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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득리사산성의 "생명수" 용담만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28>
데스크승인 2010.08.10
이 신비로운 용담이 바로 옛날 득리산성의 수원지다. 이 못은 고구려 때 생겨난 인공 못이라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당시 강흥패(姜興覇), 강흥본(姜興本) 형제가 이곳에 성을 쌓고 주변을 호령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 두 형제는 사서에 나오지 않는 인물로서 전설에만 나타날 뿐이다.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이곳을 쳐들어올 때 성을 더욱 견고하게 쌓아 적의 침범에 대비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들 형제는 고구려인으로 추정된다. 이 못을 인력으로 판 데는 사연이 얽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용담산을 차지한 강흥패, 강흥본 형제의 세력이 점차 커졌다. 이에 따라 형제간에 모순이 생기고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루는 강흥패가 동생에게 "분가"하자고 제의한다. 둘이서 이 자그마한 산성을 다스리기에는 세상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흥본은 같이 지낼 것을 주장하며 나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흥패가 산성을 둘러보는데 성안에 우물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았다. 산성에 우물이 이곳밖에 없어 성 안의 백성들이 물을 긷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다. 강흥패는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동생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산성 안에 물이 모자라는 만큼 1천명이 넘는 군사와 마필, 그리고 성 안의 백성들이 충분히 쓸 수 있는 우물을 파낸다면 성 안에 남아 있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서 나가 딴 살림을 차릴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강흥본은 할 수 없이 남쪽 성벽이 가까운 우묵한 곳에 터를 잡고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위산인지라 아무리 곡괭이질을 해봐야 물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강흥본은 파던 구덩이 옆에 널따랗게 터를 잡고 다시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날 며칠을 파도 물 한 방울 하나 나오지 않았다. 우물파기를 그만둘까 망설이던 어느 날, 강흥본이 잠시 쉬던 중 깜박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무슨 일이나 도중에 포기해서야 어찌 성공을 바랄 것이냐. 이제 곧 물이 나올 것이니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좋은 결과를 볼 것이다"라고 말을 마치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강흥본이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러나 생생한 그 꿈이 심상치 않아 계속 우물을 파게 하였다. 그들이 10여m까지 파내려갔을 때 땅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솟구쳤다. 한창 공사 중이던 인부들은 곡괭이며 멜대, 광주리 등을 그대로 버린 채 언덕 위로 올라갔다. 물은 순식간에 두 구덩이를 가득 채워버렸다.
강흥본은 기쁜 나머지 얼른 강흥패를 찾아가 이 일을 알렸다. 강흥패가 와서 보니 동생이 정말로 우물을 파는 데 성공한지라 더는 분가하라고 하지 못했다. 그 후로 이 못의 물은 가뭄에도 마르는 법을 몰랐고, 아무리 장마가 져도 넘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강흥본이 우물을 판 후 보름이 지났을까. 웬 사람이 찾아와 멜대를 강흥본에게 바쳤다. 자신은 서해 바닷가에 사는 어부인데 해변에 떠다니는 멜대가 있기에 건져보니 "강흥본"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어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러 왔다는 것이었다. 서해바다는 이곳에서 150km나 되는데 어떻게 멜대가 그곳까지 갈 수 있었는지, 산성 안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못이 서해바다와 통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이 지하수로를 따라 용왕이 드나든다는 설화가 있어 이 못을 "용담"이라 불렀다고 한다.
더욱 신비로운 것은 가을에 낙엽이 지면 수면에 떠 있다가 이튿날 아침이면 못가로 밀려가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오물이 들어가기만 하면 못물이 끓어 번지면서 흰 거품이 생겼는데 그럴 때면 사흘 안에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렇듯 용담이 신비롭고 영험하다고 해서 "용담영이(龍潭靈異)"라는 이름으로 《중국민간문학집대성 요녕 분권》에 수록되었는데 "용담영이"는 복주(와방점의 옛 이름) 8경에 들어 있다.
득리사진(鎭)에서 용담산성으로 가는 길 어귀 동쪽 산 위에 탑 하나가 서있다. 이 탑이 바로 용담만의 신비로움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영이탑(靈異塔)이다. 산성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득리사진 쪽으로 탑이 세워져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강흥패, 강흥본 형제는 중국소설 《설인귀가 요동을 정벌하다(薛仁貴征東)》에 나오는 전설적 인물이다. 이 소설에 따르면 원래 강흥패, 강흥본 형제는 이경홍(李慶紅·산채의 우두머리)과 함께 봉화산 산채의 두령이었다. 이경홍이 한 번은 인근 마을 여염집 딸을 탐내 강흥패와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그 여인을 납치하러 갔다가 설인귀를 만났다. 그러나 설인귀와 맞붙자마자 첫 회합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를 본 강흥패가 이경홍을 구하기 위해 나섰지만 역시 같은 처지가 되고 만다. 설인귀는 이들 형제를 설득해 당나라에 귀순하도록 한다. 마침내 이들은 당군에 귀순하기로 하고 설인귀의 부하가 되어 이후 많은 싸움에서 공을 세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만 전설일 뿐 역사책에는 설인귀가 이곳을 비롯하여 요남지역에 왔다는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다. 대련의 비사성, 장하의 성산산성을 비롯하여 요남지역의 고구려성을 공격한 당군은 모름지기 장량이 이끄는 남로 수군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강흥패, 강흥본 형제가 산성을 축조한 후 설인귀가 성을 치러 왔는데 이들 형제는 산성을 더욱 높게 쌓으면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고 한다. 강흥패는 산성의 견고함을 믿고 자주 성 밖으로 나가 싸웠는데 한 번은 무예가 출중한 적장을 만나 싸우다가 몇 회합 만에 적장의 칼에 목이 떨어지고 만다. 이를 본 강흥본이 달려 나갔지만 역시 패하여 산성으로 철퇴하였다. 적군이 바싹 그 뒤를 쫓아 들어왔는데 용담만에 이른 강흥본이 용담만 중간을 가로지른 암로로 말을 달려 건너갔다. 뒤따르던 적군들이 못이 얕은 줄 알고 잇달아 못에 뛰어들었으나 모두 빠지고 만다. 적군은 강흥본이 무슨 요술이라도 부리는 줄 알고 더는 쫓아가지 않고 퇴각했다고 한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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