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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당 수군 제독 장량
비사성 공략 잰걸음 ‘요동은 이미 요동’
2012.02.08
645년 4월 산동반도의 동래(현 산동성 내주시)는 고구려 침공이 결정된 이후 연안은 큰 항구도시로 면모된 듯했다. 당나라 해군의 총사령부인 동래는 전쟁특수를 누렸다. 거리는 북적대기 시작했고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눈길이 가는 곳마다 변화가 느껴졌다. 예전에 뜸했던 항구에는 이제 돛대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고, 조선소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함선들을 수리하느라 일꾼들이 부지런히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항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시 최신예 전함 500척이었다.
절벽 위의 고구려 비사성 장대, 멀리 바다가 보인다. 그 너머에 당군이 주둔했던 오호도(북황성도)가 있다.
깃발은 깃발끼리 돛대는 돛대끼리 빽빽하지만 질서정연하게 모여 있었다. 그 거대한 배들을 채우기 위해 양자강과 회하 유역에서 화물선들이 사람과 물자를 싣고 동래의 항구로 끊임없이 들어왔다. 부두에 있는 군수품 창고는 터질 것만 같았다.
당나라 해군의 수장은 장량(張亮)이었다. ‘책부원구’ 장수부를 보면, 당나라 건국 초기 그는 이밀의 밑에 있었던 이세적의 부하였다. 이세적이 당고조에게 기용된 이후 그는 검교정주별가(檢?定州別駕)로서 군웅인 유흑달과 현 하남성 안양에서 싸웠다. 패배했지만 상관이었던 이세적의 천거를 거듭 받았고, 당태종이 즉위한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637년(정관 11)에 운국공(?國公)에 봉해졌고, 직후 어느 시기에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됐다. 643년 2월 28일 그가 장안 궁정 능연각에 24명 공신의 하나로 초상화가 걸려고, 그해 8월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올랐다.
‘신당서’를 보면 그는 종군을 자청했다고 한다. 정주(鄭州) 형양(滎陽) 출신으로 가난한 농민의 아들에서 장관을 거쳐 해군의 수장까지 올라갔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운 좋은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유순하게만 보이나 영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번 전쟁이 승산이 크게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수차례 전쟁을 만류하는 의견을 당태종에게 개진했다. 하지만 황제의 잔뜩 구름 낀 이마를 대면하고 낙담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자신의 안위가 걱정될 정도의 수위였다. 그것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고구려 전쟁에 나섰다. 그가 해군의 책임자가 된 것도 군부의 수장인 이세적의 후원 때문이었으리라.
4월 중순 장량은 함대를 당도만(唐島灣)에 집결시켰다. 당도는 오늘날 행정지역으로 산동성 교남시에 속해 있는 무인도다. ‘당도’란 지명도 이곳 바다가 당나라 수군이 매번 고구려로 향하는 중간집결지였기 때문에 생겨났다.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묘도, 남ㆍ북장산도, 탁기도, 죽산도, 남ㆍ북황성도, 대ㆍ소흠도 등 32개 섬이 띠처럼 늘어져 있는데, 이를 묘도열도(廟島列島)라 부른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섬들의 밀도는 낮아진다. 이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신석기시대부터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항로가 존재했다. 장량이 고구려로 향하던 750년 전인 기원전 109년 한(漢)나라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은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이곳에서 발해 해협을 건너 고조선(古朝鮮)을 침공했다. 장량도 수군 4만 명을 이끌고 양복이 갔던 길을 갔다.
당도만에서 출발한 장량 함대는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과 가장 가까운 섬인 오호도(烏胡島ㆍ현 북황성도)로 향했다. 그 섬에는 배 200~300척을 접안할 수 있는 수심 깊은 항구가 있었다. 열도의 가장 북단인 오호도는 요동반도에서 고작 24해리 떨어져 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치르는 최전선이라 군수물자가 비축돼 있었고, 고구려의 침공을 막기 위한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해 5월 비사성을 공략한 후 함대를 이끌고 압록강으로 진격해 무력 시위를 했던 오호진장(烏胡鎭將) 고신감(古神感)은 오호도의 주둔 부대장이었다. 그는 동서남이 절벽이고, 북쪽에 44m의 성벽과 성문이 있는 당왕성(唐王城)에 지휘부를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장량의 함대는 오호도로 향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중간에 내렸다. 남북으로 뻗은 열도 중간의 탁기도(현 중국 탁기진)였다. 섬에는 아주 유서 깊은 용왕(龍王) 사당이 있었다. 장량은 645년 5월 어느 날 고구려에 부하들을 보내놓고 성대한 제사를 발해용왕과 그 부인에게 올렸다. 항해의 안전과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돌 위에 새겼다. 1881년 청나라 방여익(方汝翼) 등이 증보 수정한 ‘증수등주부지(增修登州府志)’ 권65에는 고구려전쟁기 용왕신앙과 관련된 중요한 금석문이 수록돼 있다. 책에서 그 석각(唐駝磯島石刻)은 당태종 연간에 장량이 발해 해협을 건너 고구려를 침략할 때 용왕에게 항해안전을 기원한 내용을 새긴 것이라고 했다.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 내용은 이러하다. “당태종 정관19년(645) 5월 모일에 평양도행군총관이자 형부상서 운국공이, ○○대총관(○○부분은 오래돼 해독이 불가능) 등과 함께 발해용왕신과 그 부인(勃海龍王神幷夫人)에게 정중히 경배를 올린다.” 장량의 비장한 마음이 전해진다. 지금도 매년 12월 30일에 뱃사람들이 그 용왕묘에 가서 향불을 올리고 부두로 옮겨가 제례를 지낸다.
장량이 후방의 섬에서 용왕에게 제사를 모실 당시 그의 부하 4만 명은 고구려 비사성이 위치한 대련만ㆍ여순만에 상륙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연개소문, 산동 당태종 습격 전설-역사적 사실 없으나 침공 가능성은 커
중국 산동성 봉래(蓬萊)는 고구려군 습격에 대한 수많은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봉래현지’에는 644년에 당태종이 이곳을 들렀고, 첩보를 접한 고구려 연개소문이 바다를 건너 습격했다는 전설들을 소개하고 있다. 봉래시 촌리집진(村里集鎭) 기슭에서 고구려군이 패해 북쪽 15㎞로 퇴각해 토성을 쌓았다. 훗날 사람들은 이곳을 ‘고성(古城)’이라고 불렀다. 또 고구려군이 촌리집진 2㎞ 북쪽에 떨어진 곳에서 당태종이 친히 이끄는 군대와 격돌했는데, 훗날 양쪽 군대가 교전한 장소를 전가장촌(戰駕庄村, 현 村里集鎭 소재)이라고 불렀다. 얼마 후 고구려군은 당태종이 우가구촌(遇駕溝村) 부근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매복해 습격하니, 훗날 이곳을 난가탄촌(攔駕疃村, 현 紫荊山街道 소재)이라고 불렀다. 이때 당태종은 화급하게 현성 남묘산(南廟山) 아래로 피했는데, 훗날 이곳을 내왕구촌(來王溝村, 현 紫荊山街道 소재)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봉래현지에 나오는 이런 전설들은 역사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역사서에는 당태종의 외출에 관한 기록이 너무나 상세히 남아 있는데 그는 봉래에 온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고구려군의 침공을 받았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당나라 조야에 연개소문이라는 이름이 더욱 강렬하게 인식돼 있었다.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 직전에 친히 반포한 조서(詔書)에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했다는 연개소문의 이름이 나온다. 이것으로 인해 당나라 조야에 연개소문의 이름이 공개적으로 전면 유포됐다. 당태종은 그가 죽을 때까지 세 차례(645년·647년·648년) 고구려를 침공했다. 당 고종 즉위 초기에도 몇 차례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죽음의 땅 고구려에 자식과 아버지를 보낸 중국 백성들 머리에는 연개소문이란 이름이 깊이 각인됐다. 무엇보다 비사성에 있는 고구려군이 자국의 침공기지였던 봉래를 습격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도 석연치 않다. 적어도 전설은 당시 내주의 백성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고구려군에 대한 공포 속에서의 일상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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