, 1941)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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