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kindSeq=1&writeDateChk=20120201
<55>개모성 함락
적 접근로 오판 唐에 핵심거점 내줘
2012.02.01
645년 4월 15일 현 중국 심양 교외에 자리한 소가둔(蘇家屯)에 위치한 고구려 개모성(蓋牟城) 주민들은 말발굽의 진동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성벽 너머 하늘을 보니 거대한 먼지 기둥이 피어올랐다. 당나라에 속한 돌궐족 기병이었다. 성 근처에 육박한 그들은 주변을 넓게 둘러쌌다. 그때 저 멀리서 가시(加屍) 사람 700명이 포위된 개모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명령을 받고 개모성을 돕기 위해 온 소수의 지원 병력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사할 리 없었다. 성벽에서 개모성 사람들이 안쓰럽게 바라보는 가운데 곧바로 돌궐 기병에게 포위됐고, 사로잡혔다.
묘지로 변한 개모성의 옛 터. 개모성이 위치한 바로 그 장소에는 공동묘지가 들어서 무상한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 한다.
고구려 개모성 옛 터의 전경. 해발 125m의 낮은 야산처럼 보이는 곳이 개모성이 있던 곳이다.
‘신당서’ 고려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막리지(莫離支)가 가시 사람 700명을 개모성에 보내 지키게 했는데 이세적이 그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연개소문이 원군을 겨우 700명밖에 보낼 수 없었던 사실은 적의 접근로 판단의 오류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말해준다. 회원진 부근의 요하에 집중된 고구려 군대가 현실에 맞게 재배치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얼마 후 광활한 들판 저 너머로 거대한 당나라 공성기(攻城機)들의 꼭대기가 보였다. 개모성을 향해 다가오는 당 보병들의 석포ㆍ충차ㆍ운제차 같은 성 공격용 기구들이었다. 그 밑에 당 보병들이 성벽에 있던 고구려인들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질서 정연하게 공성기계들을 밀고 다가오던 당군은 고구려군의 화살 사정거리가 약간 못 미치는 지점에서 행군을 멈췄다. 당나라 장수 이세적은 갈 길이 멀었다. 개모성을 함락시켜 교두보를 마련해야 했다. 뒤에 신성이 버티고 있었고, 그곳에 있는 고구려군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끝내야 했다. 얼마 안 있어 당태종이 친히 회원진을 통해 요택을 넘어 요동성으로 올 것이다. 그 전에 개모성을 접수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요동성을 뽑아내야 했다.
이세적은 병사들에게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성에 대한 공격명령을 바로 내렸다. 성벽 앞에 나란히 정렬한 포차(?車)에서 거대한 돌덩이들이 발사됐다. 성 안에 있는 고구려인들에게 바위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돌을 맞은 순간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구조물이든 단숨에 박살이 났다. 포격이 멈추면 사다리차(雲梯)들이 성벽 앞으로 다가갔고, 충차(衝車)가 여러 성문에 들이닥쳤다. 사다리가 성벽에 걸쳐지자 당군들이 쏟아져 올라갔고, 성문에 접근한 충차들이 성문을 두드렸다. 포격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고구려인들은 그 가운데서도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전투는 10일 동안 밤낮으로 지속됐다.
‘책부원귀’ 장수부 공취 조는 당시 개모성의 전투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도착하자 개모성을 곧바로 공격하도록 군을 독려했다. 나란히 서 있는 포차에서 돌을 쏘아 보냈는데, 돌이 비처럼 떨어졌다. 제충(梯沖)이 번갈아 교대로 진격하기를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사다리차는 성벽에 병사들을 내려놓고 뒤로 빠졌고, 또 다른 병사들을 태우고 성벽으로 다가와 내려놓고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사다리가 닿자 성벽으로 향하던 많은 병사가 먼저 화살에 맞았고, 이어 장창에 찔려 성벽 아래로 떨어졌으며, 일부가 성벽에 도착했다고 해도 고구려군의 창검에 급속히 소모되었으리라.
당군의 공성기 제작과 운용을 총괄하던 강확(姜確)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태종에게 고구려 침공을 반대할 정도로 발언권을 가졌고, 태종의 무덤인 소릉(昭陵)에 함께 묻힌 최측근이었다. 그러한 그가 고구려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행군총관이었던 그가 성벽에서 군사를 지휘할 군번이 아니었다. ‘신당서’를 보면 강확은 죽어서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에 추증됐다. 그 만큼 고위 장성이었다. 원거리에서 저격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유시(流矢)에 맞았다는 위의 기록을 존중하면 저격수가 쏜 한 발의 명중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전투가 시작된 수일 후 공성기 운용을 총괄지휘하던 강확의 위치를 감지한 고구려군들이 그곳에 한꺼번에 원거리 활로 집중 사격을 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나중에 그의 전사 소식을 들은 당태종은 어린아이의 죽음을 본 것처럼 슬픔에 떨었다. 그가 반대하던 전쟁에 그를 내보낸 것은 태종 자신이었다. 당태종은 그를 위해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의 전사는 개모성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말해준다.
시간이 갈수록 고구려군들은 지쳐갔다. 반면 병력이 절대 우위에 있었던 당군은 병력을 교체해 파상적으로 투입했고, 언제나 병력 투입 직전에 포차에서 쏘아 대는 돌들이 계속 쏟아졌다. 성 내부는 어디 하나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먹고 마시고 잠시 눈을 붙이기도 힘들어져 갔다. 방어력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전투 10일째 개모성 함락의 마지막 장면은 실로 이러했을 것이다. 충차의 나무기둥이 성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성문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을 직감한 고구려 군인들이 성문 앞으로 몰려갔다. 빽빽하게 대열을 지은 그들은 창검과 곤봉 그리고 방패를 들고 일방 검이 가면서 부서지는 성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나 최후 결전의 시간이 온 것을 실감했다. 이윽고 성문이 박살나고 당군이 떼지어 몰려 들어왔다. 양군의 대열이 부딪쳤고, 빽빽이 밀집된 상태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열이고 뭐고 없었다. 공간이 좁아 창은 쓸 수도 없었다. 서로 엉켜서 단검으로 찌르고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지옥의 한 장면이었다. 허공에 화살이 오가는 가운데 병사들의 처절한 함성과 비명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이윽고 개모성의 가장 높은자리에 위치한 지휘부 건물에서 시커먼 연기가 올라갔다.
4월 26일 개모성이 함락됐다. 전투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11일 만에 끝난 단기간이라 성내의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굶지는 않았다. 그만큼 생존율이 높았다. 2만 명의 사람이 줄줄이 엮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요하를 건넜고, 성 안의 창고에 남아 있던 10만 석의 양곡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 이제 개모성은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육군의 유용한 거점이 됐다. 개모성은 지휘본부이자 부상병의 야전병원, 전쟁에 지친 병사들과 말이 잠시 숨을 돌리는 안전한 쉼터가 됐다. 그곳에서 병력을 재정비한 이세적은 다음 목표인 요동성으로 향했다. 백암성은 시간이 없어 건너뛰기로 했다.
개모성은 어디?
‘구당서’ 지리지에 인용된 도리기(道里記)를 보면 개모성은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신성(新城)으로 통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평양에서 신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성으로는 요령성 심양시 소가둔구에 위치한 탑산산성(塔山山城)이 있다. 산성은 해발 125m에 불과하지만 광활한 구릉성 평지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산의 정상부에는 파괴된 요금(遼金) 시대의 전탑(塼塔) 유적이 있다.
개모성으로 비정되는 이 산성의 서남쪽에는 태자하(太子河)의 지류인 사하(沙河)가 흐른다. 산성은 북쪽이 높고 남쪽의 낮은 계곡을 끼고 있는 이른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성벽은 1300m 정도의 토축이다. 동남쪽 계곡 입구에 성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문을 둘러쳐 돌출한 옹성(甕城)의 형태가 남아 있다. 이곳이 성의 정문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4곳의 성문 터가 보인다.
성 안쪽에는 결코 좁지 않은 평지가 있는데,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정지한 흔적이 보인다. 이곳에 청사와 창고 등 큰 건물이 위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축성 시기는 고구려가 이곳을 차지한 5세기께로 추정된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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