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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성지(遼東城址)
요동성지(遼東城址)로 비정되는 요양시(遼陽市) 일대는 태자하 서안(太子河 西岸)의 충적평지에 해당된다. 서북쪽으로는 요동평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동남쪽으로는 구릉성 평지가 전개되다가 천산산맥(千山山脈)의 고산준령이 나타난다. 요동시(遼東市) 일대는 요동평원~천산산맥의 점이지대로서 예로부터 요동평원을 따라 요동반도와 혼하 방면뿐 아니라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나아가는 육상교통로가 발달하였다. 아울러 신민~심양(新民~瀋陽)의 북로(北路), 태안~안산(台安~鞍山)의 중로(中路), 반산~고평~해성(盤山~高平~海城)의 남로(南路) 등 세 갈래의 요하 도하로(渡河路)가 모이는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태자하(太子河)와 요하의 수로를 통해 요동만(遼東灣)을 거쳐 서해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요양시 일대는 육상과 수로 교통의 요충지로서 전국시대 이래 요동지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현재 태자하는 요양시 동남쪽에서 방향을 꺾어 시가지 동쪽을 따라 북류하다가 동북쪽 근교에서 다시 방향을 꺾어 서류하고 있다. 그런데 238년 조위군(曺魏軍)이 공손씨(公孫氏)를 공격하던 전황을 보면 무려 한 달간이나 장마비가 내려 태자하의 강물이 양평성(襄平城) 아래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따라서 3세기 중반의 양평성(襄平城)이 현재의 요양시가지 일대라면 당시 태자하의 유로는 현재와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동성지는 전국시대~진대에는 ‘양평(襄平)’, 요대~명대에는 ‘요양(遼陽)’으로 불렸던 요양시일대로서 청이 흥기하여 지금의 심양(瀋陽)을 성경(盛京)으로 삼기 이전까지 요동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요동지(遼東志)』를 비롯하여 명청대에 편찬된 『전요지(全遼志)』, 『요양주지(遼陽州志)』 등의 각종 지지(地誌)에 관련 지도와 기록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20세기 전반에 요동시 중심부와 그 부분에서 전국시대~한대의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1945년 이후에는 요양시 북쪽 근교의 삼도호촌(三道壕村)에서 한대(漢代) 주거지․도로․가마터․벽화묘․옹관묘를 발굴한 것을 비롯하여 동북쪽 4km의 봉태자(棒台子)에서 한위대(漢魏代)의 벽화묘 북쪽 상왕가촌(上王家村)에서 진대 벽화묘, 북쪽 북원(北園)에서 조위대(曺魏代)의 벽화묘, 동남쪽 아방촌(鵝房村)에서 조위대 벽화묘 그리고 요양구성 동벽 남단의 아래쪽에서 한대 벽화묘 등을 발굴하였다. 그리고 요양시 주변에서 전국시대 화폐도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요양시 구성구(舊城區) 북부에서 고구려 시기의 유물이 상당히 발견되었다고 하며, 1992년에는 심양시 중심로를 개설하다가 세과사소학교(稅課司小學校) 동쪽에서 고구려 시기의 석실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현재 고구려 요동성지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53년 3월 평남 순천군 룡봉리 대동강변에서 발견된 요동성총(遼東城塚)의 성곽도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그려볼 따름이다. 요동성총은 두 개의 널길, 좌우 곁방이 달린 앞방, 4개의 널방 등으로 이루어진 여러 방 무덤으로 평면구조상 요양삼도호(遼陽三道壕) 1호분 등 요동지역에 분포하는 위․진대(魏․晋代)의 봉토석실묘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에 요동성총의 조영 시기는 대략 4세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그러나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시기는 대략 4세기 말~5세기 초경이며, <광개토왕릉비>의 ‘양평도(襄平道)’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처음에는 ‘양평(襄平)’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요동성(遼東城)’으로 개칭하였다. 따라서 ‘요도성’이라는 명문이 명확히 기재된 만큼 요동성총의 성곽도는 5세기 전반에 그려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요동성총이 5세기 전반에 처음 조영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령 여러 차례에 걸쳐 시신을 안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도호 서진(三道壕 西晉) 석실묘의 사례를 본다면, 요동성총도 4세기 후반에 처음 조영되어 5세기 전반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시신을 매장하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미루어 요동성총의 성곽도는 고구려가 종전의 양평성(襄平城)을 전용(轉用)하던 모습 또는 이를 개축하여 사용하던 양상을 보여준다고 파악된다.
요동성(遼東城)은 본래 전국시대에 처음 설치한 연(燕)나라 요동군(遼東郡)의 치소(治所)로서 양평(襄平)이라 불렀다. 그 이후 진․한대에도 ‘양평’에는 요동군의 치소가 두어졌는데, 왕망(王莽)이 신대(新代)에 일시적으로 창평(昌平)으로 개칭되기도 하였다. 2세기 말경에는 공손씨(公孫氏) 세력이 흥기하여 양평을 중심으로 요동․요서는 물론 바다 건너 산동지역까지 장악하여 세력을 떨쳤으며 238년에 다시 중국 군현으로 편입되었다. 이처럼 양평은 전국시대 이래 3세기 말까지 중국세력이 동방으로 진출하는 가장 중요한 전초기지였다. 요동성은 4세기 말~5세기 초 고구려 영토로 편입된 이후 ‘양평’으로 불리다가 점차 요동성으로 칭해졌다. 요동성은 5세기~7세기경 요동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성이었고, 요동지역 육상․수로 교통의 중심지로서 사방으로 뻗은 교통로와 세 갈래 요하 도하로(遼河 渡河路)의 집결지점이며, 요동평원~압록강로의 세 루트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본계~봉성로(本溪~鳳城路)의 출발지점이기도 하다. 요동성은 비록 평지성이지만 다른 고구려성과 마찬가지로 지방지배의 거점이자 군사중진이라는 이중적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에 당(唐)도 645년 고구려를 침공하여 요동성을 함락시킨 다음 ‘요주(遼州)’를 설치하였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에는 요동주도독부(遼東州都督府)를 설치하여 요동일대를 지배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676년에는 평양성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치소를 요동성으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신성(新城-撫順 高爾山城)으로 이치하였다. 그 뒤 요동성 일대는 고구려유민 부흥운동의 거점이 되었으며, 9세기 초에는 발해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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