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afe.daum.net/alhc/5MpD/67?docid=473373991


길림시 용담산 고구려산성 및 그 부근 위성 조사보고 
(吉林市龍潭山高句麗山城及其附近衛城調査報告) 
동 학 증(董 學 增) 

1962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길림성박물관 장만정, 진상위, 이무걸, 류훤당, 한숙화 등 다섯 사람과 필자가 함께 길림성급 문물보호단위인 용담산 고구려산성 유적을 조사하였다. 1973년과 1982년 필자는 선후하여 길림시 교구문화관 문지, 길림시박물관 동조권, 구기, 김려화 등과 함께 용담산산성에 대해 재조사를 진행한 동시에 부근의 삼도령자산성(三道嶺子山城)과 동단산산성(東團山山城)을 조사하여 과거 잘 못 기재되었거나 빠진 부분을 규정하고 새로운 발견과 인식이 있어 여기 아래와 같이 조사 결과를 보고하는 바이다. 


1. 용담산 지리환경 

용담산은 길림시구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시중심에서 약 7km 떨어진 곳이다. 해발 388.3m, 부근 지표보다 100여m 높다. 산의 동쪽과 남쪽은 기복이 낮은 산이 이어 있고, 산의 서쪽은 남으로 부터 북으로 흐르는 송화강이며 강의 좌측은 넓은 충적평원이다. 서남쪽은 알하하와 동단산과 가까운데 두 산의 거리는 2.5km에 불과하고 서북쪽은 송화강과 삼도령자 칠가자 서산이 바라다 보이는데 두 산의 거리는 14km 조금 더 된다. 


2. 용담산산성의 형태 

용담산형태는 마치 빈그릇과 비슷하다. 주위는 산등이고 복판은 깊은 골짝, 산성의 성곽은 산등성 위에 쌓여져 있다. 성곽의 평면은 일정치 않는 다변형인데 동서는 좀 넓고 남북은 좀 좁은편인데 동쪽벽의 길이 1,082m, 서쪽벽의 길이 528m, 남쪽벽 길이 405m, 북쪽벽 길이 381m, 둘레 길이 2,396m이다. 성벽의 가장 높은 곳은 10m쯤 되고, 낮은 곳은 2m도 못 된다. 밑의 넓이 3--10m, 위의 넓이 1--2m, 횡단면은 계단형을 이루고 있다. 성벽의 대부분은 황토에 응회암자갈을 섞어서 쌓은 것이고 소부분은 황토를 다져서 쌓은 것이다. 서문의 단층면에서 보면 다진 두께는 6--12m, 넓이 1--1.5m 쯤인데 다진자리를 볼 수 없으니 긴 돌로 눌러 다진 것 인 듯 하다.
 
성의 서, 남, 북 삼면의 우묵한 곳에 각기 문이 하나씩 있다. 서문은 금반산 신작로 산허리에 있는데 넓이 24m, 아마 정문인 듯 하다. 남,북 두 문은 곁문같다. 성곽사면의 두드러진 곳에 각기 평대(平台)가 하나씩 있는데 길이는 20-25m, 넓이 6--9m, 그 중 남평대가 가장 높은데 산의 봉우리여서 “남천문”이라 한다. 평대 위에서 붉은색의 노끈무늬기와를 발견한 적이 있다. 이것은 그때에 그 위에 각루(角樓)와 같은 종류의 건축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3. 용담산산성내의 건축 

성내의 주요한 건축이란 속칭 “수뢰(水牢)” 와 “한뢰(旱牢)”이다. 
“수뢰” 또는 “용담(龍潭)”이라고 하는데 산성 서북쪽 제일 낮은 곳에 있다. 용담산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위 “수뢰”란 실제는 저수지이다. 못은 “凸”형인데 동서길이 52.8m, 남북넓이 25.75m, 凸 두드러저 나온 부분의 길이 14.60m, 넓이 2.05m이다. 못의 동, 서, 북 삼면은 길이 40, 넓이 20, 둑게 30cm의 응회암덩어리와 화강암덩어리로 쌓여 있다. 못의 표면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모양인데 넓이 20--30cm의 세 개 단계로 되여 있다. 남면은 아래로 약 1m가량 곧은 암벽이고 그 아래는 바위의 경사면에 따라 같지 않은 화강암덩어리를 펴서 45°경사로 밑까지 닿게 되어 있다. 북면 동쪽 못 아래 1m되는 곳에 돌로 쌓은 배수구멍이 있는데 안은 좁고 외면은 넓어 벽 밖으로 통하게 되여 있어 넘치는 물은 이리로 배출되게 되어 있다. 배수구멍은 산성의 북쪽벽 밑을 통하게 되어 있으니 저수지와 성벽은 같은 시기의 건축이라 할 수 있다. 배수구 위엔 길이 2.2, 두께 0.9m의 덮개돌이 있는데 동쪽벽은 네개, 서쪽벽은 세개 그 길이는 35--40, 두께는 25--40cm이다. 배수구의 길이는 1.5, 높이는 1m이다. 저수지의 물은 산위의 비물과 눈이 녹아서 고인 것이고, 샘물도 있어서 일년내내 물이 마르지 않고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통상 일만여평방피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 이 못의 용도는 전쟁시 성내에 증가된 병마의 음료를 해결하기 위한 듯 하다. 저수지 서편 가장자리에는 응회암으로 쌓은 30개의 돌계단이 있는데 그 넓이는 약 2m, 각 계단의 높이는 30cm좌우, 이 계단을 따라 저수지가에 내려갈 수 있다. 현지 노인의 말에 의하면 청나라때에도 이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계단의 질로 보아 저수지의 부속건축일 것으로 판단된다. 
 
“한뢰”는 산성 서남쪽 산등성이 가까운 곳에 있는데 “수뢰(水牢)”와의 거리는 약420m이며, 길이 25--58 넓이 20-26cm 장방형응회암과 화강암으로 쌓았는데 평면은 정원형을 이루고 있다. 둘레 벽은 깎은 듯이 곧게 세워졌다. 산바위를 기초로 한 이 한뢰의 밑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경사형이다. 그 직경이 10.6m, 깊이 2--3m 물이 고이지 않는다. “한뢰”의 결구는 저수지와 같고 석질도 같아 그것들은 같은 시기의 건축임을 알 수 있다. 1973년 길림시문물관리위원회에서 “한뢰”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했는데 아무런 유물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 지세와 심도로 판단할 때 군사물자를 저장하는 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움 주변의 지면에 돌로서 두 겹을 깔았는데 무거운 압력을 능히 막을 수 있다. 이로 보아 당년에는 두텁고 무거운 두껑이 있는 건축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4. 용담산산성내의 유물 

<<길림통지>>의 기재에 의하면 “당년의 유물들이 다 없어지지 않고 부서진 벽돌과 기와, 깨어진 도기와 자기 등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지금도 산성내를 답사하면 고구려시기의 흙질붉은색끈무늬기와 조각을 주을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 도기, 한나라 기와 및 기타 한문화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958년 가을 길림시공원관리처에서 저수지 안의 진흙을 전부 청소했는데 그 중에서 흑질륜제측흑회색도관 3건(그 중 한개는 심하게 파손 되었음)과 도호(陶壺) 한 건을 얻었다. 그 토질, 불에 굽은 정도, 색깔 등으로 볼 때 금나라 시대 도기와 비슷하다. 또 저수지 안에서 六耳鐵鍋 한 건과 雙環耳鐵釜 한 건을 발견했다. 鍋와 釜의 조형은 길림시 근교의 강남향 영광 금대(金代) 기물과 비슷하니 금대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산성 서문곁에서 돌절구(石臼) 한 건을 발견했는데 화강암인 그 형태는 영길현 오랍가향 부이합 요금고성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다. 


5. 동단산산성과 삼도령자산성 

동단산은 길림시 근교 강남향에 위치,하며 장춘(長春)과 도문(圖們)을 잇는 길림철교 동쪽에 있는 자그만한 산이다. 해발 252m이며 부근 지면보다 약 60m가량 솟아 있다. 산의 동남쪽은 가파로운데 송화강이 남으로 부터 북으로 산을 스쳐 흐르고 산의 서북쪽은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다. 북쪽을 알하하(알하河)를 사이에 두고 용담산을 맞보고 있다. 
산성은 산마루와 산허리에 쌓여 있다. 성곽 세 겹이 있는데, 첫 겹 성벽(즉 외성)과 곁 성벽(즉 중성)은 아직 보존되여 있는데 세 겹(즉 내성)은 해방전 국민당 반동군대들이 호를 쌓으면서 파괴되었다. 외성의 동서길이는 230m, 남북너비는 115m, 높이는 10m, 위의 너비 약 3m. 중성의 동서길이 170m, 남북너비 62m, 높이 12m,. 내성은 산마루에서 추측컨대 동서길이 60m, 남북너비 15m쯤 된다. 동남향으로 측량하면 내성과 중성의 간격 53.5m, 중성과 외성의 거리 35.2m, 성벽의 단층으로 보아 황토와 응회암을 섞어 쌓은 것으로 판단된다. 기재에 의하면 외성의 <<동서에 각기 한 개 문>>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변별키 어렵다. 이문신 선생의 당년조사에 의하면 “이 성벽(외성) 동북 모퉁이에 저수지 하나가 있는데 630여m, 깊이는 수미터 이다.”라고 하나 지금은 찾기 어렵다. 
 
동단산 기슭의 농토엔 고구려 건축유물이 많이 널려 있는데 채집된 것으로는 붉은색노끈무늬기와, 긴꽃무늬벽돌 등이고 그 외에 감람형 류금동(瀏金銅) 장식물 등도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당년에 고구려 사람들이 여기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의 구조는 용담산성과 기본상 같고 두 성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것으로 보아 이는 용담산성의 위성의 하나라고 확인할 수 있다. 
 
삼도령자산성은 길림시 부근 사하자향(沙河子鄕) 삼도령자 대립자산(大砬子山)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산은 해발 272m, 부근 지면보다 약 120m 높다. 동남면은 산간 분지이고 송화강을 사이두고 동단산, 용담산과 마주 서 있다. 북쪽에선 송화강이 가깝고 정북방은 넓은 충적평원이다. 서북쪽은 고산구릉지이고 길림과 장춘을 잇는 철로와 길구(吉林-九站)공로와는 이도령자(二道嶺子) 칠가자서산(七家子西山)과 과정산(鍋頂山)과 각기 7-8km 떨어져 있다. 여기는 길림분지의 북쪽이고 송화강을 가까이 하고 있어 지리위치가 매우 중요하다. 
 
산성은 삼도령자 대립자산 서북쪽 언덕에 세워졌는데 황토와 응회암석을 섞어 쌓았는데 “⌐”형으로 되어 있다. 짧은 벽은 동서로 뻗어 그 길이 58m, 긴 성벽은 남북으로 뻗어 그 길이 200m, 전 길이가 258m이다. 성벽의 외연은 수직 높이 6m이다. 이 산은 길림시교의 가장 큰 채석장의 하나로서 몇 십년 동안 계속하여 채굴해 지금 산의 동반부는 이미 없어져서 산성 원래의 형태는 알 길이 없다. 짐작하건데 당초 성의 형태는 “⊓”형 이였을 것 같다. 이 성의 구조가 용담산성과 동단산성과 기본상 같으므로 한 시기에 쌓은 것이며 역시 용담산성의 위성으로 볼 수 있다. 


6. 몇 가지 짧은 생각 

1. 용담산산성 및 부근의 두 위성은 모두 지리형세가 비교적 험오한 수륙이 엇갈린 곳에 세워졌고 삼도령자산성, 동단산산성은 송화강 양쪽에서 용담산과 삼윽을 이루어서 육지에서 오는 적을 막을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수면으로 침범하는 적선도 방어할 수 있는 점으로 보아 이상적인 군사요지로 선택하여 주도 면밀하게 설계하여 성을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용담산산성 및 그 위성의 건축구조는 고구려 기타 성과 비교해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은 성곽의 대부분을 산마루의 천연형세를 빌어 구축한 것인데 집안현의 환도산성, 패왕조산성, 요령성 무순지구의 고이산산성이 그렇하며, 다른 점은 “일반적으로 산세에 따라 동,서,북 삼면의 산마루 혹은 절벽의 기복된 곳을 이용해 성을 쌓다”와는 달리 용담산산성 및 그 위성은 황토와 자갈을 섞어 다져서 쌓았으며 용담산산성의 일부 어떤 곳은 평항법(平항法:긴 돌로 눌러서 다지는 방법)을 쓰고 있다. 이런 차이는 지역과 시기의 변화에 관계될 가능성도 있어 고구려산성 건축의 고찰에 새로운 자료로도 된다. 

3. 용담산산성의 건조년대에 관해서는 기재된 사료가 없으나 작고하신 저명한 고고학자 이문신선생의 추단하기를 “고구려가 이곳을(길림시교 일대) 점유하였는데 부여 이후 광개토, 장수왕 때 국력이 팽창했었다.” 필자도 이런 추단은 큰 틀림이 없을 것으로 본다. 현존의 고고자료로 볼 때 용담산산성 및 그 위성은 고구려왕국의 서북부의 모퉁이에 처해 있고 그 이북은 광개토왕과 장수왕시대엔 동방의 물길이 날로 강성해지고 이 때 이곳 이북의 제2송화강 양안은 이미 물길 중의 속말말갈부의 세력범위에 있었다. 그러기에 용담산산성 및 그 위성은 고구려가 부여와 물길의 남하를 막기위해 세운 것이라고 우리는 인정한다. 

4. <<위서>>의 기재에 의하면 북위 효문제 태화 17년(493년)에 “부여는 물길에 쫓겼다.”고 있고 그 이전 태화2년(478년)에는 물길이 고구려를 열 번 쳤었다. 이로 추론한건데 고구려 군사세력이 용담산성에서 철거한 시간은 북위 태화년간 일 것 같다. 

본문의 부분적 수자는 1962년 한숙화씨가 집필한 <<길림시용담산성조사간보>는 1962년 省과 시박물관에서 연합조사 했을 때 류의당씨가 그린 그림을 채용(이번에 다소 변동)했음을 밝히며 아룰러 사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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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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