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istopia.net/zbxe/index.php?mid=neo&document_srl=98149&page=3

『만주원류고』에 고구려사가 없는 까닭

만주족과 관련된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만약 만주족이 옛 고구려인과 발해인의 후손이라는 이론이 사실이라면, 왜 청나라의 군주가 편찬하라고 명령한 역사서(『만주원류고』)에는 고구려사가 독립된 항목으로 안 나오는 거야?”라고 묻는다.

 

실제로 내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만주원류고』를 쓴 사람들은『구당서』를 인용하면서도 “대조영은 원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다.”라는 구절을 “대조영은 처음에 영주에서 살았다.”로 고쳤고,『삼국지(三國志. 서진의 관리인 진수가 쓴 역사책을 일컫는다)』「읍루전」을 인용하면서도 “그 나라(읍루)는 배를 타고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 약탈을 곧잘 하므로, 이웃나라는 이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동이(東夷)들이 음식을 먹을 때는 거의 다 조두(俎豆)를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만은 그렇지를 못했고, 법도와 습속에 가장 기강이 없었다.”는 구절은 쏙 뺐다. 그리고 삼한과 백제와 신라의 역사는 독립된 항목으로 자세하게 다뤘지만,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는 독립된 항목으로 나오지 않고 스쳐 지나가듯이 나온다.

 

나는 몇 해 전부터 막연하게나마 ‘혹시 만주족이 자신들의 선조인 말갈족이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그래서『만주원류고』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대충 다룬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한 달 엿새 전(올해 1월 7일)에 산 책을 읽다가 내 생각과 일치하는 구절을 찾았다. 그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다.

 

“역사서에 기술된 고구려의 위용이 엄청나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서 장기간 존재했으니 중국 한족학자(漢族學者)들은 물론 만주족(滿洲族)에게 조차도 고구려 역사는 경외(敬畏)의 대상일 수도 있고 역사 콤플렉스의 대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건륭황제(이름은 ‘아이신교로 훙리’. ‘애신각라 홍력’은 만주어로는 ‘아이신교로 훙리’라고 읽는다. 아이신교로가 성씨고 훙리가 이름이다 - 옮긴이) 시절 간행된 흠정 만주원류고를 보면 고대국가중 유독 고구려는 빠져 있다. 청나라보다도 더 오래 길고 긴 세월동안 동아시아를 제패한 고구려를 역사의 강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고구려를 내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만주족의 조상인 말갈족이 고구려조(705년), 발해조(228년), 양조(兩朝), 약 933년간에 걸쳐 복속된 경험이 있으니 그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을 만하다(부여까지 합치면 그 기간은 더욱 늘어난다).

 

―『金朝使硏究』, 윤명수(尹明洙), 59쪽.

 

시계를 234년 전인 서기 1777년(아이신교로 훙리[이하 ‘훙리’로 부름]가『만주원류고』를 펴내라고 명령한 해)으로 돌려보자. 훙리의 명령을 받은 학자들(육비지陸費墀를 비롯한 한족 학자들)과 훙리 본인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만주원류고』를 쓸 때 서기 1777년 이전에 나온 거의 모든 중국 역사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학자들은 “초고가 완성되는 대로 미리 올려 황제께서 직접 읽어 보시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훙리 - 옮긴이)의 주도 아래에 만들어진 책(장진근張鎭根 선생의 설명. 이하 존칭 생략)”을 썼다. 쉽게 말해『만주원류고』는 한족 학자들이 옛날 중국 역사책들에서 ‘동이(東夷)’라는 항목으로 다루어진 모든 기록을 긁어모은 뒤, 그것을 정리해서 훙리에게 올리고, 만주족인 훙리의 ‘검열’을 통과한 내용만 살려서 엮은 책이다. 따라서 훙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절이나 글은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주원류고』자체가 “여진(女眞)의 각부의 명왕조에 대한 예속관계에 대하여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고, 특히 명조의 통치하에 있었던 건주삼위(建州三衛)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으며, 고증에 있어서도 착오와 부당한 곳이 있을 수 있다(장진근).” 그러니까 만약『만주원류고』에서 가장 왜곡된 부분을 찾으라면, 그 부분은 만주족이 다른 민족이나 나라에게 지배를 받은 부분, 그러니까 정치적/군사적인 부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그 다음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높은 부분은 만주족의 선조로 여겨지는 민족들을 부정적으로 다룬 부분이다).

 

당시 학자들은 만주족을 ‘숙신/읍루/물길/말갈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었고, 한국 역사책과 중국 역사책을 보면 그들은 부여/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고 적혀 있다.

 

― “(주몽은 - 옮긴이) 자기 땅의 경계가 말갈(靺鞨) 촌락과 잇따라 닿아 있었으므로 침략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이들을 물리치니 말갈은 두려워하여 복종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시조 동명성왕 1년 조(서기전 37년)

 

― “한(漢)나라가 세워진 뒤에 읍루는 부여에게 종속되었다.”

 

:『후한서』「읍루전」(서기 24년 이후?)

 

― “한(漢)나라 이래 부여에 소속되었다. 부여는 읍루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렸기 때문에 황초(서기 220년 ~ 서기 226년) 때 부여를 배반하였고, 부여는 여러 번 이들을 쳤다.”

 

:『삼국지』「읍루전」

 

― “(고구려가) 말갈을 핍박하여 ….”

 

:『수서』「고려전」에 실린 양견(楊堅. 수나라를 세운 사람. 시호 ‘수 문제’)의 편지

 

만약 이 구절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들의 후손인 만주족은『만주원류고』에서 이 구절들을 적극적으로 반박했어야 했다. 그런데 훙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는 만주족의 선조들이 부여와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훙리가 부끄러운 역사를 일부러 다루지 않았다는 가설에 힘을 실어준다. 훙리는 한족에게 차마 “우리는 사실 부여와 고구려에게 705년 동안 지배를 받았어. ‘말갈’로 알려진 대조영도 사실은 고구려 유민이야.”라고 말할 수 없었고(그랬다간 만주족의 위신에 금이 갈 테니 말이다), 주션족(여진족)이 금나라가 세워지기 전 고려 왕실에 저자세를 취한 적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으며, 훙리(만주족)의 신하인 한족 학자들은 만주족의 ‘조상’인 읍루족이 “배를 타고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 약탈을 곧잘 한다.”거나 읍루족이 “법도와 습속에 가장 기강이 없었다.”는 구절을 그대로 인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설령 인용하려고 했어도 훙리의 검열에 걸려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지배층의 체면과 위신 때문에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를 싣지 않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훙리가 한 일 (그러니까『만주원류고』에서 고구려사를 빼 버린 일)은 신라의 사관들이 삼한백제가 사로국(신라)을 무너뜨리고 담로로 삼은 사실을 일부러 빼 버린 일이나(나는 거칠부의『국사』나 제 2차 남북국시대에 나온 책인『구삼국사』에 이미 이렇게 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김부식은 그것들을 별 생각없이 다시 인용해서『삼국사기』를 썼다), 가야의 사관들이 삼한백제가 가야 연방을 무너뜨리고 담로로 삼은 나머지 대가락(남가야)의 왕통이 끊어진 사실을 감춘 일(그러니까『가락국기』의 원 사료부터가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과 비슷하다. 결국 다른 역사서와 마찬가지로『만주원류고』도 군주와 지배층의 검열(내지는 위신) 때문에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다루지 않았으며, 우리는 이 사실에서 ‘어떤 역사서건 정치적인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자기 자신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서는 더더욱 그러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참고 자료

 

―『삼국사기

 

―『만주원류고』(장진근 역주, 파워북 펴냄, 서기 2008년)

 

―『金朝史硏究』(윤명수 지음, 완안출판사 펴냄, 서기 2006년)

 

―『한글 동이전』(김재선/엄애경/이경 역편, 서문문화사, 서기 1999년)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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