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려거란과 고구려의 동계의식과 그 이전의 발조선(發朝鮮)
광개토경호태왕비문에는 여러 지명과 족명이 나온다. 비문을 읽어 내리다가 영락이라는 광개토태왕의 연호가 나오기 이전에 조상 추모(주몽)왕이 ‘북부여’에서 기원하였다는 선언이 나온다. 영락5년의 ‘비려’를 필두로 하여 ‘백잔’과 ‘신라’, ‘왜’, ‘조신’, ‘동부여’ 정벌기사가 나오고, 마지막 즈음에 수묘인제도를 이야기 하면서 ‘한예’ 혹은 ‘한’과 ‘예’가 나온다. 비려는 선비(鮮卑)라는 단어에서 비자를 따오고, 다음에 려자를 붙여 족속명을 붙인 것 같다. 고구려는 고려(高麗)로도 불렀는데, 선비족의 일파를 비려(禾卑/麗)라고 불렀다는 것이 되는 것 같다. 중국문헌에서 보는 것처럼 선비는 주로 기원후1세기-3세기 전후의 말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선비의 비자는 낮을 비(卑)로 중국인들은 오랑캐를 낯추어 부르는 경멸어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그런데 호태왕비문에는 이 비자 옆에 벼화변을 붙인 ‘비’자(禾卑)를 사용하고 있다. 비문중 낱말중에 벼화변을 붙인 말에는 평양의 양자에도 보통 흑토변(壤)을 붙이는데 벼화변(穰)을 붙이고 있고, 한예(韓穢)의 예자에도 벼화변(穢)을 붙이고 있다. 보통 예는 물수변(濊)으로 표시한다. 4세기말-5세기 초의 고구려인들은 백제를 백잔(百殘)으로 낮추어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이 숙신(肅愼)으로 표기하것은 호태왕비문에서는 조신(早愼)으로 부른 것 같다. 동부여 정벌 기사는 정벌 기사의 마지막 단락으로 나온다.
이렇게 되면 북부여, 비려, 백잔, 신라, 왜, 조신, 동부여가 모두 광개토경호태왕의 강역이 되는 것 같다. 강역이라는 말은 비문에는 ‘토경(土境)’이란 단어를 쓰고, 시호에도 그것이 반영되었다. 고구려의 토경을 아주 넓게 열어주신 좋은 태왕이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1세기에서 3세기 무렵의 동이(東夷)를 묘사하는 후한서 동이열전이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나라들이 부여, 고구려, 옥저, 예, 한(韓), 숙신, 왜 정도가 되는 데, 중국측의 문헌의 항목에서 거론하는 대부분의 지명 혹은 족명이 다 나오는 셈이다. ‘중원과는 다른 하늘’, 다른 천하(天下)를 가졌다는 한국 학자들의 주장이 옳은 것 같다.
고구려와 비려, 혹은 고려와 비려라는 명칭을 쓴 것에서 이상하게 동계(同系)의식이 묻어나는 것은 어쩐 일일까? 현재의 남북한 사람들은 동족(同族)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한국인들이 만주인들에게 느끼는 의식은 아마 동계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한 사람들끼리 정치적인 이유로나 내전과 같은 역사적 이유로 으르렁거리고 상대편을 이길려고 하는 의식이 팽배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같고 문화가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에 동족의식이 있는 것이다. 만주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은 일제시대때의 역사관, 혹은 거슬러서 고려-조선의 대국 콤플렉스에서 비롯되어 청나라 대국에 대한 감정에서 생긴 것이지만 그래도 현대적인 이성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면 동계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호태왕비를 세운 장수왕대의 고구려 사람들도 회복된 고조선의 고토(古土)에 사는 사람들을 복속하면서도 그들을 비려라고 부른 것은 비려인들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게 만든다. 동계의식이 있었던 그들에 대한 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비족은 진 시황 영정이 전국시대를 끝낸 무렵에서 고조 유방이 한나라를 세울 무렵 이전의 시기에 흉노나라에 멸족당 할 뻔 했었다. 현재의 산서성과 섬서성 북쪽의 산악지대와 오르도스로 불리우는 지역에 존재한 흉노나라의 동쪽 정벌에 밀려서 현재의 대흥안령산맥 중북부로 이동해 갔다. 대흥안령 중북부의 오환산과 선비산에 집단 거주했기 때문에 오환과 선비였다. 오환은 한나라 초기에 편입되어 동화되지만, 선비족은 굉장히 오랫동안 그 족속의 정체성을 유지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실위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우고, 대흥안령산맥 서남의 몽골 초원 같은 데에 유목생활을 하며 살던 몽올실위는 나중의 징키스칸의 대제국이 되고, 현재의 몽골인들의 조상이 되는 것 같다.
한나라의 제압으로 흉노의 세력이 약해지자 선비들은 다시 서쪽으로 이동을 해서 현재의 요서지역과 연산 이북의 지역, 곧 현재의 내몽골자치주 적봉 지역의 부근에서 서남쪽의 연산 지경으로 다시 이동해 온 것으로 보인다. 흉노는 한나라 이전의 춘추, 전국시대에는 적(狄)이나 적(翟)자로 표현되기도 하고 주나라 때는 귀방, 상나라때는 공방으로도 불렀다. 그런데 흉노인들의 언어는 알타이어계의 투르크어, 곧 후대의 돌궐로 불리워지던 사람들의 선조 언어였던 것 같고, 선비는 같은 알타이어계의 몽골어의 선조언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흉노나 선비는 서로 싸우고 멸족시킬 정도로 적대적이었지만 동계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2천여년 전 혹은 1천 5백년 전의 고구려사람들의 말은 지금의 한국어와는 의사소통이 안될 정도로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광개토 및 장수태왕대의 고구려 말들은 지금 우리가 몽골어를 쓰는 사람들과 차이가 나는 것 보다는 가까웠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후대의 몽골인들은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 엄청나게 다른 생태적 환경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진화시킨 것이지만, 현재의 내몽고자치주 적봉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기원전 2세기 이전에는 한족(漢族)들이 아니었고, 알타이어계의 투르크 조상어나 몽골 조상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분명하다면, 광개토 및 장수태왕대의 고구려인들이 당대의 비려인들을 보는 인식은 분명 동계의식에서 나온 것이었을 것이다.
만약에 중원에서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섰을 때에 주의 봉국인 연나라의 동북에 있던 나라에 여러 족속들이 있었다면 흥미로운 역사인식이 생길 수 있다. 단군조선대와 거의 같은 하가점하층문화를 잇는 위영자문화와 하가점상층문화(남산근문화) – 기원전 13세기-5세기 정도- 를 담당한 사람들이 여러 족속들이 섞인 다족속 문화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 고고학적 근거는 많다. 후대 고조선 문화라고 하는 비파형 동검도 나왔고, 흉노 및 동호(오환, 선비)의 청동기도 섞여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하가점상층문화는 다시 후대의 북부여의 지역으로 비정되는 지역의 선(先)부여 청동기 문화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신석기 후기의 홍산문화를 잇는 하가점 하층문화와 위영자/하가점상층문화의 담당자들은 알타이어 공통조상어를 말하는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중원의 한어(漢語)의 조상어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인 것이다.
중원의 전국시대에는 흉노와 동호, 그리고 조선으로 파악되는 족속들, 곧 적(狄)과 융(戎)으로 표시된 족속들이 춘주시대(기원전 711-480)와 전국시대(기원전 480-221) 북쪽의 나라들, 곧 연(燕), 제(齊), 노(魯), 송(宋), 위(衛)와 전투와 전쟁을 벌였다는 기사가 화하인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세가들에도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현재의 산동성 북부의 제나라 환공(기원전 685-643) 23년, 곧 기원전 662년에 연나라가 산융(山戎)의 침입을 받자 구원하여 산융, 이지, 고죽까지 밀고 올라갔다가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기사가 있다. 관자라는 책의 저자로 일컬어 지는 제환공 때의 재상 관중이 이때 사람이다. 중원 주나라 제후국들 중에 패권을 쥔 환공이 중원천자가 되는 봉선을 자신의 나라 서쪽의 태산에서 하겠다고 하자 관중이 원근에서 진귀한 보물이 자발적으로 들어와야 봉선을 하는 것이라고 타일러서 말렸다고 한다. 이 진귀한 보물 중의 하나가 발조선(發朝鮮)의 문피(文皮)였다. 문피는 진귀한 표범의 가죽이었던 것 같다. 이 기사를 기원전 7세기에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정확하게 등장하는 가장 처음 케이스로 친다. 물론 그 이전의 주나라 초기 초대 무왕과 성왕대에 동쪽에서 온 숙신(肅愼)이라는 말은 등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기원전 1046년 무렵이라서 300년 전의 이야기이다. 보통 주 무왕의 숙신과 기원후 1-3세기에 등장하는 숙신이 문자 표기가 같다고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후대의 중국인들이 부른 숙신은 나중에 읍루, 물길, 말갈로 이어지는 계보를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하는 의문은 항상 꼬리를 문다. 오히려 ‘소속’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만주말 쥬신에서 보는 것과 같이 주나라 초기의 ‘숙신’으로 표기된 것이 300년 후에는 ‘조선’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일관성이 있다.
그러면 조선의 문피가 황해를 건너서 대동강의 평양에서 오는 것이었을까? 시대는 기원전 7세기였다. 아니면 산융(山戎)이라는 비칭으로 불렀던 지역에서 올 수 있는 것이었을까?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 초기라서 주나라 제국의 왕이 엄연히 있는 상황이었고, 또 고고학적 발굴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홍산문화에서 하가점하층문화를 거쳐서 내려온 위영자/하가점상층문화인들이 연산 주변에서 대릉하-시라무렌강 유역에 강력하게 존재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좀 더 가까이 있는 지역을 표현하였을 것이지, 엄청나게 먼 지역의 내조를 바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관중이 천자로 등극하겠다는 환공을 말릴 때 올 수 있는 보물로서 문피를 거론했을까? 조선이 제나라와 맞먹을 만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환공의 비현실적 인식을 타이를 수 있는 사례로 든 것 같다. 공자가 동이의 지역에서 살고 싶다는 표현을 했을 때의 현재의 요서지역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었을까? 물론 공자는 노나라의 역사책 춘추(春秋)를 지으면서 중원이라는 심상 지리에 중심을 맟추고 이민족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역사기술을 한다. 춘추시대라는 것도 이 공자의 역사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산융, 이지, 고죽으로 표현된 지역에 하가점상층문화가 있었다는 것과 발조선의 문피를 생각해 보면 중국인들의 오랑캐관념을 다시 한 번 더 새기게 된다. 한참 뒤죽박죽이고 엄청나게 헷깔려서 중국학자들도 혀를 내두른다. 그런데 이 시기는 비파형동검문화가 한반도 북부에서 현재의 요하 동쪽의 만주지역 전역에 퍼지면서 동일한 문화권을 보인다. 그 일부가 하가점상층문화 지역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는 단군이 개국한지 1천년 이상 지난 시점이라서 고조선이기는 한데 어떤 고조선인지는 두고 보아야 한다. 토기나 부장품에서도 동쪽의 문화가 서쪽으로 영향력을 미치던 시대라는 것이다. 발조선(發朝鮮)은 어떤 학자는 번(番)조선으로 푼다. 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기자의 옛고향은 고죽이라는 한다. 이 남산근 문화 (하가점상층문화) 시대는 고려-조선은 기자조선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 시대구분에 속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은의 유민 기자가 동래한 곳도 고죽이 있던 이 지역이라는 고고학적 증거(기후명 청동예기)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강력한 청동기 문화를 가진 이 지역에서 아마도 기자는 발조선의 왕은 못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냥 제후를 의미하는 기후 정도로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고려-조선의 인식처럼 기자조선으로 불러야 할 것 같지는 않다. 중국인들의 표현처럼 발조선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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