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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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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북방 대원정 1 - 391년 거란 정벌
* 대왕이란 호칭은 일반명사 Great King 의 의미로 보아 낱개의 단어로 쓰고, 태왕이란 호칭은 고유명사로 보아 광개토태왕으로 붙여 쓰고자 합니다.
광개토 대왕은 분명 우리역사이고, 또한 광개토태왕릉비의 내용은 현존하는 우리 역사기록 중 가장 오래된 유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내용 대부분이 삼국사기의 내용과 맞지않아 여전히 논란이 있다. 가령 삼국사기에는 가장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는 백제와의 관미성전투가 비문내용에는 보이지 않으며, 또 광개토태왕릉비에 나와있는 396년 백제와의 아리수(한강의 고구려식 명칭) 전투나 왜구 토벌및 부여 원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 물론 두 내용은 어느 한쪽이 틀렸다기 보다는 상호보안적으로 파악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만, 당대 직접 기록한 광개토태왕릉비의 내용이 보다 정확하고 비중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광개토 대왕 비문 내용중 가장 최초로 언급되는 원정내용인 비려 - 혹은 패려(稗麗)로도 발음됨 - 에 대한 기록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려에 대해서는 현재 거란의 일족이라고 보는 견해에 별다른 의의가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91년 7월 남쪽으로 백제 10성을 점령한데 이어 9월 북쪽으로 거란을 쳐서 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거란족에게 끌려갔던 1만 명을 본국으로 환국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비록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만 언급되어 있지만, 태왕릉비에 가장 먼저 나오는 비려 원정과 상당한 연관성을 갖고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광개토 대왕은 선대왕때 부터의 숙원사업이었던 백제에 대한 원정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던 시점에서, 돌연 북방원정을 단행한 이유는 무엇 것일까?
백제와의 전쟁이 다소 정치적인 면이 있었다면, 거란의 침략행위는 보다 직접적으로 고구려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었다. 특히 서기 378년(소수림왕 8년)에는 대가뭄으로 고구려의 정세가 혼란한 틈을 타, 거란족이 대규모로 침략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키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서쪽의 선비족 세력과 남쪽의 백제를 동시에 막아야 하는 고충이 있었기 때문에 거란족에 대한 정벌을 단행 할 수 없었다.
391년의 거란 침략역시 고구려인 1만 명이 포로로 잡혀 갈 정도라면 378년의 피해규모보다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거리상으로는 백제와의 군사대치 지역이 보다 가깝긴 하였지만, 유목민족의 기동성이나 지형적인 특성을 고려 해 볼 때 고구려 도읍까지 도달하는 시간적 거리는 거란족이 더 가깝게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378년에 이은 391년의 대규모 침투로 인해, 거란족의 침투가 고구려 도읍에 더욱 근접하게 되었다.
이렇게 거란족의 침투에 대해 고구려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지만, 광개토대왕은 백제 10성 공략으로 어느정도 전술상의 공간을 확보함으로 인해, 거란족에 대한 원정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구려 백성의 터전이 함몰되고 생명의 안전조차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지 않은가. 광개토 대왕은 그 무엇보다도 백성의 목숨과 재산을 소중히 여기며 그 어떤 일보다도 백성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왕이었다. 391년 9월 광개토 대왕이 향해야 할 곳은 명백하였다.
중국 지린성[吉林省(길림성)] 지안현[輯安縣(집안현)] 퉁거우[通溝(통구)] 지방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 대왕의 비석. 높이 6.39m, 너비 1.35m∼2m로 414년(장수왕 2)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건립하였다. 14∼15㎝ 정도 크기의 문자가 4면에 총 44행(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 1775자가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1534자이다.
아직 미완이었던 4년간의 업적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1차 거란원정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391년부터 394년 사이에 벌어졌던 백제와의 전쟁이 나와 있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두가지 주장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먼저 오랜세월이 흐름에 따라 발생한 불가피한 오차라는 주장이다. 광개토호태왕릉비는 장수왕에 의해 건립되어 진 것이지만,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멸망한지 400여 년이나 지난 후의 기록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삼국시대의 역사기록중 상당부분이 유실되거나 왜곡되기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4~5년 정도의 오차는 충분히 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거란정벌 이후 백제와의 최대 공방전인 관미성전투를 벌인 삼국사기의 흐름이나 비려원정 이후 아리수 전투를 벌였다는 태왕릉비의 전개 역시 비슷한 점이 있다. 즉 사료의 자연스러운 감소에 따른 의도하지 않은 오차라고 보는 것이 첫번째 주장의 핵심이다. 이에 비해 두번째 주장은 누군가에 의한 의도적인 역사왜곡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 왜곡의 주체에 대해선 우선 신라를 의심할 수 있다. 즉 400년 신라의 구원요청에 의한 고구려의 왜구 토벌기록을 통체로 삭제한 예와 같이, 광개토 대왕의 거란원정이나 백제와의 공방전을 의도적으로 축소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음으로 철저한 사대주의자였던 김부식이,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중국의 여러 기록에 억지로 맞추기 위해 왜곡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또 다른 주장은 장수왕이 태왕릉비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비석의 한정된 공간으로 인해, 광개토 대왕의 수많은 업적중 보다 비중있는 업적을 취사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주장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또 추모비의 성격상 다소 미흡한 성과나 욕되게 하는 내용은 기록되어 질 수 없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장수왕이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찬하기 위해 과장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것은 점령한 성과 고을 이름 하나하나까지 모두 기록한 태왕릉비의 구체성으로 보아 설득력이 약하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만 나와있는 391년 거란 정벌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391년 거란 정벌은 훌륭한 업적이기는 하였지만, 거란족의 침탈을 허용하였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또 1당시 18세였던 광개토 대왕의 나이로 보아, 이러한 작전을 주도적으로 했다고 보기는 다소 힘들다. 즉 삼국사기에서는 391년에 있었던 백제 10성 원정이나 거란원정 그리고 392년에 있었던 관미성 공략을 매우 큰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고구려의 입장에서 보면 그조차도 비석의 한정된 공간을 차지하기엔 부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소년왕은 삼국사기의 표현대로 어려서부터 웅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되지 않는 뜻이 있었다. 그리고 4년이란 착실한 준비끝에 어느덧 청년으로 장성한 22세의 광개토대왕은, 부산(負山)을 넘어 비려의 본거지를 토벌하고 그곳까지 영토를 확정하기 위한 대원정길에 나서게 된다.
이에 대한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비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이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395)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落)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광개토태왕릉비에는 오직 대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분명한 업적을 남겼던 기록만이 쓰여 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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