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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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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북방대원정2 - 비려 원정의 중간 거점지 양평도

391년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광개토 대왕은, 약 4년간 백제와의 치열한 전투끝에 대동강 이남까지 진출하였던 백제를 예성강 이남으로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전술상의 공간을 확보하자, 오랫동안 고구려 북방영토를 침탈해 오던 거란에 대한 원정을 본격적으로 단행할 수 있었다. 

여기에 대한 광개토태왕릉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비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이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395)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落)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비문에는 영락이라는 연호를 쓰고있다. 연호란 대체적으로 왕이나 황제의 즉위년을 기준으로부터 헤아려지는 1년의 햇수를 가리킨다. 비문에는 영락 5년이라 돼 있음으로, 광개토대왕이 재위한지 5년이 지났음을 뜻한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북방원정을 떠나자, 부산(負山) 북서쪽 방면에 있던 비려부는 도저히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고구려는 가는 곳 마다 승리하였으며, 3개 부락 600 ~700 영에 달하는 비려부를 격파하고 또 영토로 개척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압록강이 한 때 염난수로 불러졌다는 기록을 근거로, 광개토 대왕의 원정을 압록강 중하류로 국환시켜 해석하려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을 살펴보기 앞서 우리는 먼저 양평도가 어딘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양평도(=양평길(襄平道))에 관련된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영양왕 편에 보면 우문술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침공할 때 장근이라는 장수가 양평길을 통하여 압록수 서쪽에서 모였다고 나와있다.  따라서 양평도는 압록강 서쪽에 있다. 또한 광개토 대왕의 비문에 역성과 북풍 오비등의 지역을 거친 후에 국내성으로 들어왔던 것으로 보아, 국내성으로부터도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곳에 있다. 
  


양평도의 위치에 관련된 가장 확실한 기록은 요양(遼陽) 북 70리 되는 곳을 양평(襄平)이라 불렀다(讀史方輿紀要 參照)는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요양은 서쪽으론 요동성으로 이어지고, 북쪽으론 당시 현도도로 추측되던 심양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론 환인으로 이어지는 교통요충지이다. 그리고 요양에서 환인으로 이어지는 길은 비교적 평탄하여 많은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용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머나먼 원정으로 지친 고구려군과 함께 수많은 노획물을 가져와야 했던 광개토대왕으로선, 피로도 풀고 또 업적을 선전하기 위해서라도 고구려 인이 많이 이용하였던 양평길를 선택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양평도는 심양에서 부터 요양으로 이어졌던 길을 가르키는 말이었을 가능성이 현재로선 가장 높다. 광개토 대왕의 귀환 경유지가 양평이었다면 원정길은 적어도 양평길이 끝나는 심양에서부터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아야한다. 하지만  비려로 가려면 양평길 넘어, 부산(富山)과 부산(負山) 그리고 염수(鹽水)를 건너야 한다. 양평길이 종착지점이 심양이라면 부산(富山)은 의무려산으로 보는 일반적인 의견이다. 


그렇다면 염수는 의무려산보다도 더 북서쪽에 위치한 곳이다. 태왕이 염수에 이르러 비려(碑麗)의 3개 부락을 격파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염수를 어디로 볼 것인가에 따라 태왕의 비려원정 역시 그 범위가 크게 달라지게 된다. 염수에 대해서는 요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태자하(太子河)지역이라는 주장에서 부터 혼하(渾河)설,  동요하설, 그리고 내몽골자치구에 있는 시라무렌강 유역의 염호(鹽湖)인 광제호(廣濟湖) 일대까지 보는 견해등이 있지만, 염수(鹽水)와 일치하는 기록이 없기에 어느 것을 정설이라고 보기 힘들다.
 
다만 양평길을 요양->심양으로 보고 부산을 의무려산으로 본다면 염수는 시라무렌(서랍목륜)강유역을 가장 유력한 주장으로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그와 같은 원정을 단행할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겠냐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고, 무엇보다도 그곳까지 영토를 확장했다고 볼 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가 부족한 상태이다. 

그러나 고구려보다 더 국력이 약한 국가였던 북조 정권이나 남조정권도 중국대륙을 장악하지 않았는가? 북방의 어느 유목보다 더 안정적인 국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팽창정책을 실시한 광개토태왕이 내몽골지역까지 진출하지 못했을리 없다. 지금도 여전히 고구려와 광개토 대왕에 대한 논쟁은 끝없이 전개되고 있지만, 처음부터 지나치게 회의적이거나 고정적인 시각에서 출발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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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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