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kindSeq=1&writeDateChk=20120118
<53>요하 방어선의 붕괴
唐<당나라>, 보급 부담 없는 유목민 기병 대거 동원
2012.01.18
당나라 영주 유성(현 조양)의 모형. 645년 당나라의 침략군은 이 부근을 통과해 고구려로 향했다.
645년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상황도.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제공
644년 11월 2일 낙양에 도착한 당 태종은 병력 파병의 구체적인 조직 결정과 주요 지휘관에 해당하는 총관 16명을 인선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앞서 태종은 대규모 농민을 징집해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가 실패한 수나라 양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중국 한족들을 징집하지 않았다. 단 종군을 원하는 지원병을 모집했다. 당 태종의 1차 고구려 침공만큼 다양한 종족을 동원한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핵심전력으로 비중국인인 돌궐ㆍ거란ㆍ해ㆍ말갈 등 유목민 기병들을 대거 참여시켰다. 그들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하는 기마 전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보급도 자체 해결했다.
이윽고 24일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위한 행군조직 인사를 단행했다. 형부상서 장량(張亮)이 평양도(平壤道) 행군대총관에 임명됐다. 그는 해군을 맡았다. 휘하에는 강주(江州ㆍ장강유역), 회주(淮州ㆍ회하유역), 영주(嶺州ㆍ남령 이남), 협주(峽州ㆍ삼협지구) 등 4만이 배정됐다. 그들은 주로 중국 중남부 지역의 병사들로 물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산동 내주의 해군기지에는 500척의 전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군들은 전함에 승선해 요동반도의 서쪽 끝인 고구려의 비사성을 점령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요하ㆍ압록강ㆍ대동강 하구에 상륙하거나 그곳에 도착한 당군에게 보급할 계획이었다.
당 군부의 수장인 이세적은 요동도행군총관에 임명됐다. 그는 육군을 맡았다. 휘하에는 보병과 기병 6만이 배치됐다. 그들은 북부의 중국인 젊은이들로 유목지대와 인접한 곳 출신 병사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고구려 침공의 핵심병력으로 난주(州ㆍ감숙성 난주시)와 하주(河州ㆍ감숙성 임하시)에 거주하는 돌궐계 유목민 기병들이 그를 따라왔다. 2개 주의 돌궐 기병을 이끌었던 것은 계필하력·아사나미사 2인이었다. 돌궐 기병은 그들 휘하의 부락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아사나미사 등도 휘하의 부락민을 이끌고 전투에 참전했다. 그리고 조주 방면에 있던 사타족 수장 발야의 묵리군도 참전했다. 물론 장검이 이끄는 거란ㆍ해ㆍ말갈 등의 기병들도 종군했다. 도합 6만 이상의 병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목민 기병들은 앞서 언급한 것보다 더한 강점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인적 희생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전쟁을 하다가 죽든 굶어서 도중에 쓰러져 숨을 거두는 사람이 속출하든 태종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중국인 병사들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아도 됐다. 단지 고구려에서 그들의 약탈 욕구만 채워주면 된다.
육군의 모든 병력은 현 영주의 치소인 현 요령성 조양에서 모두 집결한 것으로 보인다. 645년 2월 유주(幽州ㆍ북경)를 출발한 이세적이 다음달 영주 유성(현 조양)에 도착했을 때 집결한 전군은 출발을 완료했다. 중국인들은 기병과 보병 혼성으로 구성돼 있었고, 돌궐ㆍ거란ㆍ해ㆍ말갈 등은 모두 기병이었으며, 기수 1명당 4필 정도의 전마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수의 말이었다. 고구려로 향하는 진군의 날짜를 음력 3월로 잡은 것도 그 시기부터 남만주의 들판에 말들을 먹일 수 있는 풀들이 본격적으로 돋아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행군 시 병력을 넓게 분산해야 했다. 사람도 먹어야 하지만 말들도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곡물로 환산하면 말 1필은 사람 12배를 먹는다.
고비사막의 흙먼지가 상승기류를 타고 올라온 황사가 하늘을 누렇게 물들이는 건조한 봄 3월 9일이었다. 당 태종은 정주(定州ㆍ하북성 보정)에서 신하들 앞에서 정식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내용의 요지는 수가 망하고 등장한 당나라에 고구려는 중국 역사에 박힌 가시이니 그것을 빼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인데 수나라가 네 번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지금 동방을 정벌해 중국 병사들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사방이 평정됐는데 오직 이곳(고구려)만이 버티고 있다. 짐이 더 늙기 전에 그대들의 힘을 써서 고구려를 빼앗고자 한다.”
같은 시기 이세적의 당 육군 주력이 영주를 출발해 요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말들이 일으키는 짙은 먼지가 황사에 더해져 들판에 자욱했다. 그들은 연군성 앞에서 대능하를 건넜다. 영주에서 요동으로 가는 길은 세 갈래였다. 하나는 대응하 하류부근의 연군성(燕郡城)~여라수착(汝羅守捉)을 거쳐 요하라류를 건너 한나라시대의 요대현(遼隊縣)에 이르는 남도이고, 다른 하나는 연군성~회원진(요녕성 요풍현)을 거쳐 요동성으로 이르는 중도다. 마지막으로 북도는 연군성에서 북으로 통정진(通定鎭ㆍ현 신민부)을 지나 신성(新城)·현토성 방면으로 가는 길이다.
이세적의 육군 주력은 동쪽으로 향했다. 행군은 빠르지 않았다. 회원진을 향해 오는 당군의 거대한 행렬이 고구려군에 포착됐다. 요서 곳곳에 소리 없이 생겨난 고구려군의 봉화에 연기가 치솟았다. 회원진의 뒤 동쪽편의 요택의 방대한 지역 곳곳에 잠복한 고구려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폭이 넓은 여러 강 기슭에도 고구려군들이 당군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한 준비를 완료했다. 당군이 거대한 먼지를 일으키며 가까이 다가오면서 긴장감도 더해져 갔다.
당군이 드디어 회원진 부근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세적은 군대의 방향을 갑자기 북동쪽으로 돌려 통정진으로 내달렸다. 고구려군 지휘관들은 속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미 당군을 막기 위해 회원진 부근에 구축한 방어진지들은 무용지물이 됐다. 당군은 통정진으로 가서 요하를 도하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늦었다.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세적의 군사가 유성(柳城)을 출발했는데, 형세를 많이 벌려 놓아 마치 회원진으로 나가는 것처럼 하면서 숨겨서 용도(甬道)로 나아가서 고구려가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나아갔다. 여름 4월 초하루 무술일에 이세적은 통정(通定)에서 요수(遼水)를 건너 현토에 이르니 고구려에서 크게 놀라 성읍에서 모두 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4월 1일 이세적의 육군 주력이 요하에 무사히 도하했고, 회원진 부근에서 급격히 남쪽으로 향했던 장검의 거란ㆍ해ㆍ말갈 기병대는 하구 부근에서 요택을 건너 건안성(建安城) 부근에 육박했다. 적 기병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준비돼 있지 않은 수천 명의 고구려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당대조령집’과 ‘전당문’에 장검과 함께 종군한 이민족 수령들의 이름이 기재돼 있다. 거란족 수령은 어구절(於勾折), 해족은 소지(蘇支), 말갈족은 이원정(李元正)이었다. 연개소문이 굳게 믿고 있었던 거대한 자연장애물인 요하를 당군의 주력이 쉽게 넘었다. 고구려의 요하방어전선은 실질적으로 무너졌다. 이미 도하한 당군과 싸움에 전력을 투여해야 했기 때문에 이제 뒤이어 도하할 당 태종 직속 6군(六軍)을 막을 수 없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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