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왕(寶藏王)
고구려 제28대왕이며 마지막 왕.
생몰 : 미상∼682년(신문왕 2).
재위 : 642∼668년.
이름 : 장(臧, 藏), 보장(寶臧, 寶藏).
가계
아버지 : 태양왕(太陽王)
어머니 : ?
왕후 : ?
장남 : 고명승
차남 : 고인승(高仁勝) - 횡성 고씨의 시조.
삼남 : 고덕승
사남 : 고안승(高安勝) - 보덕왕
오남 : 고복남(高福男)
손자 : 고보원(高寶元) - 보원왕
육남 : 고임무(高任武)
칠남 : 고덕무(高德武) - 덕무왕
팔남 : 고약광(高若廣)
구남 : ?
손자 : 고련(高連)
증손자 : 고진(高震) - 고련의 아들
642년 음10월 [보장왕 1년 10월] 연개소문(淵蓋蘇文),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
643년 음1월 [선덕여왕 12년 : 의자왕 3년 : 보장왕 2년 1월] 신라, 고구려, 백제 당나라에 사신 보냄.
643년 음3월 [보장왕 2년 3월] 당나라에 도교 구함.
643년 음6월 [보장왕 2년 6월] 당나라에서 보장왕에게 관작 보내옴.
644년 음1월 [보장왕 3년 1월] 당나라에서 신라를 침략하지 말 것을 권유함.
644년 음7월 [보장왕 3년 7월] 당나라가 장차 출병하여 공격해올 준비함.
644년 음9월 [보장왕 3년 9월] 연개소문(淵蓋蘇文), 당나라에 백금(白金)
645년 음4월 1일 [황극천황 4년 4월 1일] 고려 학문승 가운데 안작득지(鞍作得志)
645년 음4월 [보장왕 4년 4월] 당나라가 10만 대군으로 공격 개시함.
645년 음6월 [보장왕 4년 6월] 당나라 군대가 안시성(安市城) 포위함.
645년 음7월 [대화천황 1년 7월] 고구려·백제·신라 사신 조공
645년 음9월 [보장왕 4년 9월]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한 당나라 군대 물리침.
645년 [보장왕 4년] 개모성(蓋牟城)·요동성(邀東城)·백암성(白巖城)
646년 음5월 [보장왕 5년 5월] 당나라에 화평 제의함.
647년 음1월 15일 [효덕천황 3년 1월 15일] 고구려·신라가 사신 파견함.
647년 음2월 [보장왕 6년 2월] 당나라의 침공 받음.
647년 음5월 [보장왕 6년 5월] 남소(南蘇)·목저(木底) 2성, 당나라의 침공
647년 음12월 [보장왕 6년 12월] 왕이 막리지 임무(任武)를 당에 보내어 사죄하여
648년 음1월 [보장왕 7년 1월] 당나라의 설만철(薛萬撤)이 해로로 침입함.
650년 음2월 15일 [효덕천황 백치 1년 2월 15일] 백제의 풍장(豊章), 새성(塞城), 충승(忠勝)
650년 음6월 [보장왕 9년 6월] 승려 보덕(普德), 도교(道敎) 숭상에 반발
651년 음10월 [보장왕 10년 1월] 당나라에 사신 보냄.
654년 음10월 [보장왕 13년 10월] 신성(新城)에서 당나라 대파함.
655년 음1월 [보장왕 14년 1월] 백제·말갈과 함께 신라의 33성 공취함.
655년 음3월 [보장왕 14년 3월] 신라의 요청으로 당나라 군대의 공격 받음.
655년 음5월 [보장왕 14년 5월] 귀단수(貴湍水)에서 당나라 군대에게 패배함.
655년 [제명천황 1년] 백제·고구려·신라가 견사함.
656년 음12월 [보장왕 15년 12월] 당나라에 사신 보냄.
658년 음6월 [보장왕 17년 6월] 당나라 군대와 요동에서 전투함.
659년 음11월 [보장왕 18년 11월] 당나라 군대와 요동에서 싸움.
660년 음11월 [보장왕 19년 11월] 당나라가 공격하여 옴.
661년 음5월 9일 [보장왕 20년 5월9일] 북한산성(北漢山城) 공격함.
661년 음8월 [보장왕 20년 8월] 당나라군이 평양성 포위함.
661년 음9월 [보장왕 20년 9월] 압록강에서 당나라군과 격전함.
661년 음11월 [보장왕 20년 4월] 당나라 군대의 공격 받음.
662년 음1월 [보장왕 21년 1월] 소정방(蘇定方)이 평양의 포위를 풀고 철수함.
666년 음6월 [보장왕 25년 6월] 남생 당나라로 달아남.
666년 음8월 [보장왕 25년 8월]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서울과 지방의 군사의 일
666년 음8월 [보장왕 25년 8월] 당 고종이 이적을 요동도 행군총관 겸 안무대사
666년 음9월 [보장왕 25년 9월] 남생을 요동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를 주고 현도군공
666년 음12월 [문무왕 6년 12월] 당나라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
666년 [보장왕 25년] 태자 복남을 당나라에 보내 태산 제사에 참가
666년 [보장왕 25년] 남생이 막리지가 되자 남건과 남산이 반란
667년 음9월 [보장왕 26년 9월] 당나라 군대가 공격 시작, 남소성(南蘇城)
668년 음2월 [보장왕 27년 2월] 당나라 군대가 부여성(扶餘城)을 함락시킴.
668년 음9월 [보장왕 27년 9월] 보장왕 항복함. 보장왕을 비롯한 대신 등
고구려의 왕명은 대부분 시호이나 이 왕은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시호가 없다. 영류왕의 동생인태양왕(太陽王)의 아들이다.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하여 왕으로 옹립되었기 때문에 비록 왕위에 있었지만 연개소문의 그늘에 가려 왕으로서의 실권을 가지지는 못했다.
1. 도교진흥책
재위기간중 국내적으로는 천재지변이 잦았고, 643년(보장왕 2)에는 연개소문의 주장에 따라 당나라에 요청하여 도사(道士)를 초빙하는 등 도교진흥책을 썼다. 이에 대하여 고구려 종교계에서 기득권을 가진 불교세력의 반발이 심하였고 보덕(寶德)과 같은 승려는 650년 백제로 망명하기까지 하였다. 당시의 도교진흥책에 대해서는 도교를 숭신하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연개소문의 독재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2. 대외관계
한편, 재위기간중의 국제관계는 즉위초에는 당나라와 표면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사절을 교환하고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 태종의 팽창정책으로 말미암아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또 신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적대관계를 계속하여 자주 신라를 공격했고, 나아가서 백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바다 건너 왜(倭)와의 관계를 재개하여 신라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에 신라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당나라와 밀착했고, 당나라는 신라를 두둔하면서 고구려에 대해 신라침공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를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마침내 당나라와의 관계도 파국에 이르렀다.
4. 대당전쟁
그래서 당 태종은 치밀한 사전준비 끝에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를 성토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645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했고, 자신이 진두지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안시성 싸움에서 참패하고 말았고, 이후 작전을 바꾸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정면대결을 벌이는 대신 소규모 군대로 고구려 각지를 수시로 침공하여 고구려를 피폐하게 하기도 하고, 647년과 648년에도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고구려 침공에 앞장섰던 당 태종이 649년에 죽음으로써 당나라와의 관계는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했지만, 당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도 고구려 정복 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고구려는 고구려대로 654년에는 거란족을 공격하는가 하면 655년에는 백제와 더불어 신라를 공격하는 등, 당나라와 우호관계에 있던 세력들을 공격하여 당나라 군사를 자극했다. 이 때문에 655년부터 당나라와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고, 660년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다시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여 평양성에까지 침입해온 당군을 물리친 적도 있었다.
5. 내분과 멸망
백제멸망 이후 백제유민의 부흥운동이 전개되자 신라와 당나라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고, 이로 인하여 당나라와의 직접 충돌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663년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어가던 부여풍(扶餘豊: 豊璋이라고도 함.)이 고구려로 망명함으로써 이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데다가,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이듬해인 666년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남생(南生) 형제간의 내분이 일어나 남생이 당나라로 투항했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는 신라로 망명하는 등 고구려 지배층내의 분열과 동요가 일어나자,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다시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를 맞아 고구려는 각지에서 분전했지만 패배를 거듭했고 마침내 668년 9월에는 평양성마저 함락당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6. 고구려 부흥운동
고구려 멸망 후 보장왕은 당나라로 잡혀갔고, 정치의 책임이 왕에게 있지 않다고 하여 당나라로부터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당나라가 고구려유민과 신라의 치열한 반당운동으로 말미암아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기고 사실상 한반도 지배를 포기한 이듬해인 677년에는 요동지방 전체를 지배하는 요동도독 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에 임명되어 당나라에 잡혀간 많은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당나라가 한반도 포기에 따른 요동지역의 동요를 막기 위해 취한 조처였으나, 요동으로 돌아온 보장왕은 오히려 고구려유민을 규합하고 말갈과 내통하여 고구려부흥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681년 공주(邛州: 四川省 邛峽)로 유배되고 말았으며, 682년경 사망하였다. 죽은 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운구되어, 돌궐 가한(可汗)으로 당나라에 투항한 힐리(頡利)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비를 세웠으며,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되었다. 아들로는 남복(男福, 또는 福男)·임무(任武)·덕무(德武)·안승(安勝) 등이 기록에 보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舊唐書
新唐書
資治通鑑
日本書紀
淵蓋蘇文의 執權과 道敎(李乃沃, 歷史學報 99·100합집, 1983)
高句麗國遺民反唐分子の處置(日野開三郞, 日野開三郞東洋史學論集 8,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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