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71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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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주한 당태종 "요택 늪지대에서 내 명 다하나보다" 탄식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56>
요동의 천연수호자 요택 ②
중부일보 2011.03.14 남도일보 2013.02.27 15:10
중부일보 2011.03.14 남도일보 2013.02.27 15:10
고대의 요택과 흡사한 반금의 소택지에 갈대밭이 수많은 섬을 이루고 있다.
고구려 정벌 나선 당태종 “요택 늪서 내 명 다하나…”
악몽과 같은 10여일 여정…군사 절반 이상 잃고 탄식만
“가을과 여름 모기떼 극성으로 소와 말도 지나갈 수 없어”
“인가 드물고 사방 둘러보면 오로지 갈대소리뿐”기록도
요택지역의 교통은 몹시 어려웠다. 당시 이 지역은 여름과 가을, 즉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을 제외하고는 통행이 가능했다. 얼음이 얼어붙는 겨울에 특히 그랬다. 그러나 도처에 하천, 호수, 늪과 수렁이 널려 있는 소택지의 교통이 매우 곤란하다. 요서의 북진에서 요동의 중심도시 요양(고구려의 요동성)으로 질러가는 것이 요택을 건너는 가장 가까운 길이라 하지만 남북으로 흐르는 요하강과 그 많은 지류들, 그리고 그 넓은 소택지가 가로놓인 요택을 건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당시 요서에서 요동으로 갈 때, 대부분은 요택의 소택지를 피하여 그 남쪽이나 북쪽으로 돌아갔는데, 그러자니 거리가 너무 멀어지게 되어 애로와 고생을 곱절로 겪어야 했다.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 요서에서 요택을 돌아서 요동성(요양)으로 가는 남로와 북로가 이미 형성되었는데, 북로는 너무 멀어 남로가 주요 교통간선으로 이용되었다. 이 두 노선은 구체적으로 이러하다. 남로는 무려현(無慮縣, 현재 북진)에서 출발하여 소택지 남부 변두리를 따라 옛 험독현(險瀆縣, 치소는 현재 대안현 동남쪽의 손성자촌<孫城子村>에 있음)을 거쳐 동남으로 요하강을 건넌 다음 동북쪽으로 요동성에 이른다. 북로는 무려현에서 출발하여 도중에 망평현(치소는 현재 신민 전당포진 대고성자촌<前當鋪鎭大古城子村>)을 지나 옛 현토군(현재 무순시내)에 도착한 다음 후성(侯城, 현재 심양 옛 성터)을 거쳐 남쪽으로 요동성에 이른다.
옛날에 요택지역은 또 생태환경이 열악하여 인가가 드물다. 모기떼가 하늘을 가리고 수해가 엄중하며 길이 질고 발이 빠져 통행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북송(北宋)의 허항종(許亢宗)이 사신(使臣)으로 금나라에 다녀온 뒤 <봉사행정록>에 요택을 지날 때의 견문을 이렇게 써 놓았다. “가을과 여름철에 모기떼가 욱실거려 밤이나 낮이나 소와 말이 이곳을 지나지 못했다. 행인은 저마다 두껍게 옷을 입고 가슴과 배를 또 옷으로 둘러싸야 했다. 앉아서 숙대를 태워 연기를 피우니 좀 괜찮았다. 무(務, 양어무<梁魚務>를 가리킴, 위치는 현재 흑산현 강둔진 토성자<姜屯鎭土城子>)라는 마을은 (요택 변두리에 있는) 물가에 터를 잡았는데 수십 인가가 그 물을 둘러싸고 있었다.” 양어무는 요나라와 금나라시기 요택 서부지역에서 비교적 큰 마을에 속했다. 그래도 수십 집밖에 안 되니 요택 안의 인가는 더욱 드물고 허허벌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 만력 말기(萬歷末年)에 이르러 하요하평원은 “수해가 많아 역참(驛堡)과 돈대를 빼놓고는 인가가 아주 드물어 사방으로 바라보면 연기 나는 곳이라곤 없는데 오로지 갈대들이 바람에 서로 비비적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고 한다. 만력 38년(기원 1610년) 6월에 조선의 사신 황세우(黃世祐)가 북경으로 가는 길에 요택을 지났는데 그가 쓴 <조천록(朝天錄)>에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24일, “(삼차하를 지나니) 평원의 광야에 갈대가 하늘 끝까지 이어져 있다. 바라보니 바다와 같았다. 수백 리 안에 산이라곤 보이지 않고 주먹만 한 돌과 막대기 같은 나무 한 그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하늘을 가릴 듯한 모기떼들이 욱실거리며 달려들어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행역의 고생이 극한에 다다랐다”… 25일, “아침에 출발했는데 모기떼의 성화에 못 이겨 평양포(平洋鋪)에 피신하였다가 저녁에 모기들이 잠잘 때 떠나려고 고평(高平)에 머물게 되었다. 고평과 반산 사이에 수해가 그렇게 심하다고 들었다. 뜻밖의 모기떼들이 이렇게도 사람을 못살게 구니… 당나귀도 온몸에 피를 흘리며 놀라서 공중으로 뛰어오르다가 땅바닥에 쓰러지곤 했다.”
요택은 이렇게 험하고 짓궂은 곳이라서 예부터 부동한 정치세력과 민족 사이의 지리분계선과 모순의 완충(緩沖)지대가 되었다. 고구려는 이런 천험을 충분히 이용하여 요택의 남북 교통선을 중점으로 경계하며 서부변경의 최전방인 요하강 동안(東岸)을 지켜냈다. 그리고 영류왕시기에 이르러 또 하요하 동안의 최남단에서부터 남북으로 천리장성을 쌓아 요동지역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고구려는 이렇게 요택, 요하와 천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수나라나 당나라와 대치하고 있었다.
어떠한 천험이라도 공략자의 발길을 묶어 놓지는 못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선후로 10차례나 고구려를 정벌했다. 이 기간 요택을 넘어가는 길도 더 트였다.
기원 611년, 수양제의 대군이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간 노선은 회원진(현재 북진)에서 출발한 다음 두 갈래로 나뉘어 요동성을 향해 진군했다. 한 갈래는 요택 북쪽의 무려라(현재 신민 요빈탑 지역) 부근에서 요하강을 건너 신성과 현토성을 거쳐 요동성에 이르게 하고, 다른 한 갈래는 회원진 동쪽으로 요택을 가로 넘은 후에 부교(浮橋)를 놓아 요하강을 건너서 곧바로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기원 645년, 당태종이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회원진에 이르러 군사들을 3개 노선으로 나뉘어 제각기 진군하도록 했다. 북로(北路)는 이세적이 거느리고 회원진에서 북쪽으로 출발하여 요빈탑지역(수나라 초기 고구려의 무려라성이 이곳에 있었음)에 이르러 거기서 요하강을 건넌 다음 현토성(그때 이미 심양 동남쪽으로 옮겨 옴)과 개모성(蓋牟城, 현재 심양 남쪽 탑산산성)을 무너뜨리고 요동성 공성전에 참여했다. 이 코스는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요택 북쪽으로 돌아가 요동성으로 진군한 코스와 기본상 같다. 중로(中路)는 당태종이 친히 군사들을 거느리고 회원진에서 동남쪽으로 요택을 가로 지나 요하강을 건넌 다음 요동성 서남쪽의 마수산(현재 수산<首山>)에 어영을 치고 머무르면서 요동성 공성전투를 지도하였다. 이 코스는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부교를 놓고 요하강을 건너 직접 요동성을 공격한 코스와 같다. 남로는 장검(張儉)이 군사들을 이끌며 회원진에서 요택 남쪽의 삼차하에 이르러 요하강을 건너 건안성(현재 개주<蓋州> 청석령 동쪽의 고려성산성)을 점령하여 현재 해성남쪽 영성자에 있는 안시성의 후미를 두드렸다. 이 코스는 수나라 이전 하요하평원 남부의 동서방향으로 난 교통주간선 노선이다.
요택을 가로 건너려면 상상치도 못할 애로와 고생, 심지어 죽음의 시련도 겪어야 했다. 이는 한국작가 유현종(劉賢鐘)이 쓴 소설 <연개소문>(동아일보에 연재)의 관련 내용, 즉 기원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직접 대군을 이끌고 요택을 건넌 과정과 그가 요동성을 공략한 후 안시성 전역에서 실패하여 철군하며 재차 요택을 건너온 과정을 서술한 데서 생동하게 구현되었다.
이 소설은 당태종이 처음에 요택을 건넌 상황을 이렇게 서술하였다(발췌, 아래도 같음).
―드디어 태종의 30만 대군은 임유관(臨楡關, 즉 산해관)을 나와 요서의 평야지로 진군했다. “늪지대가 나타났습니다.” “늪지대? 이 근처가 어디냐?” “요택인가 하옵니다.” “요택? 으음, 그럼 유명한 그 늪지대에 다다랐던 말인가?” “예.” 요택이라면 지금의 발수(渤水) 근처이다. 요동으로 가려면 요택의 늪지대를 통과해야만 한다. 지반이 약하고 땅이 낮아 수렁이 많았다. 어떤 곳은 발목까지 빠지고, 어떤 곳은 무릎까지 빠지는 곳도 있었다. 이러한 늪이 십리에 뻗쳐있는 것도 아니고 장장 200여리나 펼쳐져 있다. 200리 늪지대를 통과하지 않고는 요동을 공격할 수 없다. 당태종은 이미 요택의 통과를 예상하고 소감(少監) 구행엄을 시켜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이다. “수레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모든 장비는 수레에 얹어라.” 태종의 명이 떨어졌다. 늪지대를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준비된 수레바퀴가 있었다. 그걸 구행암이 만들었던 것이다. 대군은 준비를 마치자 별다른 곤란을 느끼지 않고 늪지대를 통과하게 되었다.(중국의 강유동<姜維東>이 쓴 <당여전쟁사(唐麗戰爭史)>에는 그 당시 당나라의 유명한 건축전문가이며 장작대장<將作大將>인 염립덕<閻立德>이 군사들을 데리고 질척한 곳은 흙으로 깔고 물이 고인 곳에는 임시 다리를 놓으며 요택을 건넜다고 한다--필자) “저게 무엇이냐?” 길도 없는 잡초 속에 해골과 뼈다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봉에 서서 헤쳐 가던 군사들이 전율을 느끼며 겁이 나는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본다. “왜 이렇게 행군속도가 느려지는 거냐?” 태종이 짜증을 냈다. “폐하,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도처에 해골이 나뒹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천구가 넘는다 하옵니다.” 그 소리에 태종은 수레를 멈추게 하고 내려섰다. 아닌 게 아니라 잡초가 우거진 곳마다 수십개, 혹은 수백개의 해골이 산재해 있었다...(그것은 고·수전쟁 때 수양제를 따라 참전했다가 회군도중에 요택에서 죽은 수나라병사들의 것이다--필자) 태종은 곧 제주가 되어 위령제를 올렸다… 제사가 끝나고 요택의 늪지대를 벗어나자 태종은 군사를 분산했다….
갈꽃이 흩날리는 반금늪지의 황혼무렵
갈꽃이 흩날리는 반금늪지의 황혼무렵
소설 <연개소문>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철군하며 요택을 다시 건너온 과정은 이렇게 묘사하였다.
죽음의 행진이었다. 장장 200여 리나 되는(사실 사서의 기록에는 그 당시 80리로 되었다고 한다--필자) 요택의 늪지대는 입을 벌리고 누워있는 사신(死神)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6만5천의 당군은 앞으로 나아갔지만 평탄한 평지는 나서질 않고 살얼음이 덮여있는 진흙구덩이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목을 쳐 날리며 채찍을 휘둘러도 진눈깨비로 범벅된 흙구덩이로 들어간 군사들은 기진맥진하여 쓰러진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한꺼번에 수십명, 혹은 수백명이 낙오자가 된 채 쓰러지는 판이었다. ‘아아, 요택, 요택의 늪지대에서 내 명이 다하나보다.’ 태종은 하늘을 보며 탄식을 했다. 30여 년 동안 별별스런 전지(戰地)를 다 누벼봤지만 이런 곤욕을 당하고 사경을 헤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모든 장비와 병장기를 버려라, 되도록 행장(行裝)을 가볍게 하라.” 병장기나 배낭 등이 무거워 더 움직이지 못하는 듯해서 그렇게 명령을 내렸지만 군사들은 마찬가지였다. 숙영을 하고 휴식을 취한 뒤에 출발하면 좀 나을 줄 알았지만 낙오자는 더 많이 생기는 것이었다… 벌써 요택의 늪지대에 들어선 지도 닷새가 지나고 있었다… 태종은 드디어 엿새째 되던 날 마상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황급히 태종을 마상에서 끌어내어 온량거 안에 눕혔다… 과로로 쓰러졌다가 일어난 태종의 얼굴도 비참할 정도로 창백했지만 전군의 병사들은 말이 아니었다. 동상에 걸려 다리를 저는 자가 태반이었고 그나마 성한 자들은 며칠씩 굶은 사람처럼 어깨가 오그라들어 있었다… 태종은 눈물을 뿌렸다. 요동성을 떠날 때만 해도 6만5천의 병력이었는데 지금 남아있는 군사는 채 3만이 못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요택의 늪지대에 들어 군사의 절반을 죽이고 만 셈이었던 것이다… 대체 하늘은 어쩌자고 얼굴을 펴지 못하는지 날마다 찌푸렸고 진눈깨비를 퍼붓지 않으면 싸락눈을 날리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고 난 태종은 침침하게 가라앉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늪지대의 사방에 산재해 있던 뼈다귀들, 그 많은 해골들을 본 곳이 바로 이 늪지대의 중간이란 포구(蒲溝)지방이 아니던가? 그 해골들은 수양제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러 떠났던 군사들의 것이었다. ‘아, 또다시 나는 양제처럼 수많은 장졸들을 요택의 해골로 남기게 되었구나.’ 그의 눈에서는 계속하여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아, 힘을 내라, 잡초를 베어 수렁을 메우고 잡목을 베어 도랑을 메워라. 이삼 일만 견디면 이곳을 벗어나게 된다. 전군은 힘을 내라!” 태종은 자신에게 타이르듯 군사들을 향하여 외쳤다. 그는 손수 군마에서 내려 낫을 들고 잡초를 베어 수렁을 메우고 수레를 통과시켰다. 전군은 마지막 힘을 다 내어 작업을 서둘렀다. 그러나 하늘은 이들의 노력을 두고 보지 않았다. 바람이 거세어지더니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눈보라는 말이고 사람이고 완전히 덮어버릴 듯이 퍼부어 댔다. 이젠 사람이 쓰러지는 게 아니라 군마들이 버티지 못하고 눈 덮인 진구렁에 퍽퍽 쓰러져 갔다…(당태종과 그의 군사들은 이렇게 10여 일 동안의 갖은 시련과 고생 끝에 요택을 건너오게 되었다-필자)―
<연개소문>에서 발췌한 위 내용은 소설이라서 역사적 사실과 그 구체적인 상황이 완전히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같은 역사사실을 기록해 놓은 <자치통감>의 관련내용과 대조해 본다면 당태종이 열흘 남짓 요택을 지나온 사실은 일치하여 진실성이 있어 보인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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