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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진사왕과 아신왕의 올바른 이해

사서를 보자 이렇게 나와 있다

백제 진사왕이 곧바로 서서 응신천황에게 예를 갖추지 않으매 기각숙례와 우전시대숙례 그리고 석천숙레와 목토숙레를 보내어 그 예가 없음을 힐책하자 이로 인하여 백제국은 곧 진사왕을 시해하고 사과하니 아화(阿花)를 즉위시키고 귀환했다 <일본서기 응신 392년이나 391년으로 기년을 조정하는 게 맞음> 

<진사가 예禮를 잃었다> 함은 고구려의 남진(南進)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큰 타격을 끼친 일을 두고 화가 난 응신(應神 -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이 왜땅으로 가기 전에 진씨 왕족이었음을 앞으로 끌어올린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이 <응당 처음부터 아신태자에게 돌아갈 왕위를 물려받았으니 이제는 돌려주는 게 마땅하다는 의견을 보였다>는 말이다 이로보아 응신과 백제 왕실은 처음부터 특수한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임을 알려준다 

기각 등 네 사람은 모두 무내숙례계로서 무내숙레는 직접 백제와 왜의 교섭책임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응신이나 백제왕과의 사이에서 핵심 역할을 하던 족단(族團)으로 진사왕을 책망하려고 파견한 네 사람이 모두 무내계인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들은 모두가 뒷날 응신을 호위하여 왜로 이동한 측근 장군가(將軍家)이다 응신이 백제에 보낸 사신들은 백제왕이 예(禮)가 없음을 힐책하였을 뿐 응신은 직접 진사왕을 제거하는 일에 가담하거나 형향을 미치지 않고 다만 백제의 사정이 돌아가는 걸 지켜보다가 그것을 인정하기만 할 뿐이다 진사왕의 행동을 보면 주목할 게 있다 왕이 정상인을 벗어 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는 상황에서 그 해 8월에 사냥이나 다니고 있거나 관미성 싸움이 치열할 즈음에도 사냥을 나가 열흘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이 무렵에 이미 그가 아신왕의 정변으로 힘을 잃고 허수아비 왕으로 내려앉았음을 짐작케 해 준다 네 장군들은 모두 근구수계의 손자들이며 아신왕의 사촌혈족인 백제 사람들로서 응신의 측근이기도 한데 진사왕의 죽음과 아화왕의 즉위에 도움을 주었다 

이 가운데 목씨도 끼어 있음은 이들이 벌써부터 가라지역을 기반으로 중앙에 들어와서 응신을 따라 서토(西土)까지 발을 넓히고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바로 이일 때문에 고구려는 나중에 왜로 들어간 응신을 보고 <광개토왕비문.>에서 <신묘년-391년-이래 왜倭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쳤다>라고 비아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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