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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의 성립
[아틀라스 한국사], 사계절 출판사
한성백제의 성립
백제는 마한 지역의 소국 가운데 하나로 시작되었다. 청동기 시대부터 한반도 북방에서 많은 유이민이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백제도 이러한 부여,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이 세운 나라였다. 백제 건국 설화에 따르면 비류와 온조가 남으로 무리를 이끌고 내려와 각각 미추홀(지금의 인천)과 위례(지금의 서울)에 자리잡았다가 뒤에 비류가 온조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는 기원 전후 무렵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이주한 집단이 연합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미추홀 집단이 우세하였다가 뒤에는 위례 집단이 강성해져 중심 세력이 된 것으로 해석된다. 비류와 온조라는 형제 설화는 연맹체 안의 주도권 변동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것이며, 온조보다 먼저 남하한 비류 세력을 통합하고 마한의 여러 소국을 정복하면서 국가로 발전해 간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백제 왕족의 성이 부여씨이고,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식 무덤인 돌무지 무덤이 발견된 것에서도 건국 설화가 역사적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나라를 세운 뒤 백제는 주변 소국을 아우르면서 마한 전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한강 유역은 한반도 중서부의 요지인데다 넓고 기름진 땅과 바다로 진출하기에 편리한 하천과 해안이 있었다. 농경지가 많아 식량이 풍부하고, 산간 지방에는 무기와 농기구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철이 많이 있어 군대를 기르고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건이었다.
백제 사람들은 기원 전후에 쇠로 만든 농기구를 이용하여 한강 유역에서 벼농사를 지으면서 곡물 생산을 늘려 나갔다. 이에 힘입어 백제는 먼저 마한의 예속에서 벗어나려 싸웠으며, 마한의 중심인 목지국을 정복하였다. 1세기 후반에 다시 마한 지역으로 진출한 백제는 동북 방면에 있던 말갈과 북쪽 낙랑 세력의 계속되는 침략을 잘 막아 내면서 세력을 넓혀 갔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와도 겨루면서 2세기 무렵에는 상당히 강성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하여 3세기 후반에는 북쪽으로는 예성강, 동쪽으로는 지금의 춘천, 남쪽으로는 공주, 서쪽으로는 서해안 지역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백제는 3세기 후반 고이왕 때 넓어진 영토와 새로 편입된 백성을 효과적으로 지배, 통제하였고 통치 조직을 보강하였다. 이때 6좌평과 16등급의 관직 체계를 만들어 지방의 세력을 중앙의 귀족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국가의 공식 사무를 담당하는 관청도 새로 설치하여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강화하였다.
고이왕 때인 246년에는 대방 태수가 전사하는 큰 충돌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이후 중국 군현과의 대결에서 백제측이 우세하게 되었다. 이 같은 사정에는 중국 왕조 자체가 쇠락하고 있었던 점도 작용하였다.
이처럼 백제가 국가로 성장하는 데는 중국 군현과의 세력 관계와 마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아틀라스 한국사], 사계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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