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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주사변 이후의 군사활동 강화 : 조선혁명군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1.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활동 > 3) 만주사변 이후의 군사활동 강화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소위 9·18 사건을 통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를 구실로 하여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음모를 노골화한 일본은 만주에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우고 본격적인 중·일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항일역량을 재정비하여 일제의 만주침략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중국 관내에서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 조직되어 유일독립당촉성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이 노력이 실패를 보게 된 후에는 분립적으로 존재하던 미주와 만주 등의 모든 해외독립운동 단체들을 망라하는 민족협동전선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여기에 만주의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만주는 일본군의 만주출병이라는 긴박한 상황으로 인해 군사활동 우선의 활동을 전개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만주의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은 당의 결의를 통해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전까지만 해도 일제와 직접적인 적대관계를 보이지 않았던 중국이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중국의 동북지방을 상실하게 되자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자들과 연합하여 일제를 공동의 적으로 하여 대일 공동투쟁을 전개할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註 076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일시하거나 일본 대륙침략의 선봉대로 생각하기도 하던 중국인들註 077은 이제 일제의 침략의도를 분명히 알게 되었고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가장 가까운 동맹자가 한국인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해시각은 일본의 대륙 침략정책의 진행과 정비례하여 그 폭을 넓히게 된다. 따라서 한·중 연합전선 형성의 중요성을 인정함에 있어서는 관내외의 구분이 없었으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 두드러지게 전개되는 한·중 협력을 주장하는 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즉 공동의 적에 대한 공동투쟁의 의무라는 이론이었다.
만주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던 한인독립운동가들은 1931년의 만주사변에 의해 만주에 대한 일제의 직접적인 지배가 이루어짐에 따라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에 조선혁명당은 1931년 12월에 긴급 중대회의를 신빈현에서 개최하여 지금까지 분립적으로 존재하던 조선혁명당과 국민부를 단일조직체로 만들어 항일체제를 재정비하였으며 이호원(李浩源)을 당중앙집행위원장에 김관웅(金寬雄 ; 김보안/金輔安)을 조선혁명군 사령관에 임명하였다.註 078 그러나 이때 회의장에 중국보안대와 일본영사관 경찰이 습격하여 이호원·김관웅 등의 간부들이 체포됨에 따라 조선혁명군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조직개편에 의한 역량강화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본거지를 싱징/흥경으로 이전하는 한편, 국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에 양하산, 부위원장에 양서봉을 선임하고 당을 재정비하였다.註 079 일제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국민부는 양하산을 행정부 총사령으로 하였으며, 혁명군 총사령인 양서봉 산하에는 장총 또는 권총을 소지한 5개 중대 약 150명의 군인이 있었으며 별도로 일본군 및 친일 중국군에 대한 정보수집을 목적으로 한 약 40명의 특무대를 설치하고 있다고 추계하였다. 또한 1932년 8월 5일에는 신빈현 웨이즈구/위자곡(苇子谷/葦子谷)에서 농민대표와 국민부 간부간의 독립운동 재건을 위한 비밀회의가 개최되어 국민부를 중심으로 하여 독립정부와 군대를 구성하고 국내 진공전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이에 통화 또는 신빈에 독립정부를 설치하고 조선 국내에는 결사투사(決死鬪士)를 파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註 080 그러나 그 활동의 성과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한편 일제측도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실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정보문서에 의하면“(조선혁명국과 국민부의) 현재 및 장래의 행동에 관해서는 극히 위험시되는 적극적인 면과 이와는 반대로 더욱 더 쇠퇴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소극적인 면의 두 가지로 갈렸다.”註 081고 애매하게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국민부 및 조선혁명군의 간부들이 새로운 계획으로서 중국 의용군과 연계하여 남·북만주에 10개소의 지부를 두기로 하였으며, 1932년 내에 200명 내지 500명의 조선혁명군을 새로 모병했다는 기록註 082을 볼 때, 조선혁명군의 활동이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일제측은 대체로 시인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진영이 크게 발전하였음에 기인한다. 즉 만주사변 이후에 독립을 위한 군사활동이 크게 발전하였는데 그 특징註 083을 살펴보면
첫째, 중국의 동·북의용군과 연합하여 공동항일전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특히 조선혁명군은 탕쥐우/당취오(唐聚五)·왕펑거/왕봉각(王凤阁/王鳳閣)·양징위/양정우(杨靖宇/楊靖宇)의 부대와 협동작전을 전개하였으며, 이청천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우이청/오의성(吴义成/吳義成)부대와 연합하였던 것이다.
둘째로는 양적·질적 발전으로서 만주사변 이전에는 수백 명에 불과했던 항일 무장부대들이 만주사변 이후에는 1만여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질적으로도 향상되었던 것이다.
세째로는 전투지역의 확대로 이전에는 한·만 국경일대가 그 주된 전투지역이었으나 만주사변 이후에는 만주 각지로 확대되었으며, 이전의 전투가 소규모의 공포 조성 행동이었음에 비해 만주사변 이후에는 유격전술註 084을 충분히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만주사변을 계기로 하여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하는 한·중연합전선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는 한민족의 20여 년 간의 독립전쟁의 경험에 중국인의 군수물자와 인적 자원이 결합되어 대규모의 항일전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어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한·중연합전선에 의한 항일전은 1932년 3월부터 7월까지의 싱징/흥경현 능가(陵街)전투였다. 여기서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서봉의 병력 1만여 명과 중국의용군 총사령 리춘룬/이춘윤(李春润/李春潤)의 병력 2만여 명이 연합하여 일만(日滿) 연합군을 정규전을 통해 격파하였다.註 085 그리고 또한 본격적인 한·중연합전선은 1932년 9월에 만주국이 일본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된 이후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항일의용군은 항일구국군(抗日救國軍)·국민구국군(國民救國軍)·각지의 자위군(自衛軍)·각지의 자치군(自治軍) 그리고 정치적 명의를 가진 군대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의용군들은 그 군사의 수와 탄약의 양에 따라 호소력의 강·약을 지니므로 통일이 어려웠고 강제로 통일을 한다면 각자의 발전을 방해할 상황이었다.註 086
조선혁명당과 군은 먼저 중국의용군 중 탕쥐우/당취오의 부대와 연합하였다. 탕쥐우/당취오는 요녕구국회(遼寧救國會)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으며 요녕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 총사령을 겸임하고 있었다.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당군에서는 1933년 2월에 김학규를 전권대표로 환인성에 파견하고 요녕구국회의 영수 왕위웬/왕육문(王育文 ; 요녕구국회 정치위원회 위원장)·탕쥐우/당취오 등과 한·중군합작 항일공작(韓中軍合作 抗日工作)에 관하여 협상케 하였다.註 087
여기서 요녕민중자위군 총사령부 내에 특무대사령부 및 선전대대를 설치하여 이를 조선혁명군이 전임(專任)케 하였다. 특무대 사령에는 양서봉이 취임하였으며 사령부는 통화성 내에 두었다. 특무대 사령부 아래에는 8개의 특무대를 설치하여 만주와 한국 내의 특무공작을 분담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註 088 그리고 선전대 대장에는 김광옥(金光玉)이 취임하였으며, 구국회 선전부 내에 한인선전과(韓人宣傳科)를 설치하여 한글신문 『합작(合作)』을 발행하였다. 일제측의 기록은 이러한 한·중연합전선의 형성에 대해, 조선혁명당과 군의 양서봉과 양하산이 탕쥐우/당취오와 밀약하여 “조선혁명군이 의용군에 참여하여 행동을 같이 하는 데 있어서는, 장래 의용군의 지반이 공고해짐을 기다려 혁명군의 목적인 조선독립을 위해 10만 명의 병력과 무기를 대여하여 적극적으로 원조하는 것”註 089을 약속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만주의 조선혁명당과 군은 우선 만주를 침략한 일제를 구축하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중국의용군과 연합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조선혁명당과 군은 중국의용군과 협조관계에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하면서 활동하였다. 즉 조선혁명군은 1932년 3월부터의 흥경성전투 이후 계속 대부대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조선혁명군 총사령부의 위치를 환런/환인·싱징/흥경·지안/즙안·통화 등과 연결되는 지역에 두고 총사령부 아래에는 5개로사령부(五個路司令部)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는 다시 수 개의 중대를 두었다.註 090 이때의 부대편성註 091을 보면
총사령관에는 양서봉,
참모장 김학규,
제1로군 사령관 박대호(朴大鎬),
제2로군 사령관 최현추(崔鉉秋),
제3로군 사령관 조화선(趙化善),
제4로군 사령관 최윤구(崔允龜),
제5로군 사령관 정광배(鄭光培)
등이 선임되었으며,
제1로군과 제5로군은 압록강(鴨綠江) 연안의 여러 현을 담당하였으며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진입하여 일본의 군대와 관공서 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를 띠었다.
제3로군과 제4로군은 봉해선(奉海線)·길해선(吉海線)의 철도를 중심으로 파괴공작을 담당하였으며
제2로군은 총사령부의 경위공작(警衛工作)을 담당하였다.
이외에도 통화현 강전자에 조선혁명군 속성군관학교(速成軍官學校)를 설치하여 2천여 명의 장교를 배출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이 독자적인 조직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중국의용군에 참여함에 따라 조선혁명군의 간부는 요녕민중자위군의 간부를 겸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탕쥐우/당취오의 군대가 일본군의 공격에 의해 괴멸된 후에도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은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고 자체조직을 발전시켜 갈 수 있었다.
1934년에 접어들면서 만주국이 만주의 치안을 직접 담당하게 되자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은 조직을 개편하여 조선혁명군사정부(朝鮮革命軍事政府)라는 군사정부를 조직하여註 092 새로이 항일전의 자세를 정비하였다. 이는 조선혁명군의 조직적 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혁명당·국민부·조선혁명군의 전체조직 속에서 조선혁명군의 정치적 세력이 증대하게 되고 실질적으로, 전 조직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어 군사 우선주의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35년에 일제의 소위 추계토벌(秋季討伐)이 전개되자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은 새로이 한·중연합전선을 모색하게 되었다. 조선혁명군이 두번째의 연합대상으로 선정한 부대가 왕봉각의 요녕민중자위군이었다. 이들은 이미 1933년부터 협조관계가 이루어져 조선혁명군이 필요로 하는 무기 및 탄약의 보충문제를 협의할 수 있게 되어 있었으며註 093 1935년 9월에는 한·중항일동맹회(韓中抗日同盟會)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1935년 9월 20일, 한·중항일동맹회 중앙집행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창립선언을 살펴보면, 일제침략에 의한 중국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통제있는 조직단체 즉 20년래의 경험과 실력이 있는 조선혁명군과 자위군 사령 왕펑거/왕봉각은 서로 제휴함과 함께 일반 한·중 민중을 규합하여 일치단결하고 국가회복을 위하여 분투함으로써 국난을 배제하고자 한다. 이것의 단결을 위해 우리는 빈부·상하의 계급은 물론 민·종·귀·천(民·種·貴·賤)의 구별없이 항일 동지(同志)하면 무조건 본 단체회원으로 크게 환영하는 바이며 일만군사행동(日滿軍事行動) 및 정치 시설을 배제하고 새로운 정치수단을 수립하려는 것이 곧 한·중 양민족의 신정권(新政權)이다”라고 하여註 094 한·중 양민족을 기반으로 한 한·중연합전선의 결성을 명백히 밝히면서 그 궁극적 목표가 국가의 완전한 독립임을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한중항일동맹회는 구체적인 정책과 행동방침 등을 정한 정강을 발표하였다. 이 정강의 내용註 095은 다음과 같다.
본 동맹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동북실지(東北失地)를 회복하며 조선독립을 목적함.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본 동맹은
① 세계민족의 항일단체와 연락을 유지한다.
② 본 동맹은 군사정책을 가지고 중·한 양국의 신정권을 수립함.
③ 중·한 양국의 항일동포는 수하를 막론하고 회원이 될 수 있음
④ 본 동맹 결성 후 일체의 재정(財政)은 각 구촌(區村)의 중·한 민중의 부담으로 함. 주구의 재산을 몰수했을 경우에는 본 회의 경비로 계상함.
이와 같이 한중항일동맹회는 한·중연합에 의해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통합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때에도 조선혁명당과 혁명군은 독자적인 활동을 따로 견지하였다. 즉 이 당시 중국 관내에 있던 한국 독립운동자들이 1932년부터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라는 연합체를 통해 대일항전을 위한 한인 독립운동 역량의 통일을 도모하였다. 조선혁명당은 이에 참여하였으며 1935년 7월 경에는 상해의 한국독립당·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대한독립단 등과 함께 중국 관내의 남경(南京)에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창당하였던 것이다. 이는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지배가 점차 확고해지고 앞으로 중·일전쟁의 발발이 예상됨에 따라,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중국 관내로 옮겨 항일역량의 통일을 이루는 동시에 지속적인 항일전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렇지만, 1938년 조선혁명군 총사령 김호석(金浩石)이 일본에 체포되어 그 세력이 약해질 때까지는 비록 소규모적이나마 만주에서의 항일전쟁은 계속되었다. 특히 1938년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한 기록註 096은 한인의 무장역량이 중국의 항일전에서 큰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동북항일연군 중에서 가장 유력한 부대는 제1로군 양징위/양정우 부대, 제2로군 왕더타이/왕덕태(王德泰) 부대, 제3로군 조상지(趙尙志) 부대 등이었다. 그런데 제1로군의 기초를 이룬 것은 요녕성 판스/반석현 지창즈/길창자(吉昌子)의 반일유격대로 성립 당시 소속군인의 5분의 3은 한인이었고 나머지가 중국인이었다. 이것이 소수의 유격대들을 연합·확대하여 수천 명의 항일연군 제1로군을 이룬 것이다. 이후 항일연군 제1로군이 발전함에 따라 한인의 비율이 낮아지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간부들의 반수는 한인이 차지하였다고 한다.
항일연군 제2로군 왕더타이/왕덕태 부대의 경우에도 소속 군인의 반수가 한인 동포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만주사변 직후 소수에 의한 한인 반일유격대가 길림·간도·한·만국경 등지에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고 수차에 걸쳐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는데, 이들이 단결하여 수천 명의 한인동포들도 항일투쟁에 참가함으로써 1개 지대를 구성하여 항일연군 제2로군 중에서 가장 용감한 부대가 되었던 것이다.註 097
그리고 중동선(中東線)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상지의 항일연군 제3로군에서도 한인동포들이 반수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들은 조선혁명당의 주세력이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당의 지도를 받지 못했지만, 여러 곳에서 다년간 용감하게 항일혈전을 전개하며 한민족의 독립과 정의를 위한 희생·분투의 민족정신을 온 세상에 밝혔던 것이다.
* 중동선(中東線) = 중국동방철도 = 동청철도 = 북만주지역 만주횡단철도
주
註 076
만주사변 이전에도 중국은 일본의 만·몽침략 의도를 알고는 있었으며 중국의 이해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함으로써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구하고 세계 피압박 민족을 원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산서성당부고동포서(山西省黨部告同胞書)」, 『중앙일보(中央日報)』(난징/南京, 1930년 2월 10일자), 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1권, pp.526~527.) 그리고 중국의 『중앙일보(中央日報)』, 1930년 2월 17일자 기사에서는 제국주의 국가의 철제(鐵蹄)하에 있는 중국(中國)은 약소민족 해방을 위해 동병상련에 있는 한국을 원조해야 한다며 그 구체적인 원조방법으로서
① 한민족을 대표하여 일본의 잔혹한 대한정책(對韓政策)과 비인간적인 대한거동(對韓擧動)을 세계에 폭로하는 것
② 한국의 지사자제(志士子弟)들을 광범위하게 수용하고 한글학교를 세워 이후에도 계속해서 혁명수양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③ 한국의 해방은 중국의 책임이므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가급적이면 많은 정신적, 물질적 공급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1권, pp.591~592).
* 철제(鐵蹄) : 침략자의 탄압이나 전제(專制)의 비유
* 지사(志士) : 큰 뜻을 품은 사람 / 자제子弟) : 젊은이
註 077 「고조선민족(告朝鮮民族)」, 『중앙일보(中央日報)』(난징/南京, 1931년 7월 14일자), 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1권, pp.527~528.
註 078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63.
註 079 국사편찬위원회 편(國史編纂委員會編), 『한국 독립운동사(韓國 獨立運動史)』 5(五), p.773.
한편 일제 측 자료에서는 1931년 10월 20일경 국민부가 근거지를 지안/즙안현(辑安县/輯安縣) 제8구(第八區) 팡화차오안/방화초안(芳花草岸) 마티고우/마제구(马蹄沟/馬蹄溝)로 이전하여 17세부터 30세까지의 장정을 조선인 2호(戶)당 1명의 비율로 모병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측은 이후에도 계속 신빈(新宾/新賓)을 중심으로 한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의 활동에 대해 보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631~633.)
註 08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605~608.
註 08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640.
註 08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642~643.
註 083 민산(民山), 「조선혁명(朝鮮革命)에 있어서의 군사운동(軍事運動)에 대(對)한 회고(回顧)와 전망(展望)」,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綫)』제2기(第二期)(1938년 4월 25일), 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3권, pp.275~276.
註 084 중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혁명군은 남만 철로연선에서 유격전술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는 등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조선혁명군이 변화만단(變化萬端)하여 일본군은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군수(軍需)에 있어서도 중국군에 완전히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의 경제적 원조를 받고 있다고 한다(중국국민정부군사위원회정치부/中國國民政府軍事委員會政治部, 「십년적조선반일운동(十年的朝鮮反日運動)」(1938년 6월), 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1권, pp.73~74.)
* 변화만단(變化萬端) : 변화무쌍
註 085 애국동지원호회 편(愛國同志援護會編), 앞 책, p.283.
註 086 타오시셩/도희성(陶希聖/陶希聖), 「동북의용군정형(東北義勇軍情形)」, 『독립평론(獨立評論)』제24호(第二十四號)(1932년 5월 26일), 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p.1591~1594.
註 087 왕통쉬안/왕동헌(王彤轩/王彤軒), 「중한병견항일중일대보귀적신(中韓並肩抗日中一封寶貴的信)」, 『한민(韓民)』제1권 제5기(第一卷 第五期)(충칭/重慶 : 한민월간사/韓民月刊社, 1941. 6. 15), 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3권, p.369.
註 088 채근식(蔡根植), 앞 책, pp.166~167.
註 08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641.
註 090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67.
註 091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68.
제1로군 사령관 박대호(朴大鎬)는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425에는 박대호(朴大浩)로 기록되어 있다.
註 092 김정명 편(金正明編), 앞 책, p.1089.
註 09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654
註 094 만주국군정부고문부 편(滿洲國軍政府顧問部編), 『만주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產匪の硏究)』제1집(1936), p.415, 김준엽(金俊燁)·김창순(金昌順), 앞 책, p.205에서 재인용.
註 095 김준엽(金俊燁)·김창순(金昌順), 앞 책, pp.205~206에서 재인용.
註 096 민산(民山), 「조선혁명군사활동지회고여전망(朝鮮革命軍事活動之回顧與展望)」, 추헌ㅅ 편(秋憲樹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3권, pp.276~277. 여기서 조선혁명군 총사령은 김호석(金浩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혁명군은 동북항일연군 제1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註 097 특히 간도 일대의 한인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에 가담하여 전체병력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장칭타이/张庆泰/張慶泰/장경태, 「아문적전우(我們的戰友)」,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제4기(第四期)(1938. 5. 25), 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3권, p.287 ; 중국국민정부군사위원회정치부(中國國民政府軍事委員會政治部), 「십년래적조선반일운동(十年來的朝鮮反日運動)」, 추헌수 편(秋樹憲編), 『자료 한국독립운동(資料 韓國獨立運動)』제1권,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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