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545161.html
땅이름/ 책성 ①
등록 :2004-06-10 00:00
서기 72년, 태조대왕은 관나부 패자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쳤다. 74년, 겨울 10월에 환나부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쳐 그 나라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앉혔다. 서기 98년 봄 3월에 왕은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돌아보았다. 여러 신하와 잔치를 베풀어 책성을 지키는 벼슬아치들에게 선물을 내렸다. 바위에 공적을 새기고 일곱 달 만인 겨울 10월에 왕은 책성에서 돌아왔다.
삼국 때 것으로서, 다짐(판축)으로 쌓은 흙성(토성)과 돌을 맞물리게 쌓은 돌성(석성)이 많이 남아있다. 한편, 통나무를 깎아 촘촘히 박은 ‘울짱’(울타리)이 방어성으로나 임시 주둔성으로 널리 쓰였다. 오랜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토성, 석성을 쌓으면서 성 밖에 도랑(해자)과 울짱을 덧대어 짓기도 하였다. 고구려 책성은 처음 ‘울짱’(柵城)으로 지었다가 돌성으로 바꾼 듯하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요나라의) 개원현(開遠縣)은 본디 책성이 있던 땅으로, 고구려와 발해 때 용원현(龍原縣)이라고 적어 ‘책성’이 마치 고구려 때 이름이 아닌 것처럼 적고 있다. 지금의 훈춘(琿春) 서쪽 6㎞에 있는 팔련성(八連城)은 발해의 동경 용원부로서, 일본과 무역하던 출발지였다. 팔련성에서 남으로 5㎞ 떨어진 삼가자향(三家子鄕) 고성촌(古城村)에는 두 성이 땅콩처럼 남북으로 붙어 있는데, 남쪽이 책성, 북쪽이 요의 ‘비우성’이라고 한다. 가탐의 〈고금군국지〉를 보면, 함남 덕원의 천정군(얼모로·於乙買)에서 책성까지 서른아홉 역이 있었다. 조나(藻那)의 藻(조)가 바닷말과 잇닿은 곳으로 보이며, 조나와 주나, 두 나라는 국내성과 책성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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