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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백제의 신라 땅에 들어온 전연의 선비족 군대는 옛 지배층에게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물론 그것을 직접적으로 가르쳐주는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짐작을 할 순 있다.『삼국사기』「신라본기」를 펴고 신라와 “왜국”의 전쟁이 나오는 부분을 읽어보자.
“봄 2월에 왜국에서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했으나 딸이 이미 시집갔다고 하여 사절했다.”
―『삼국사기』「신라본기」흘해이사금 35년(서기 344년)조
“봄 정월에 강세康世를 이벌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에 왜왕에게 글을 보내어 국교를 단절했다.”
―『삼국사기』「신라본기」흘해이사금 36년(서기 345년)조
“왜병이 갑자기 풍도(風島)에 들이닥쳐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고, 또 금성으로 와서 포위하고 급히 쳤다. 왕이 군사를 내어 맞서 싸우려고 했으나 이벌찬 강세는 말했다. ‘적은 멀리서 왔으므로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가만히 두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왕은 옳게 여겨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적은 양식이 다 되어 물러가려 했다. 이에 강세에게 명하여 강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추격하여 그들이 달아나게 했다.”
―『삼국사기』「신라본기」흘해이사금 37년(서기 346년)조
우리는 이 기사들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신라가 왜왕(변한왕, 임나가라왕)의 청혼(담로관계 유지)을 거부할 정도로 강경하게 나간 까닭은 난데없이 나타난 “강한 기병” 때문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기병들의 우두머리가 ‘강세’라는 인물인데, 이 사람은 고구려가 전연군 패잔병에게 뚫린 지 3년 후에 흘해이사금에 의해 이벌찬(신라의 17관등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서열인 벼슬)으로 임명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344년 2월에 담로관계를 청산한다는 말은 그 직전에 내려왔다는 뜻이다. 신라로 내려오려면 반드시 고구려를 통과해야 한다. 그렇다면 342~343년간에 고구려가 뚫리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김상).” 그리고 역사기록대로라면, 그 “비상사태”는 서기 342년에 벌어전 고구려와 전연의 전쟁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내려온 시기는 서기 343년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신라 흘해이사금에게 높은 벼슬을 받으며 그의 명령을 따른다. 이는 이들이 군사력으로 옛 신라 땅을 점령하지 않고 ‘신라국(國)’에 망명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미추이사금이 내려올 때와는 달리 아무런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까닭은 흘해이사금대의 신라가 무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기 343년 바로 다음해인 서기 344년에 신라가 왜국(변한, 임나가야)의 청혼을 거부하고 그 다음해에는 “왜국 왕으로부터 국교를 단절하는 편지(『삼국사기』)”를 받으며 서기 346년에는 신라를 공격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정신이 총명해서 일을 처리함이 보통 사람보다 특이(『삼국사기』)”하다는 평가를 받은 흘해이사금이 망명자들을 이용해 삼한백제의 담로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고구려군에게 쫓겨서 돌아갈 길이 막힌 전연의 선비족과, 난데없이 들이닥친 외부인들이 망명한 군인(그들이 신라를 ‘점령’하지 않고 ‘망명’한 것은 당시 신라가 삼한백제의 일부였고, 삼한이 강한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외부인이 내부로 들어오려면 침공보다는 망명이 더 안전하고 확실하다)이라는 것을 안 망한 나라의 군주가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우리는 처음에는 선비족이 신라 왕실에 협력하여 둘 사이가 좋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제 좋았던 두 세력 간의 사이가 어떻게 나빠지는지 - 정확하게 말하자면 ‘손님’으로 왔던 선비족이 어떻게 ‘주인’이 되는지 -를 살펴보자.
강세의 쿠데타 - 석씨족이 밀려나다
강세는 사로국이 백제(담로)와 국교를 끊은(백제의 담로 체제에서 벗어난) 이듬해(서기 346년)에 쳐들어온 왜병(:백제군의 일부가 된 임나가야군)을 "강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뒤쫓아"(「신라본기」) 무찔렀다고 적혀 있는 점으로 보아 사로국에 들어온 선비족들의 지도자였을 것이며 원래는 왕우의 휘하에 있던 선비족 군인이었을 것이다. 이름이 중국식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당시 중국과 접촉했던 유목민족은 “중국식 성씨와 이름을 빌려 썼다(김상).” (예컨대 서기 4세기경 서진의 속국이었던 남흉노국의 선우였던 유연(劉淵)은 한 왕조의 왕성(王姓)이었던 유(劉)씨를 빌려 썼다)
(강세가 친 "적"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강세 자신의 말에 따르면 ― "멀리서" 신라 땅으로 건너왔다. 만약 지금의 부산에 있던 임나가야군만 신라를 쳤다면 적이 굳이 '먼' 곳에서 왔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왜병" 가운데에는 임나가야가 아닌 다른 담로국의 군대도 있었을 것이며 특히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백제 본국의 군대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가설이 옳다면 백제는 - 다른 담로국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으므로 - 신라국의 탈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애초에 싹을 잘라 버리려고 대군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러나 강세가 거느린 기병이 그들을 무찌르고 내쫓았으므로 이런 백제의 전략은 실패했고 선비족들은 자기네의 '공'을 내세우며 신라 안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을 것이다)
강세는 백제군을 무찌른 뒤 차츰 거만해져서 허약한 석씨족을 몰아내고 자신이 정권을 잡기로 한 듯하다.「신라본기」흘해이사금 조에는 "대궐의 우물물이 갑자기 솟아 넘쳤다."(흘해 이사금 39년, 서기 348년)
는 구절이 있는데, 우물이 흘러 넘치는 일은 ―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조의 기록에서도 할 수 있듯이 ― "대왕大王이 크게 일어날 징조"로 여겨졌으므로 이 구절은 백제의 담로국(:점령지)일 뿐이던 사로국이 백제의 지배를 뿌리치고 떨쳐 일어난 사건을 얘기하거나 사로국에 들어온 선비족이 사로국에서 정변을 일으킨 뒤 흘해이사금을 잡아가둔 일을 은유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흘해이사금이 세상을 떠난 뒤(서기 356년) 더 이상 석씨 임금이 나오지 않는 점, 그때부터 갑자기(!) 김씨 세습체제가 굳어지는 점, 흘해이사금이 세상을 떠나기 11년 전에 백제와 백제의 담로군(:"왜군")을 물리쳐서 더 이상 백제가 신라에 간섭할 수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으며
이 구절을 3년후(서기 350년) "황새가 월성 모퉁이에 새 집을 만들었다."(「신라본기」)는 구절과 견주어 보고 생각하면 의미는 더욱 뚜렷해진다.
(궁궐 "모퉁이에 새 집을 만들었다."는 말은 누군가가 궁전을 차지하고 자기가 살 곳을 새로 지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으며, 위에서 소개한 '우물물' 기사를 볼 때, 선비족이 정권을 손에 쥐고 월성을 차지한 뒤 궁궐을 새로 지은 사실을 은유했다고 봐야 한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인 흘해이사금은 원통함을 참지 못하고 선대인 유례이사금처럼 홧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서기 356년). - 이렇게 볼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우물물이 흘러넘칠 때나 황새가 궁궐 모퉁이에 새 집을 만들 때 죽지 않고, 그로부터 몇 해가 흐른 뒤에 죽기 때문이다 - 많은 석씨족이 이 때 죽임을 당하거나 자리에서 쫓겨났을 것이나, 일부는 배를 타고 달아나 선비족의 원수가 된 고구려로 달아났을 것이다.
이제 신라국 안에서 선비족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강세는 흘해이사금이 세상을 떠난 뒤, 새 왕이 되어 나라의 이름과 통치체제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모국 전연에게 버림받고, 고구려에 쫓겨 동남쪽으로 내려온 패잔병들이 한 작은 속국을 도와 백제군을 무찌른 뒤 나중에는 정권을 장악하고 새 나라를 새운 것이다.
이제 '사로국'과 '신라'를 이끌던 석씨들은 오랫동안 역사의 뒷편으로 퇴장하며, 강세의 후손들은 새 나라를 ― 고구려와 백제, 임나가야 사이에서 ― 힘겹게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낯선 땅'을 차지한 오만하고 사치스러운 지배자일 뿐이었으며, 그 자세를 버리고 '신라 사람'으로 거듭나려면 아직 14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보충 설명 : 함경도의 용성군과 고구려 땅으로 달아난 석씨족
『삼국유사』「탈해왕」조에 따르면, 탈해왕(탈해 이사금)의 출신지는 용성국(龍城國)이다. 따라서 한때 '용성(龍城)'이라고 불린 적이 있는 곳이나, 지금도 '용성'이라고 불리는 곳은 모두 석씨족이 경상북도로 건너오기 전에 살던 곳이라는 의심을 살 만하다.
그런데 함경남도 덕원(德源)만은 이런 '상식'을 벗어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덕원만에 사는 사람은 배를 타던가, 아니면 영동지방의 바닷가를 걸으면서 영일만(아진포)으로 갈 수 있는데, 이럴 경우 낙동강 서쪽에 자리잡은 가야와는 만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용성(龍城)'이라고 불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서기 2003년에 이홍직 박사가 엮은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 - 서기 1997년 민중서관民衆書館이 펴냄 - 에서 찾아낸 사실이다)
게다가 덕원만(영흥만[:원산만]의 일부임)을 '용성'으로 부른 때는 신라가 존재하던 시대다. 신라가 함경도를 정복한 시기는 서기 6세기인 진흥왕대이며, 이 때는 석씨가 아닌 김씨가 왕권을 손에 넣고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어째서 이곳이 '용성'으로 불렸을까?
굳이 설명하자면 아마 석씨족이 모(牟)씨족(경주김씨)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덕원만으로 달아났거나, 아니면 신라 진흥왕이 함경도 남부를 점령한 뒤 그곳에 석씨족을 옮겨 살게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신라의 진한시대 - 그러니까 석씨족이 삼한백제에 종속되어 있던 시절 - 에 건너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당시 함경남도는 고구려의 땅이었고 고구려와 삼한백제는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어느 가설이 옳은지를 가리기 전에, 먼저 덕원만이 어떤 곳인지부터 알아보자.
덕원만은 북쪽의 호도(虎島) 반도와 남쪽의 갈마(葛麻) 반도로 둘러싸여져 있고, 두 반도 사이의 바다에는 여도/웅도/신도/묘도 같은 많은 섬들이 있다. 일단 만 안으로 들어온 배는 수심이 깊고 파도가 잔잔한 만에서 푹 쉴 수 있다.
게다가 이곳에 닻을 내린 사람은 만 서쪽에 흐르는 영천천과 심포천에서 물을 마시고, 배에 실을 물을 채울 수도 있다. 만약 해양민족이 이곳에 자리잡으면 북쪽과 서쪽, 남쪽으로는 산줄기를 장벽삼아 적을 막고, 동쪽으로는 두 반도와 여러 섬에 기지를 두어 바다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을 수 있으니, 무역항이자 피난처로서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은 찾기 힘들다고 할 것이다.
모씨족은 사로국에 내려온 뒤 석씨족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게 되었을 텐데, 애써 무릎꿇린 해양민족을 다시 바닷가에 풀어주는 짓을 할 리가 있었을까? 그랬다간 해상무역을 하면서 다시 힘을 키운 석씨족이 독립을 선언하거나, 배를 타고 금성(경주)으로 쳐들어갈 수도 있는데 말이다.
(신라 왕실은 장보고가 죽은 뒤 청해진을 해체하고 그곳에서 일하던 뱃사람들을 내륙으로 끌고 갔음을 기억하라. 삼한백제가 신라인을 이주시킨 곳도 충청북도나, 익산 같은 내륙지방이지, 바닷가는 아니었다)
게다가 신라의 왕족이 된 모씨족은 석씨족의 기원지를 "다파나국(『삼국사기』「신라본기」)"이라고 적을 정도로 석씨족의 가계 전승을 챙기지 않았는데, 과연 덕원만을 석씨족의 옛 '고국'인 용성국으로 불렀는지도 의문스럽다(『삼국사기』「신라본기」 법흥왕조에도 나오듯이, 모씨족은 석씨족이 경주에 세운 나라의 이름인 '신라'와, 삼한백제가 붙인 이름인 '사로국'만 알고 있었지, '용성국'은 알지 못했다. 어느 나라의 이름을 모르면 그 이름을 쓸 수도 없다).
따라서 나는 덕원만이 '용성'으로 불린 까닭은 전자라고 판단하며, 고구려는 자신들의 땅을 유린하고 경상북도로 달아난 모씨족에 반감을 품었기 때문에 이들을 받아들였다는 추측을 덧붙인다.
(이들이 '용성'이라는 옛 이름을 다시 쓴 까닭은, - 마치 대한제국이 망하자 나라 밖으로 달아난 망명자들이 다시 '조선'이라는 옛 이름을 썼듯이[예 :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이나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 자신들의 나라인 신라가 망하자 신라를 세우기 전의 이름인 용성을 써 자신들이 '망명자'임을 기억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당시 삼한백제와 맞서 싸우고 경상북도 안의 반대세력을 억누르느라 바빴던 계림국은 이를 알았다 하더라도 고구려에게 따지지 못했을 것이다)
석씨족은 덕원만에 자리잡고 살면서 고구려의 동남쪽 바닷가를 지켰을 것이며, 석씨족 청년 가운데는 고구려의 수군에 입대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장기를 살려 고구려를 도왔고, 수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고구려는 이들을 '중요한 인적 자원'으로 여겨 보호하고 우대했을 것이다.
이들은 2세기 동안 고구려의 신민으로 살다가 신라가 함경남도를 점령하자 학살당했고, 그래서 오늘날에는 '용성'이라는 땅 이름을 빼고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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