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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요동성 전투의 서전
요하 넘은 태종 돌아갈 길 막고 ‘배수진’
2012.03.07
첫 전투 패배한 당 선발대 황제 보호하려 공세 장검의 유목민 기병도 건안성 공격 않고 합류
요하 본류 모습. 이 강만 건너면 고구려다. 요하의 강폭은 광대하다.
전열을 가다듬은 고구려 군대는 만만치 않았다. 고구려군 4만 병력에 의해 행군총관(行軍總管) 장군예(張君乂)가 이끄는 당군의 주력 가운데 하나가 궤멸됐다. 당군의 수뇌부가 즉각 작전회의를 열었다. 타격을 입은 당군은 반격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자치통감’을 보자. “군중에서는 모두가 무리가 적고 떨어져서 매달려 있는 상태이니, 깊이 해자를 파고 성루를 높게 쌓고 (당 태종의) 거가(駕)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
수뇌부 일각에서는 고구려 군대에 겁을 먹고 임시로 해자와 목책을 만들어 고구려 군대가 가고자 하는 길목을 막고 기다리는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도종이 정면으로 반대했다. 토목공사를 진행시킬 수 있는 여력은 있었다. 그렇게 수세적으로 나오다가 방어벽이 뚫려 이제 막 요하의 동쪽 본류를 도하하려는 당태종의 본대를 고구려군이 덮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치통감’은 당시 논의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도종이 말했다. 도적들(고구려군을 의미)은 무리가 많다는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멀리서 와서 피곤하지만 이들을 쳐서 반드시 패배시킬 것이다. 또 우리들은 선봉부대이니 마땅히 길을 깨끗이 해 놓고 (당 태종의) 승여(乘輿)를 맞이해야 마땅한데 도적들을 군부(君父: 당태종)에게 남겨둘 것인가? 이세적도 그렇게 생각했다.”
당군의 모든 작전은 황제의 안전을 위해 기획되고 실행됐다. 방어가 아니라 공격 쪽으로 가닥이 잡히자, 회의 석상 한참 뒤에 앉아 있던 과의(果毅) 마문거(馬文擧)라는 시골 무장이 외쳤다. “적군을 만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장사(壯士)임을 드러내겠는가?” 과의는 평시에는 농업에 종사하고 전시에는 군복무에 임하는 당나라 부병제도(府兵制度)하의 관직이다. 지방의 절충부(折衝府) 소속 무관직으로 현재 북한의 ‘노동적위대’의 군관과 비슷한 개념으로 보면 되겠다. 마문거는 그날을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한 기회로 삼고 휘하의 소수 기병을 이끌고 나갔다. 분위기 전환을 위한 이벤트와 같았다. 고구려 측에서도 소수의 기병을 내보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마문거는 고구려의 기병을 보이는 족족 쓰러트렸다. 그러자 겁에 질려 있던 당군의 분위기가 호전됐다. ‘자치통감’은 상황을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마문거가) 말에 채찍을 치며 적을 향해 달려가는데 가는 곳에서 모두가 쓰러지니 (당군)무리들의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이제 이도종의 차례였다. 흩어진 자신의 기병들을 모은 그는 높은 곳에 올라가 고구려 군대의 진지를 관찰했다. 어느 곳이 약점인지 정확히 파악한 후 진격했다. 대열을 지은 고구려 군대의 수많은 진(陣)과 진 사이로 들어가 들락날락하며, 집중력을 흩쳐 놓았다. 고구려 기병도 이도종의 기병을 잡기 위해 움직였지만 손발이 맞지 않았다. 그러자 이세적이 기병을 이끌고 나타나 고구려 군대를 급습했다. 여기서 고구려군 1000명이 전사했고, 공세의 맥이 끊어졌다. 대열을 정비하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났다. 당군이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이후 요동성 앞에서 고구려 구원군과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2일 후 당태종의 본대가 도착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단정할 수 없다. 황제의 본대가 강을 도하하는 하루 48시간은 전세가 뒤집어질 수 있을 만큼 매우 위험하고도 긴 시간이었다.
황제가 오자 당군도 고구려에 주둔한 가용병력을 모두 요동성 부근에 집중시켰다. ‘책부원구’를 보면 요동성 남·서남쪽 공방전에 행군총관 장검(張儉)이 참전했던 기록이 보인다. 그는 앞서 4월 초에 유목민 수령들과 휘하 기병단을 이끌고 요하의 하류를 도하해 건안성 공략에 투입됐다. 1개월 후 황제가 요택을 건너 요동성 쪽으로 오자, 그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요동성으로 왔던 것이 확실하다.
장검의 기병대 규모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책부원구’는 요동성 전투에서 그는 거란·말갈·해(奚)·습(飁) 등의 유목민 기병을 휘하에 둔 것을 기록하고 있다. 4개의 부족에서 대병력을 동원했고, 장검은 1만을 거느릴 수 있는 행군총관이었다. 장금의 자체병력과 그에 상당하는 규모의 초원출신 기병들은 강력한 전력이었다. 4만의 고구려 군대는 그들의 견제를 받아 요동성 부근을 다시 공격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장검의 기병대 등장의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당군도 그에 맞먹는 대가를 지불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1개월 동안 장검의 부대에 포위됐던 고구려의 건안성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요하 입구에 위치한 그 요새가 버티고 있는 것은 향후 당군의 수로보급에 치명상을 남겼다. 연개소문의 예감은 적중했다. 물론 당 군부의 수뇌부들도 그러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4만 원군이 요동성 부근에 육박한 이상 멀리 내다볼 여유도 없었으리라. 당장 황제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다.
한편 645년 5월 8일 당태종은 고구려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턱인 요하의 본류 교량건설 현장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첫 패배의 소식을 들은 당태종은 불안해졌다. 연개소문이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 타이밍에 고구려 기병의 급습을 받는다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마침 요하의 물 수위가 3척(尺)이나 내려가 교량의 길이가 짧아졌고, 다리의 높이도 내려갔다. 그 만큼의 자재, 인력 투여량, 건설 시간 등이 감소됐다. 요택을 지나온 군대가 본격적으로 밀려오기 전에 교량은 완성될 터였다. 하지만 요하의 강폭과 펄은 한없이 넓게 보였다. 당태종의 불안은 어찌할 수 없었다. 불안의 근원에 맞서는 인상 깊은 의식을 치러야 했다.
9일 교량이 준공됨과 동시에 길게 줄을 선 당군 6만이 질서 있게 강을 건넜다. 다리가 땅과 이어지는 광활한 진펄에 수없이 많은 버드나무로 만든 카펫 같은 깔개가 깔렸고, 가장 먼저 건너온 부대가 교량 입구 주변에 철통같은 대열을 갖췄으리라. 인간 방어망이 형성된 가운데 후속부대가 지속적으로 다리를 건너왔다. 10일 도하가 완료되자 당태종은 전 병사를 다리를 바라 볼 수 있는 위치에 도열시키고 다리를 철거시켰다. “이제 고구려 땅이오. 돌아갈 다리가 없소.” 당태종은 병사들 마음에 남은 미련을 끊었다. 승리하지 못하면 고구려 땅이 그들의 무덤이 될 터였다. ‘책부원구’는 “교량을 철거시킴으로써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했다”라고 했다.
연암 박지원이 설명하는 요동성
178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연암 박지원은 요동을 지나가면서 요동성의 연혁에 대한 아래와 같은 설명을 남겼다.“고구려의 요동성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요동벌 중간에 있다. 원래 기자 조선의 땅이었다. 중국 전국시대(BC 5세기-221) 7웅 중 하나인 연(燕)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이곳을 차지한 후 양평(襄平)성을 축조하고 요동군부(遼東郡府)의 중심지로 삼았다. 서한(西漢) 왕망(王莽) 시기에 이 성을 창평(昌平)성으로 고친 적이 있지만, 이후 600년 동안 양평성으로 불려왔다. 404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후 그 성을 요동성이라 불렀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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