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왕 - 네이버

백제/왕 2012. 11. 27. 03:26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445


고구려 군에게 힘없이 무너지며 개로왕의 죽음으로 한성 시대를 마감한 백제는 웅진으로 옮긴 뒤에도 대내적인 위험과 불안에 시달리며 왕권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백제의 왕이 된 동성왕은 위험과 불안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바다를 건너 왕위에 오른 모대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牟大),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이름은 말다(末多)였다. 동성왕의 아버지 곤지(昆支)는 백제의 제22대 왕인 문주왕(재위 475∼477)의 동생이자 개로왕의 아들이며([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기록), 훗날의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복형이다. 곤지는 개로왕에 의해 일본에 파견되어 오늘날의 남부 오사카 지역인 가와치아스카(河內近飛鳥)에 15년 간 머물며 그 곳의 백제계 사람들을 다스렸다. (가와치아스카에는 곤지를 제사 지내는 아스카베(飛鳥戶) 신사가 있다.) 곤지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을 돕기 위해 477년 백제로 돌아갔지만,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당시 병관좌평 해구(解仇) 세력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주왕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아들 삼근왕이 왕위를 이었지만 15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상적인 죽음이 아닌 정치적 음모에 의한 죽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백제의 정국은 어린 삼근왕을 옹립한 진씨(眞氏) 세력과 왕위를 넘보는 해구 세력 사이의 심각한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삼근왕의 뒤를 누가 이을 것인가? 곤지의 다섯 아들 가운데 모대(동성왕)와 사마(무령왕)가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다.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진씨 세력은 이 가운데 모대를 선택했다. 사마보다 나이가 어리고 일본에서 오래 산 모대를 왕으로 세우는 것이, 자신들의 실권을 보전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
 
결국 모대, 즉 동성왕은 쓰쿠시(筑紫) 지역 병사 500명의 호위 속에 귀국하여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진씨 세력의 진로를 병관좌평으로 임명했다. 백제 국내 사정에 어둡고 유력한 귀족 세력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동성왕의 권력 기반은 취약했다. 일본의 백제계 이주민 세력과 가와치아스카 지역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까지는 힘이 되어주었을 법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먼 바다 건너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다

동성왕은 어떻게 해서든 귀족 세력의 힘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동성왕은 귀족들이 부임지를 바꿔가며 지방을 다스리도록 했다. 중앙에서 파견한 귀족이 지방을 다스림으로써 해당 지역 토착 세력에 대한 중앙의 통제권을 유지, 강화하면서 동시에 중앙 귀족 세력도 제어하고자 했다. 부임지를 바꾸면 중앙에서 파견한 귀족이 토착 세력화되는 것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여 백제의 영향권 안에 두는 공을 세운 귀족에게 높은 벼슬을 내림으로써, 귀족들을 경쟁시키는 효과도 거두고자 했다.
 
한성 백제 시대에는 진씨와 해씨(解氏) 세력만이 요직에 오르며 국정을 좌지우지했지만, 동성왕은 이들을 견제하면서 사씨(沙氏), 연씨(燕氏), 백씨(苩氏) 등 훨씬 더 다양한 세력을 등용했다. 동성왕이 이렇게 새롭게 등용한 세력들은 주로 금강 일대 충남 지역에 기반을 둔 세력이었다. 한성 백제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구 귀족과 웅진 시대에 새롭게 등용한 신진 귀족들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구도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 동성왕의 구상이었다.
 
이러한 동성왕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성왕은 500년 봄 궁성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이라는 이름의 큰 누각을 지었다. 흉년이 들어 민심이 악화된 가운데 귀족들도 임류각 건설에 반대했지만, 동성왕은 공사를 강행하고 완공한 뒤 큰 연회를 베풀기까지 했다. 이를 두고 동성왕이 백성의 고통에는 눈 감고 쾌락에 탐닉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만큼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결과였다고 볼 수도 있다.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신라와 동맹하다

동성왕의 대외 정책에서 가장 큰 과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것이었다. 486년에는 고구려 수군의 봉쇄를 뚫고 남제로 사신을 보내 관계를 돈독히 했고, 493년에는 신라에 혼인 동맹을 요청하여 신라 왕족 이찬 비지(比智)의 딸과 혼인했다. 동성왕이 신라 왕실 여인과 혼인한 것은 복합적인 목적을 염두에 둔 일이었다. 그 때까지 전통적으로 백제 왕의 왕비는 진씨 또는 해씨 출신 여인이었다. 진씨와 해씨는 왕의 처족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것인데, 동성왕 역시 이들 귀족 가문 여인을 이미 비로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새롭게 신라 왕실 여인을 비로 맞이한 것은, 진씨와 해씨 세력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신라와의 동맹을 통해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였다.
 
혼인으로 동맹을 맺은 바로 다음 해 494년 고구려와 신라가 오늘날의 충북 괴산 일대에서 벌인 전투에서 신라가 패하여 성 안에 고립되자, 동성왕은 3천 군사를 긴급히 보내 신라 군을 구원해냈다. 그 이듬해인 495년에는 백제의 치양성이 고구려 군에 포위당한 상황에서 동성왕이 신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신라가 이에 응해 지원군을 보냄으로써 고구려 군이 물러갔다. 동성왕은 요충지인 탄현에 일종의 울타리 방어시설인 책(柵)을 세워 신라의 침입에도 대비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여주었고 우두성(牛頭城), 사현성(沙峴城), 이산성(耳山城) 등을 쌓아 수도 웅진의 방어망을 튼튼하게 했다.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 북위와의 전쟁

각별히 눈여겨 볼만한 동성왕 때의 전쟁 기록으로는 중국 역사서 [남제서(南齊書)]에 490년의 일로 기록된 것이 있다. ‘위나라(북위)가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에 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어 위나라 군대를 기습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도 ‘위나라에서 군대를 보내와서 정벌했으나 우리에게 패했다’(488년)는 기록이 있고, 중국 측 사서 [자치통감]에도 ‘위나라가 군대를 보내 백제를 쳤지만 백제에게 패했다’(영명 6년조)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관련 기록들을 바탕으로 백제가 중국 대륙인 요서 지역에서 북위와 맞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북위가 기병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했다는 기록과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해당 기록에 인용된 동성왕이 남제에 올린 표문)는 표현, 그 밖의 여러 다른 사서 기록을 볼 때 대규모 육상전이 벌어진 전장이 백제가 지배하던 요서 지역이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큰 선박을 부순 공’ 또한 언급되고 있어 전쟁의 양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남제가 내린 장군호의 지명들이 중국보다는 한반도의 백제 영역 지명이라는 점에서, 요서 지역으로 확정하기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자객의 칼에 쓰러진 동성왕

진작부터 사냥을 자주하던 동성왕은 즉위한지 23년째 되는 501년 가을부터 사비성 근처 벌판에서 사냥을 자주 했다. 동성왕의 사냥은 단순한 사냥이 아니라 군사 통제권을 점검하고 강화함으로써 귀족 세력의 모반 가능성에 대비하는 행위, 즉 고도의 정치적, 군사적 행위에 가까웠다. 또한 개척되지 않은 지역에서 사냥을 함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에도 사냥을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동성왕은 활을 잘 쏘기로 유명했고 담력도 유달리 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사비성 벌판에서 사냥을 하던 동성왕은 큰 눈이 내려 길이 막히자 마포촌에서 묵게 되었다. 그리고 자객의 칼에 찔려 큰 부상을 당하여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객을 보낸 이는 누구인가? 웅진의 토착 호족으로 위사좌평에 오른 백가(苩加)였다. 백가는 동성왕이 구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한 신진 귀족 세력이었지만, 신진 세력의 힘이 강해지자 동성왕은 백가를 가림성(부여군 임천면) 성주로 내보냈다. 본래 근거지에서 벗어나게 된 백가를 비롯한 신진 세력의 불만이 급기야 암살 시도로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왕을 피습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백가 세력은 처벌받거나 진압되지 않았다. 백가는 계속해서 반기를 들다가 무령왕에 의해 진압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동성왕을 귀족 세력 전체가 사실상 거부했다고 볼 수 있다.
 
무령왕, 성왕 시대의 발전을 예비한 동성왕 시대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의 죽음에 관해 백제 측 기록을 인용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제 말다왕이 포학무도하여 국인(國人)이 공히 제거하였다.’ 실제로 동성왕은 흉년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고통 받는 상황에서 임류각을 짓고 연회를 여는 등 실정(失政)이라 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동성왕 시대 백제에는 기상이변이 잦아 흉년과 기근, 홍수가 빈발했고 백제 주민들이 이탈하여 고구려나 신라로 향하는 일도 일어났다. 그럼에도 동성왕은 나라의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말도 듣지 않았다. ‘국인이 공히 제거하였다’는 기록은 동성왕이 말년으로 갈수록 귀족들과 더욱 멀어지고 민심과도 멀어졌다는 것을 짐작케 해준다.
 
그렇다면 동성왕은 실패한 군주에 불과한 인물인가?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고구려 장수왕에게 대패하며 개로왕이 죽임 당하고 한성 시대를 마감해야 했던 백제는, 웅진으로 옮기면서 매우 취약하고 불안한 상황에 계속 놓여있었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은 국방에 주력했지만 귀족 세력에게 사실상 실권을 빼앗겨야 했고 삼근왕은 단명했다. 일본에서 귀국해 왕위에 오른 동성왕은 이러한 대내외 불안을 해소시키고 왕권의 기반을 새롭게 다져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신진 귀족 세력을 등용하고 웅진과 사비 일대에서 자주 사냥을 하며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는 등의 노력은 바로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비록 귀족 세력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까지 맞게 되었지만, 동성왕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과 그 다음 성왕 시대 백제의 정치와 문화가 안정과 발전을 누릴 수 있게 된 초석이, 바로 동성왕 시대에 놓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성 백제 시대의 종언과 함께 크게 위축된 백제 왕실의 지배력이 다시 확장, 강화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군주. 동성왕은 그런 군주였다.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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