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kindSeq=1&writeDateChk=20120321 

<62>공성기의 전쟁
당나라 -포차 공격 ‘일진일퇴’ 고구려- 전루 방어 
2012.03.21

공성탑·당차 등 성 공격용 기계 총동원 요동성 해자 당군 시신들 늪으로 변해

고구려 요동성 남쪽에 위치한 사찰이었던 광우사. 후한대 건립돼 근 2000년 동안 중수와 폐사를 반복했다. 요동성 전투에 참전한 당태종의 부하 위지경덕(尉遲敬德)이 중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요동성 외곽의 물웅덩이들이 거의 다 메워지면서 당군의 공격은 본격화됐다. 북소리와 사람들의 함성과 절규가 메아리치는 가운데 전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됐다. 화살이 끊임없이 흐르는 가운데 날아간 수많은 돌이 연이어 성벽에 부딪쳤고, 성벽의 석재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반복됐으리라. 

고구려인들은 거대한 돌을 멀리 쏘는 당나라 투석기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실감했다. 20∼25㎏짜리 돌들을 300m 이상 날려 보냈다. 돌을 맞은 성벽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구당서’는 전한다. “우리에게 포차(抛車)가 있어 300근(?)의 돌을 1리(300보) 밖까지 날린다.” ‘무경절요’(武經節要)에서는 중국의 투석기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가로 놓인 축에 긴 장대의 중간 부분을 꿰어 돌릴 수 있게 하고 그 한쪽에 돌을 놓고 다른 쪽에는 줄을 매달아 여러 사람이 갑자기 잡아당겨서 돌을 날려 보내게 돼 있다.” 서양의 그것이 거대한 추를 달아 그 반동을 이용했다면 중국인들은 풍부한 인력을 투입했다. 기계적으로 볼 때 중국의 그것이 간단했고, 분해해 운반하기에도 좋았다. 

중국인들이 만든 이 기계는 초기에 복잡한 이론을 몰랐던 장인들이 감각적 솜씨에 의존해 만들었다. 장인들은 기하학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치수의 장치들을 제작할 수 있었다. 오랜 경험과 시행착오의 결과였다. 하지만 시대가 내려오면서 수학적 이론이 동원돼 성능이 획기적으로 향상됐다. 삼국지(三國志) 시대 위나라의 마균(馬鈞)이란 과학자의 실험 기록이 보일 정도다. 하지만 평화의 시기가 되면 그 기술은 잊어졌고 전란의 시대에 와서 다시 개발돼야 했다. 수나라 때의 투석기는 정교하고 거대했다. 과학 실험과 제작을 위한 표준적인 방법이 개발됐었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성능은 좋았다. 607년 고구려와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수양제는 우문개(宇文愷) 휘하에 기술자를 모아 공성기 제작에 전력을 투구했다. 그것도 모자라 서역에서 많은 기술자를 초청해 성능 향상을 위한 연구개발에 투입했다.

요동성민들은 중국 군대의 공성기 공격에 어느 정도 적응해 있었다. 613년 4월 수양제는 모든 종류의 그것을 동원해 요동성을 공격한 바 있었다. 발달된 수나라의 공성기도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공격 도중 수양제가 갑자기 철수했다. 수나라 내부에 양현감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장비는 그대로 남겨 뒀다. ‘삼국사기’는 당시 요동성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황제가 밤에 여러 장수를 몰래 불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군수품과 기계, 공격용 도구가 산처럼 쌓였고 보루와 장막이 그대로여서 움직이지 않았으나, 무리의 마음이 떨며 두려워져 다시 부서를 나눌 새도 없이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사는 이를 즉시 깨달았으나 감히 나가지 못하고 다만 성 안에서 북치고 고함을 지를 뿐이었다.”

요동성민들은 이제 수의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당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구당서’는 요동성의 고구려인들이 그에 대응하는 조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문을 듣고 매우 두려워한 나머지 성 위에 전루(戰樓)를 쌓아 날아드는 돌을 막았다.” 투석기로 인해 성벽이 계속 무너지자, 밧줄로 만든 그물을 치기도 했고 나무기둥을 두 겹으로 박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돌이 날아와도 무너지지 않게 했다. 석포가 성벽을 많이 훼손할수록 나무로 보강되는 부분이 많아졌다. 이는 나중에 재앙이 된다.

투석기가 포격하는 사이에 당군은 공성탑(攻城塔) 조립을 완료했다. 공성탑 높이는 요동성의 성벽보다 조금 높았다. 철판으로 외부를 보호하고 있어 고구려군의 직사화기 공격에도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이 그것을 알고 성벽 위에 목책을 올려 더 높은 전루를 쌓았다. 그것은 날아드는 돌의 방패이자 공성탑에 대항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군은 탑에서 활을 쏘아 고구려 궁수들을 견제해 엄호하는 사이 전투공병들을 투입시켜 중요한 포인트에 있는 성벽 밑 해자를 메우려 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전루가 더 높아 효과적인 엄호를 할 수 없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일부 몇 개 지점의 해자가 메워졌던 것 같다. 당군은 당차(撞車)를 내보냈다. 그것은 높은 공성탑 위에 철제로 보강된 뾰족하고 거대한 나무기둥이나, 날카롭게 가공된 파성추를 달았던 무기로 생각된다. 당군은 당차를 성벽에 바짝 붙여 전루들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구당서’는 이렇게 전한다. “당차로 밀어 누각을 때려 부수니 내려앉지 않은 누각이 없었다.” 중요한 지점에 있는 높은 누각들이 제거되자 당군이 공성탑들이 성벽을 향해 끊임없이 밀려왔다. 성벽에 바짝 붙은 공성탑의 문이 열리고 당나라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구려군들은 그들을 향해 화살을 쏟아부었고, 고슴도치가 돼 죽거나 부상당한 병사들이 성벽 아래 해자로 끊임없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밀려왔다. 당나라 병사들은 용감했다. ‘전당문’을 보면 당태종이 병사들을 이렇게 칭찬하고 있다. “(요동성의) 성가퀴가 높이 솟아 있고, 산이 무너져 내린 듯 가로막고 있지만 대단한 용기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용맹성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의 성벽은 호락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병사들이 그곳에 접근하기를 꺼리기 시작했다. 요동성의 성벽은 어디보다 높았고, 치가 발달돼 있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중국 병사가 요동성을 감싸고 있는 해자에서 매립작업을 하다가 전사했고, 공성탑에서 성벽으로 접근하다 떨어져 죽은 시신까지 그곳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당나라 군대에 포위된 요동성은 시신 더미에도 포위돼 있었다. 후텁지근한 여름에 파리가 끓었다. 벌판에 버려진 시신들도 이슬이나 비를 맡고 나면 그 썩은 시체에서 나오는 냄새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하다. 해자의 물에 떠서 부패해 가는 시체는 말할 것도 없었다. 퉁퉁 불은 시신들이 물 위에 겹겹이 떠 있었고, 이미 뼈가 드러난 상태에서 부패해 가는 살에 구더기가 버글버글 했으리라. 그 지옥과 같은 불길한 시체의 늪에 빠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죽는 것보다 참기 힘든 일이었다. ‘책부원구’는 당나라 군사들의 심리를 짤막하지만 압축적으로 전하고 있다. “해자에서 뼈가 구르고 있고(轉骨深溝), (병사들은) 그 도탄에 빠지는 것을 걱정했다(愍其塗炭).” 

요동성의 주몽신사 


고구려와 당의 전쟁터였던 요동성의 모형
 
요동에 있었다는 주몽신사(朱蒙神祠)에는 철제갑옷과 창이 봉안돼 있었다. 

이것들은 연나라(전연) 때부터 하늘이 내려준 영험 있는 신물(神物)이라 믿어져 제사지내 온 것이었다. 물론 신물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과 관련이 없었다. 400년께 고구려가 요동성을 차지하고 고구려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주몽신앙이 퍼지고 기존 신물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 그것을 주몽과 연관 지어 함께 주몽신사에 봉안해 숭배하게 됐다. 그것은 요동성 주민들의 고구려화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동성은 기원전 4~5세기에 중국인들이 건설한 도시였고, 그 뒤 여러 계통의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하게 됐다. 주몽신앙은 그들이 고구려인으로 융합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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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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