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8/2009121800987.html


唐나라 벌벌 떨게 한 발해 水軍장군 장문휴
[Why] [유석재의 新역사속의 WHY] 
유석재 karma@chosun.com 입력 : 2009.12.19 02:42 / 수정 : 2009.12.19 20:42

■한국역사상 해군의 첫 中대륙 공격
■中과 싸운 당시 장수들 기록 거의 없어

"적군의 배가 바다 위로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서기 732년 9월 당(唐)나라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은 갑작스런 급보에 혼비백산했다. 산동(山東) 반도 북단 현 봉래(蓬萊)시에 치소가 있던 등주는 지금의 연대(煙臺)와 위해(威海)까지 관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해상 교통과 물자 교역의 중심지였다. 등주를 급습한 병력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발해(渤海)의 장군 장문휴(張文休)가 이끄는 해군이었다. 순식간에 상륙한 이들은 곧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자사 위준을 죽였다.

북한 학계에선 장문휴가 인근 내주(萊州)까지 산동반도 전역을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이 소식을 들은 황제 현종(玄宗)은 기겁했다. 황제는 좌령장군 개복순(蓋福順)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발해군을 치도록 했다.

이것은 이미 산동 일대의 당나라 주둔군이 장문휴 군대에 의해 거의 궤멸된 상황이었음을 의미한다. 등주에 도착한 개복순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문휴 군대가 이미 모두 철수해 버렸던 것이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기동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육지 쪽에서 또다시 급보가 전해졌다. 발해군이 요하를 건너 만리장성 아래까지 진격한 것이다.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수륙(水陸) 양 방면의 전격전이었다.

"대문예(大門藝)를 내놓아라!" 발해와 당이 전쟁을 벌이게 된 경위는 발해를 세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이 죽고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2대 무왕(武王)으로 즉위한 7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왕은 인안(仁安)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했고 옛 고구려 영역 수복에도 힘썼다. 이를 곱게 볼 리 없던 당은 북쪽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손잡고 발해를 견제하려 했다. 자칫 협공당할 수 있는 형국에서 무왕은 726년 동생 대문예를 장군으로 삼아 흑수말갈 정복전을 벌였다.

그러나 친당파였던 대문예는 도중에 군사를 버리고 당나라로 망명했다. 현종은 대문예에게 벼슬을 내리고 보호했는데 무왕은 거듭 사신을 보내 대문예 송환을 요청했다. 732년 7월 현종은 발해에 칙서를 보냈다.

"도망자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형제애에 흠이 갈까 우려하는 것"이라고 변명한 뒤 은근한 협박까지 했다. 이 칙서를 쓴 공으로 승진한 사람이 저 유명한 시인 장구령(張九齡)이었다.

무왕은 당과의 전면전을 택했다. 칙서 두 달 만에 등주를 공격한 것은 이미 훨씬 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장문휴의 해군은 압록강~요동반도 남단~묘도열도(廟島列島)를 거쳐 등주를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당이 미처 손을 써볼 틈이 없이 초토화됐던 전격전이었다.

거의 동시에 무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당의 영토로 진격해 요서(遼西)의 마도산(馬都山·지금의 승덕 부근)에까지 이르렀다. '신당서'가 "400리에 걸쳐 큰 돌을 쌓아 방어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대단한 군세였다.

당은 유주(幽州·지금의 하북성) 일대에서 군대를 징발했는데 그 해 세금을 감면해야 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위기를 느낀 당은 신라에도 원군을 요청했다. 733년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金允中) 등이 신라군을 이끌고 발해로 진군했지만 때마침 폭설이 내려 군사의 반을 잃고 돌아섰다. 이제 발해는 당과 신라 모두에 새로운 강국(强國)으로 떠올랐다.

최근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북경 일대를 점령했다는 중국 측 기록이 소개됐고, 백제가 요서와 산동 일대에 진출했다는 설이 꾸준히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해군을 이끌고 중국 대륙을 공격해 상륙작전을 펼쳤다는 분명한 기록은 장문휴의 등주 정벌이 유일하다.

장문휴는 누구였을까? 아쉽게도 등주 공격의 기록 말고는 생몰연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장(張)씨가 대(大)·고(高)씨 등과 함께 발해의 5대 성(姓)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유력 가문 출신의 귀족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과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뒀던 고구려와 발해의 장군들 중 대부분은 전쟁 전후의 행적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장문휴뿐 아니라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양만춘(楊萬春)도 마찬가지다. 북주(北周)의 요동 침공을 막아낸 고구려 영양왕의 매부만큼은 약간의 기록이 전하는데 그가 온달(溫達·?~590)이었다.

고구려와 발해 스스로 남긴 역사 기록이 현재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탓에 대국 당나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장문휴의 존재감 또한 희미해졌던 것이다. 1990년대에 출간된 한 가상소설에선 한국의 신형 잠수함 이름이 '장문휴함'인 것으로 설정되기도 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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