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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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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2 - 관미성 공방전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71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3 - 평양을 지켜라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72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4 - 비려 정벌기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77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5 - 아리수를 건너다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79
      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6 - 경자 대원정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0
      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7 - 광개토대왕의 위기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2
      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8 - 북연과의 종족동맹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4
      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9 - 407년 광개토대왕이 향한곳은?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5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10 - 단군의 후예 四海를 평정하다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6
      광개토대왕의 북방 대원정 1 - 391년 거란 정벌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9
      광개토 대왕의 북방대원정 2 - 비려 원정의 중간 거점지 양평도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90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1 - 소년왕 광개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강대하였던 왕국 고구려, 그리고 고구려를 가장 강한 왕국으로 만들었던 제왕 광개토. 그러나 고구려는 처음부터 강한 나라가 아니었고, 지리적 위치상 중국 한족과 각 유민의 주요 분쟁지역 한가운데 있었다. 그럿탓에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등 우리나라의 어떠한 고대국가들보다 많은 외침을 받아야 했지만, 가장 강대한 국력을 지녔기 떄문에 그때마다 극복해 냈다.

주변정세

광개토 대왕은 서기 391년에 고구려 19대 제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광개토 대왕이 즉위와 관련하여 고구려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우선 선대왕이었던 고국양왕 당시 선비족의 모용수는 요서지방에 후연이라는 국가를 세우고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고구려는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패배하여 서기 371년 고국원왕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이후 고구려는 백제와 숙적의 관계가 되었는데, 선비족 역시 추모성왕(동명성왕이 공인된 명칭이나 이 글은 광개토 태왕릉비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거기에 따른 것임)때 부터 등장할 정도로 고구려의 서변을 자주 침략하던 유목민족이었다.

그런데 그런 선비족이 국가를 세우면서 더욱더 강성해 지기 시작하였고, 모용수가 후연을 세움에 있어서는 현재 북경및 요령성 일대와 내몽골자치구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며 고구려와 동서대립의 구도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고국양왕은 후연의 동진을 저지하면서, 한편으로는  백제를 견제해야 되는 이중과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고국양왕은 말갈족을 이용하여 백제를 견제하는 한편, 대부분의 주력은 후연에 대한 방비책에 동원 해야만 되었다. 

이렇게 고국양왕이 서쪽 전선에 전력을 기울이는 사이, 남쪽전선에서는 백제 달솔 진가모로부터 기습적인 공격을 받아, 도압성이 무너지고 주민 200명이 사로잡히는 일이 벌어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나면서부터 웅위하고 남에게 구속되지 않은 성격이 있었다고 한다. 광개토 대왕은 왕위에 즉위하였지만, 선대왕보다 더 많은 과제를 안고 있었다. 후연은 더욱더 세력이 강성해 졌고, 북방의 거란족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남방의 백제역시 언제든지 고구려의 후미를 칠 수 있는 나라였으며, 연해주 지방의 읍루족 역시 골치거리였다. 한마디로 사방이 적이었으며, 어느 것 하나 손쉬운 문제와 가벼운 상대가 없었다

신라와의 동맹

광개토 태왕은 이렇게 남쪽 국경이 백제로부터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을 시기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태왕은 즉위 2년에 뜻밖의 호제를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백제에게 꾸준한 침공을 받던 신라가, 고구려와의 화친을 제안(서기 392년)한 것이다. 그것도 신라의 사신으로 온 사람은  내물 이사금(신라왕의 호칭)의 조카이자 훗날 실성 이사금에 오르는 신라의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신라는 삼국중 가장 약한 나라였지만, 신라와의 외교관계 수립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일단 후방에 우호세력이 하나 생겼다는 것도 고무적인 일이지만, 그렇게 됨으로써 백제의 힘을 분산 시킬 수 있었다. 고구려의 적대세력은 백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서쪽의 후연과 북쪽의 거란, 동쪽의 동부여와 숙신까지...비록 신라의 힘이 약하였지만,  392년 신라와 맺은 화친으로 인해 적어도 신라와 백제가 연합하는 것을 당분간은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라와 화친을 맺은 효과는 곧바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비문에는 빠져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신라와 화친이 성립된지 4개월만인 391년 7월 고구려가 남으로 백제를 쳐 10성을 빼았았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고구려가 백제에게 빼앗은 10여성이 어디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의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대동강 이남에서 임징강 이북지역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남쪽전선이 다소 안전되자 북쪽의 거란족을 공략하여 남녀 500여명을 사로잡고 1만명에 달하는 유민집단을 포섭하는 대 전과를 이루었다.

고구려군은 황해도 방면의 10성을 점령한데 이어 관미성까지 진격해 갔다.  백제로써는 관미성이 도읍인 한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나머지 10성을 합친 것 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녔던 곳이다. 따라서 당시 백제왕인 진사는 모든 전력을 관미성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이 전쟁은 사실상 소년왕 광개토가 진정한 고구려의 왕이 될 수 있는가와 진사왕이 고구려의 힘을 넘어설 수 있는가를 판가름할 전쟁이기도 하였다.

광개토태왕릉비 비문
  
광개토 태왕릉비의 비문내용에는 광개토 태왕이 즉위에서부터 4년사이에 벌인 거란원정이나 백제 원정의 내용이 모두 빠져 있다. 특히 삼국사기는 광개토 태왕의 업적 중 관미성 전투에 관련된 내용중 가장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관미성 전투는 고구려와 백제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전쟁을 벌인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보고있다.

 그렇다면 왜 고구려가 기록한 광개토 태왕의 기록에는 이 내용의 빠져 있을까? 이 시기는 광개토 대왕의 나이가 만 17세에서 20세에 해당하는 소년기이다. 광개토대왕이 뛰어난 인물이긴 하지만, 과연 이 어린 소년왕이 팽창정책을 주도하였을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4년동안 기록을 보면 백제와 밀고당기는 공방전의 시기로, 광개토대왕의 명백한 업적으로 보기 힘들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주가되는 비문의 성격상, 미완의 업적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삼국사기는 통일신라가 편찬하였을 것도로 예측되는 삼국기를 바탕으로 한 책이다. 신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선 신라 국경지역에 인접하여 발생한 일이어서 상세하게 기록하였을 것이고, 이후 신라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백제 원정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 원정을 기록하게 되면, 이후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었음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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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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