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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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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2 - 관미성 공방전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71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3 - 평양을 지켜라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72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4 - 비려 정벌기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77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5 - 아리수를 건너다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79
      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6 - 경자 대원정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0
      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7 - 광개토대왕의 위기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2
      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8 - 북연과의 종족동맹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4
      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9 - 407년 광개토대왕이 향한곳은?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5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10 - 단군의 후예 四海를 평정하다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6
      광개토대왕의 북방 대원정 1 - 391년 거란 정벌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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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3 - 평양을 지켜라

고구려와 백제의 힘의 우위를 놓고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던  4세기, 공교롭게도  고구려의 담덕(재위 391∼413)은 서기 391년에 백제의 아신은 392년에 양국의 왕이 되었다. 아신(재위 392-405)은 침류왕의 태자였으나, 나이가 어렸던 탓에 삼촌벌인 진사왕이 먼저 올랐다. 하지만 진사왕의 재위기간도 11년 정도였기 때문에 아신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의역시 20대 초반에서 30대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광개토 태왕과는 3~6년 정도 차이밖에 나지 않은 동년배였다. 거의 같은 시기 대등한 수준의 국력을 이어받아,  두왕은 국운을 걸고  맞서게 된 것이다.

광개토 태왕은 백제의 북진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평양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평양에 아홉 불사를 동시에 창건하였다고 나오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대규모 신도시 개발사업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고구려의 평양천도가 장수왕대에 이루어 졌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광개토 태왕이 평양에 아홉 불사를 창건하는 서기 393년부터 이미 평양천도 계획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광개토 태왕이 즉위하고 얼마있지 않아 대규모 국책사업을 벌인것에는 여러가지 목적이 있었다, 우선 국내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 토착세력과 귀족들을 일소하는 효과가 있으며, 전략적으로 볼때도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이 잦은 국내성보다 평양성이 더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이와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는 인구의 유입으로 이어지고, 불교신앙의 중심지 역시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하지만 평양성은 백제의 국경과 너무 가깝다는 부담도 있다. 실제로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기습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한 일도 있다. 따라서 태태왕은 백제의 침공에 대비하여 정예병력을 양성하는 일도 소흘히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태왕의 평양개발 계획이 한창 추진되고 있을무던, 394년(광개토 태왕 3년) 7월 드디어 백제는 평양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이미 관미성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가 그러한 기습적인 공격을 해 올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또 백제는 광개토 태왕이 평양에 머물러 있고 그곳의 방비가 아직은 정상적으로 구축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 태왕이 정(精)기병(騎兵)5000명을 이끌고 직접 전쟁에 나서자 승세는 급격하게 고구려쪽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비록 태왕의  나이는 어렸지만 풍부한  실전통솔경험이 있었고, 고구려군 역시 지난날 관미성 등지에서 승리를 거둔 자신감이 있었다. 결국 393년에 벌어진 평양 전투는, 고구려 본기에 백제군이 밤을 틈타 도망갔다고 나와 있을 정도로 태왕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고구려에 대한 기습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백제 아신왕은 전면전을 계획하게 된다.  광개토 대왕 역시 1차 공격 이후 예상되는 백제의 재침에 대비하여 5천의 정예 병력을 7천명으로 확대 편성하였다.그리고 1년 후인 395년, 광개토 태왕은 패수방면에서 다시한번 백제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런데 이번 전투에 나선 백제 장군은 지난날 관미성의 재탈환을 목전에 두고서 보급로가 확보되지 않아서 회군하였던 아신왕의 외숙 진무였다. 당시 백제군의 규모는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았으나 2만여명 정도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백제 본기와 고구려 본기는 조금 다르게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은 같다. 백제 본기를 보면
" (아신왕 4년 즉 광개토 태왕 5년)가을 8월에 왕은 좌장 진무 등게게 명하겨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나 고구려 왕 담덕이 친히 군사 군사 7000명을 이끌고 패수 위에서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죽은 자가 8000명 이었다."

이에 비해 고구려 본기에는  
'(광개토 태왕 재위)4년 가을 8월에 왕은 백제와 더불어 패수 위에서 싸워  대패시키고 8000명을 사로 잡았다.'
로되어 있다.

우선 위의 두 기록은 같은 해에 일어난 동일한 사건이다. 얼핏 보면 두 사건은 1년의 시차가 있는듯 하지만, 그것은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이 광개토 태왕의 즉위를 391년이 아닌 고국양왕이 사망연대인 392년로 보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광개토 태왕 능비에는 서기 395년을재위 5년으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어, 그가 고국양왕이 살아있을 때 양위하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백제본기의 죽은자 8000명과 고구려 본기에 나온 생포자 8000명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여기에 대해 백제의 입장에선 적에게 포로로 잡힌자는 이미 사망한 자에 포함시켰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평양을 공격하였던 백제의 병력을 2만명으로 본다면, 백제는 이 전투에서 사망자 8천명과 포로로 잡힌 자 8천명을 포함하여 1만 6천에 이르는 병력을 잃었을 것이다. 즉 광개토 태왕은  7천의 병력으로 2만 여명의 백제군을 괴멸시킴으로써 아신왕과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백제의 아신왕은 지금의 황해도방면을 회복하지도 못한체 평양에서 다수의 병력을 잃음으로써, 북쪽방면의 방어선이 급격하게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아신왕은 이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 그해(393년) 11월 7000명의 병력으로 한강을 건넌다. 하지만 겨울의 추위와 폭설로 인해 많은 병력을 잃어야 했으며 결국 전투 한번 못 해본 채 회군하고 말았다. 

패수의 위치

浿水에 대한 의견은 참으로 다양하다. 고조선의 지면이 고구려에서도 그대로 통영되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패수를 요하나 대릉하 혹은 난하로 본다. 이에 비해 고조선이나 한사군을 한반도로 제한시켜 해석하는 입장에서는 압록강이나 청천강 혹은 대동강등을 꼽는다. 그런데 이 아신왕과 광개토 대왕의 기사에 등장하는 패수는 어떠한 경우에도 압록강에서 대동강 사이로 볼 수 없다. 이유는 삼국사기 근초고왕조에 고구려가 백제 땅인 浿河(패하)를 공격하다가 패배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백제가 한반도에서 대동강을 넘어 북진한 일이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개토태왕과 관련하여 나오는 패수를 예성강이나 임진강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에 대해 우리역사를 너무 축소시켜 해석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다시 등장한 것이 대륙백제설과 일련의 패수에 대한 논쟁이다. 이 주장에는 백제가 중국 동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전제가 반드시 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관미성 전투에서 시작하여 패수전투까지 이어지는 고구려와 백제간의 분쟁은, 황해도를 둘러싼 영토전쟁이 아니라 현재 요하강지역의 주도권을 둘러싼 전쟁으로 결론내려진다. 이 주장에 의하면 당시의 평양성은 현재 안시성지 역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대륙백제설과 관련된 지도

그러나 태왕릉비의 비문에는 이 시기 백제와 있었던 전쟁이 단 한글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전쟁은 광개토 태왕의 업적으로 올려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전쟁은 아니었던 것이다. 관미성 전투나 패수 전투가 대륙진출의 주도권을 두고 다툰 전쟁이었다면 광개토 태왕릉비문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광개토 태왕의 기록에 대해 많은 부분을 축소하거나 삭제하여 기술한 삼국사기에서 과연, 요서지역에서 벌어졌던 백제와 고구려의 기록을 저술하였을까? 물론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패수를 예성강이라고 단정지을 만한 어떠한 역사적 기록이 없긴 하다. 하지만 광개토 태왕의 수도이전 계획과 관련지어 볼 때나 , 패수 일대의 전투는 예성강 일대로 보는것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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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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