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만주사변 이후의 군사활동 강화" 중 한국독립군 관련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3) 만주사변 이후의 군사활동 강화 : 한국독립군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1.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활동 > 3) 만주사변 이후의 군사활동 강화
조선혁명당이 이렇듯 활발히 움직이고 있을 때 한국독립당 역시 조직을 재편하고 한중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한국독립당註 098은 즉각 대일항전을 준비하였다. 1931년 11월 2일에는 길림성 우창/오상현 다스허즈/대석하자(大石河子)에서 한국독립당 긴급중앙회의를 개최하고
① 각 군구(軍區)에 총동원령을 내려 전체적 군사활동을 개시할 것
② 당내의 일체의 공작을 군사방면에 집중할 것
③ 길림성의 항일군 당국에 사람을 파견하여 합작을 도모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註 099
이에 11월 10일에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소집과 징모(徵募)를 실행하였다. 그리고 12일에는 당의 군(軍) 대표 신숙·남대관 등을 팡정/방정현(放正县/方正縣)에 주둔하고 있는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호로군연합군총부(護路軍聯合軍總部) 등에 파견하여 합작을 도모케 하였다. 11월 말에 그 곳에 도착한 한국독립군 대표들은 중국의 연합군 사령 딩차오/정초(丁超)와 제2군·제3군의 양웬훼이/양문휘(杨文挥/楊文揮)·카오펑린/고봉림(考鳳林) 등과 면담하여 연합에 합의하였다.
* 징모(徵募) : 국가에서 특별한 일에 필요한 사람을 불러 모음.
이 소식을 전해듣고 한국독립군 총사령 이청천과 최악(崔岳)·오광선(吳光善)·심만호(沈萬浩)·김청운(金靑雲)·최종원(崔鍾元)·한무빈(韓武賓) 등의 간부들은 1931년 12월 11일 친히 그 지역 당국에 가서 한중연합상의 구체적인 조건을 의결하였다. 이때 호약(互約)의 요점을 보면,
① 한·중 양군은 어떠한 경우에도 장기항전을 전개할 것을 맹세한다.
② 중동철로(中東鐵路)를 경계로 하여 서부전선은 중국군이 맡고 동부전선은 한국군이 맡는다.
③ 한·중군의 전시후방교련(戰時後方敎練)은 한국이 부담하고 한국군에 수용(需用)되는 일체의 자료는 중국군이 부담한다 註 100
는 것으로 되어 있다.
* 호약(互約) : 상호약속
이에 한국독립군은 총사령부의 위치를 이란/의란현(依兰县/依蘭縣 ; 싼싱현/三姓县/三姓縣)에 정하고 한영호(韓永浩)·최관용(崔寬用) 등을 당 중앙에 파견하여 장차의 일을 보고하게 하였다. 또한 후방의 각 군구의 대오들이 계속 전선에 집중할 것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각 부대의 정리와 파견이 제대로 안된 상황에서 1932년 2월 12일 일본군이 육군과 공군으로써 대거 진공해왔다. 이들은 세 방향으로 나뉘어져서 작전을 전개하여 중동선 연선의 모든 현을 석권하였다. 한중연합군과는 웨이샤허/위사하(苇沙河/葦沙河)·이몐보/일면파(一面波)·우지닝/오길영(乌吉宁/烏吉寗)·미펑잔/밀봉참(密蜂站)·통빈/동빈(同宾/同賓)·팡정/방정·이란/의란 등지에서 격렬한 전투가 있었으나 식량과 탄약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여기에 통제도 완전하지 못하여 한중연합군은 패배하게 되었으며 한국독립군은 분산되어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한국독립군은 2개월 동안 각 방면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다. 적군이 요로(要路)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보다 큰 이유는 한국독립군과 우군(友軍)의 통신연락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한국독립군 총사령 이청천과 참모장 신숙은 친히 예하의 부대를 이끌고 팡정/방정에서 이란/의란에 이르러 전선에 참여하였지만 역부족으로 쑹화/송화강(松花江)으로 퇴각하여 흑룡강성의 통허/통하현(通河县/通河縣)에 이르렀다. 여기서 각 방면의 부대를 수합하여 다시 부대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한국독립군 편대장(編隊長) 안종선(安鍾宣)은 자신의 부대와 자위·호로 제3군 카오펑린/고봉림의 부대를 통솔하여 방정에서 길을 둘러 1932년 3월 3일에는 아청/아성(阿城)에 도착하고 2일 간의 격전 끝에 그 곳을 수복하였다. 그리고 한국독립군 제3, 4, 5 대대의 차철(車澈)·지상기(池相奇)·전북빈(全北賓) 등의 부대는 중국의 자위군·호로군 연합군의 제3, 5여단의 류즈광/유지광(刘志光/劉志光)·공잉우/궁영무(宮英武) 등의 부대와 연합하여 한 달여 동안 고전(苦戰)하였으나 이몐보/일면파 이북으로 후퇴하였다.
한편 1932년 3월 2일 쐉청/쌍성(双城/雙城)에 있던 한국독립당 제3지부 간부 공심연(公心淵) 등과 마침 그 곳에 체류중이던 중앙간부 수 명은 마오얼/모아산(帽兒山)에서 비상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아군의 실정을 파악하기로 하였었다. 그러나 4월 16일 안종선 편대장이 이곳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실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한편으로는 정람전(鄭藍田) 등 수 명을 흑룡강성 본부에 파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규보(李圭輔)·안훈(安勳)·안종선註 101 등 수 명을 아성현의 용파/영발둔(永发屯/永發屯)에 파견하여 카오펑린/고봉림과 그 참모장 자오린/조린(赵麟/趙麟) 등과 재차 교섭케 하여 한·중 양군의 합작정신을 더욱 공고히 다짐하였다. 그리고 각 방면에 사람을 보내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노장 김창환(金昌煥)을 총사령 대리로 추대하여 각 부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투에 여가가 있을 때는 반드시 훈련을 실시하고 다른 한편으로 대민협조활동(對民協助活動)을 열심히 실시하였다. 이들은 1932년 6월 12일에 출병하여 우선 용린/영림둔(永林屯), 라린창/납림장(拉林场/拉林場 ; 쐉청현/双城县/雙城縣/쌍성현) 일대의 만주국군 위환장/우환장(于煥章)의 부대를 소탕하고 그 곳의 민중들에게 추호의 부담을 주는 행위를 하지 않고 강연과 선전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시켰다. 이에 따라 한국독립군에 대한 칭송의 소리가 자자하였고 물심양면으로 많은 협조가 답지하게 되어 만주사변 이후 한국독립군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한국독립군은 쌍성보전투·도하자전투·동경성전투·대전자령전투 등에서 한중연합으로 대일항전을 계속 전개하였다.
한편 한국독립당은 중국관내의 한국혁명당과 남경에서 회합을 갖고 신한혁명당을 결성註 102하였다. 그리고 당의 중앙이 중국관내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상해의 임시정부에서도 광복군의 중추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책임자로 이청천을 선임하고 빨리 상해로 올 것을 재촉하였다.註 103 이에 한국독립군은 당을 쫓아 중국관내로 이동하기로 하고 이청천·조경한(趙擎漢)·오광선·공진원 등이 상해 임시정부로 향했다. 그리고 한국독립군 중에서 군관학교 입학지원자를 선출하여 상해로 보내기로 하였다. 나머지의 부대들은 신굴(申矻)·최악·최만취(崔晚翠) 등이 인솔하는 가운데 닝안/영안·무링/목릉(穆陵)·미샨/밀산(密山) 등지의 삼림지대로 이동하여 후일을 기약하였다. 이 결과 만주에서의 한국독립군의 대규모 무력항쟁은 사라지게 되고 일본군의 침략세력이 전만주에 확대되어 독립군의 활동범위는 위축되게 되었다.
주
註 098 본절에서 다루는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만주사변 이후의 활동은 기본자료가 극히 부족하여 일청(一靑), 「구일팔 후 한국독립군재동북살적약사(九一八 後 韓國獨立軍在東北殺敵略史)」, 『광복(光復)』제2권 제2기(第二卷 第二期)(충칭/重慶 : 한국광복군사령부 정훈처/韓國光復軍總司令部 政訓處, 1941), 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p.1603~1608에 주로 의존하였다.
註 099 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1603 ;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57. 그러나 한국독립당은 만주사변 직후부터 일본에 의해 만주점령이 진행되면 자신들의 항일근거지를 상실하게 됨은 물론이고 과거와 같은 대학살사건이 재발하리라고 판단하여 남·북만 각지의 독립군 360여명을 소집하여 유격전술을 실행하면서 또한 중국군대와 연락을 취하면서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중앙일보(中央日報)』(난징/南京, 1931년 9월 24일자), 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1591).
註 100 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1603 ;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57.
註 101 애국동지원호회 편(愛國同志援護會編), 앞 책, p.275에서는 안종선을 별동대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註 10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독립운동사』제4권, p.725. 정당의 결성은 1933년 2월에 이루어졌다.
註 103 1933년 임정의 김구 주석은 이청천을 낙양군관학교 한인분교(洛陽軍官學校 韓人分校)에서 한국혁명군관의 훈련을 담임하게 하였다(김은국/金恩國, 『한국독립당삼균제도지전석(韓國獨立黨三均制度之銓釋)』(난징/南京 : 한국독립당 중국총지부/韓國獨立黨 中國總支部, 1947), 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2권, pp.430~432).
'근현대사 > 독립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활동의 역사적 의의 - 근대사료DB (3) | 2024.10.12 |
---|---|
사라졌던 홍범도 장군 묘비, 40여년 만에 찾았다 - 경향 (7) | 2024.10.11 |
3) 만주사변 이후의 군사활동 강화 : 조선혁명군 - 근대사료DB (0) | 2024.10.10 |
(2)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조직과 활동 - 근대사료DB (1) | 2024.10.08 |
(1)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조직과 활동 - 근대사료DB (3) | 2024.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