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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階伯)은 망한 나라 백제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죽을 줄 알면서도 최후의 선택을 순순히 받아들인 충절과 용기가 후세에 길이 빛난다. 그러나 전장에 나가기 전, 처자를 몰살한 대목은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되었다. 그에게는 그처럼 극단적인 선택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가. 천고의 충절 속에서도 그의 마지막 길이 세상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정녕 사람으로 사람 노릇 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계백에 대한 상반된 평가
계백의 죽음만큼 극적인 것이 없지만, 그래서 이에 대한 평가도 극을 달린다. 특히 처자를 몰살하고 전장으로 뛰쳐나간 대목 때문이다. 역사서의 화려한 수식과 달리, 이를 멋지지 않은 사내의 행동이라고 평한 이도 있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의 부인은 어린 자식을 껴안고 “죽을 테면 너나 죽어라”고 소리친다. 감독이 고안한 장면이지만 뜻밖의 역사 해석이었다.
논란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조선 전기 유학자 권근(權近)은 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도리에 벗어남이 심하다. 비록 국난에 반드시 죽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힘껏 싸워 이길 계책은 없었던 것이니, 이는 먼저 사기를 잃고 패배를 부르는 일이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반대의 입장에 선 이가 조선 후기의 유학자 안정복(安鼎福)이었다. 그는 “죽지 않는 것이 몸을 보전함이 되는 줄만 알았고, 죽는 데 마땅함을 얻는 것이 몸을 보전함이 되는 줄은 모른 것이다”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대체 장수가 되는 도(道)는 무엇보다도 내 집과 내 몸을 잊은 뒤라야 사졸(士卒)들의 죽을 결심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니, 만약 조금이라도 내가 먼저 살고자 하는 마음을 둔다면 군심(軍心)이 해이되어 각각 제 살 궁리와 처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이것이야말로 더없이 사기를 저상(沮喪)시키는 것이다. 권(權) 씨는 계백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또한 병법도 몰랐었다.” ([동사강목]에서)
죽음은 단지 몸이 죽음만 뜻하지 않는다. 치욕을 당하고 살아 있는 몸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고, 몸은 죽었으나 그 의기가 살아 있으면 그것으로 살아 있음이다. 안정복의 주장은 거기에 있다. 그뿐만 아니다. 계백의 싸움이야말로 지(智), 인(仁), 용(勇), 신(信), 의(義), 충(忠)을 모두 갖춘 일대 거사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면서 삼국의 충신과 의사 가운데 계백을 으뜸으로 쳤다.
비극적인 영웅의 외로운 길
사실 계백의 황산벌 싸움과 그 충절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견을 달 수 없다. 질 줄 안 싸움이었던 것은 누구보다 계백 자신이 잘 알았다. 그러기에 처자를 먼저 죽이지 않았는가. 중과부적에 불리한 형세마저 하나도 계백에게 유리한 구석이란 없었다. 그럴 줄 알면서도 목숨을 바친 그 충성심에 다들 혀를 내두를 따름이다.
다만 의견이 갈리기는 처자를 죽인 대목이다. 그 판단과 선택은 과연 옳았던가. 권근이 말한바, 사기를 잃고 패배를 불러들인 일인지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인간적인 도리의 측면에서 이는 분명 과했고, 심지어 식구의 목숨이 계백의 제 것인 양 독단적으로 여기지나 않았는지.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한다 한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영예스러운 길을 택할 권리와 기회가 주어졌어야 했다. 다분히 계백의 일방적인 결정에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하지나 않았는지. 그렇게 계백의 행동은 가부장적인 독단과 일방의 혐의를 벗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책상 위에서 부려보는 호사가의 입방정에 지나지 않는다. 계백의 상황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 그의 판단이 어디에서 나왔을지라도 죽음을 걸고 내린 결정이었고, 개인을 넘어 나라의 운명이 달린 일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실 충신의 말은 귓등으로 흘리고 제 입맛에만 맞게 사태를 끌고 간 의자왕의 행동이 계백을 벼랑으로 내몰았다. 그 벼랑에서 기꺼이 떨어지리라 결심한 사람에 대한 예우는 세 치 혀로 시비를 가리는 이따위 논전이 아니다. 이 비극적인 영웅은 외로운 길을 홀로 갔다.
계백의 육성으로 들어보는 당시 상황
좌평 성충(成忠)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리라 예상했고, 육로로 오면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수군이면 기벌포(伎伐浦)를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유언처럼 의자왕에게 간언하였다. 의자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 사태가 심각해진 다음에도 신하들 사이에서는 지공과 속공의 지리멸렬한 말싸움만 계속되었다. 마지막으로 판단하자고 유배 간 좌평 흥수(興首)에게 사람을 보내지만 그에게서는 성충의 말과 같다는 짤막한 답변만이 돌아왔다. 그마저도 듣지 않은 것이 의자왕이었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의자왕은 계백을 불렀다. 이때 그의 계급이 달솔이었다. 16관등 가운데 두 번째인 꽤나 높은 자리였지만 그의 가용병력은 5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말이 좋아 결사대이지, 군사가 있다면야 왜 더 데려가지 않았겠는가. 이 상황에 처한 계백의 육성을 들어보자. 역사서의 지면을 빌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한 나라의 힘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깨끗이 죽는 편이 낫겠다.”
출정하기 전 자기의 처자를 죽이며 한 말이다. 앞서 이미 자세히 설명한 대로이다. [삼국사기] 열전의 ‘계백’에 나온다.
“옛날 월(越) 나라 왕 구천(句踐)은 5천 명의 군사로 오(吳) 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 반드시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5천 결사대를 모아놓고 한 말이다. 역시 [삼국사기] 열전의 ‘계백’에 나온다. 비장한 결의를 보이는 대목이지만, 구천의 5천이니 오의 70만은 한 번에 맞붙어 싸운 구체적인 숫자가 아니다.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후에 기사회생하여 오를 멸망시킨 월이기에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신라를 적대할 수 없겠구나. 소년조차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사들이야 어떠하겠는가.”
관창이 단신으로 쳐들어와 붙잡혔을 때 그의 투구를 벗겨보며 한 말이다. [삼국사기] 열전의 ‘관창’에 나온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면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장함 그 자체이다. 그리고 상황은 갈수록 어두워진다.
술잔 잡아 계백에게 제 올리자니
황산벌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이다. 탄현이 거기서 더 북쪽으로 있고, 탄현을 지나오면 오른쪽으로 계룡산만 우뚝 솟았을 뿐 평평한 들판이 이어진다. 그 들판에서 네 번 싸워 이긴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계백은 신라 화랑 관창을 붙잡아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그때 그는 최후를 예감했으리라. 앞서 계백의 세 번째 육성은 관창의 전기를 짓느라 집어넣었겠지만, 장렬한 패배를 눈앞에 둔 계백의 심정을 잘 표현했다고 보인다.
강기슭을 가로막은 철옹성만 보았기에 惟看鐵甕橫江岸
구름처럼 전함이 바다 물결 건너올 줄 몰랐지 不信雲帆度海波
술잔 잡아 계백에게 제사를 올리고 싶은데 欲把殘杯酹階伯
안개 낀 낡은 사당 덩굴풀이 우거졌네 荒祠煙雨暗藤蘿
정약용이 쓴 ‘부여 회고(扶餘懷古)’라는 제목의 시이다. 쓸쓸함이 망한 나라의 초라한 도읍지를 돌며 지은 시 못지않다. 그러나 지금 충남 논산시 부적면 수락산 언덕에 있는 계백의 묘는 꽤 그럴듯하다. 아직은 확정할 수 없으나, 계백의 목이 잘렸다고 전하는 수락산(首落山)과 계백의 시신을 급히 가매장하였다는 가장곡(假葬谷)이 이곳이어서, 계백의 진짜 묘로 믿는 사람이 많다. 계백의 위패를 모신 충곡서원(忠谷書院)이 바로 뒤편에 있다. 다산이 노래한 낡은 사당이 그것이다.
글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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