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r.theasian.asia/archives/40472

[강위원의 포토차이나] 고구려산성 원형 간직한 백암성

강위원
강위원 :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명예교수,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운영위원·심사위원 역임, 사진집 '못 다한 이야기들', 저서 '조선족의 오늘'


성문구 마을의 전경으로 백암성을 오르는 길가에 백암성의 표지석이 서있다.
 
백암성(白巖城)은 요동시(遼東市)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등탑시 서대요향 관둔촌(燈塔縣 西大窯鄕 官屯村)의 성문구(城門口) 마을의 동쪽에 있으며 연주성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이름은 성문 앞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모습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오리와 망아지, 소떼는 태자하 강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거나 물을 마시며 어슬렁거렸고 아이들은 한여름의 햇살을 받으며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청년들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거나 노천 당구장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백암성의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는 백암성의 동남쪽 자락
 
백암성의 축성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547년(양원왕 3년)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쪽으로는 개모성(蓋牟城), 서쪽으로는 요동성(遼東城), 남쪽으로는 안시성(安市城)이 있으며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千山山脈)의 산간지대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즉 서북쪽으로는 광활한 요동평원이 펼쳐지는 반면, 동남쪽으로는 천산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걸쳐져 있다.

그리고 태자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 요동평원 중심에 있는 요동시가 나오며, 상류는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에 이르는 최북단 코스인 본계시로 통한다. 그야말로 군사적인 요충지로서 손색이 없는 위치다.


산성에서 본 성문구 마을
 
산성은 성문구 마을의 동쪽, 암석지대인 산의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이는 해발 200m 전후,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성벽은 산비탈의 능선을 따라 돌로 축조하였는데 평면은 모서리가 둥그스름하게 각진 불규칙한 네모꼴이다.

남북 지름 480m, 동서 지름 440m로서 전체 둘레는 2km 전후로, 동쪽과 남쪽, 서쪽 벽에 잘 다듬은 성돌로 석벽을 구축하였다. 현재 북쪽과 동쪽 성벽이 남아 있다.


붉은 깃발이 있는 곳이 봉화를 올리던 점장대이다.
 
북쪽 성벽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 걸어가면 봉화대로 사용된 점장대(點將臺)가 보이는데 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남쪽은 수직의 절벽이 성벽을 대신하고 있으며 그 아래 태자하(太子河)가 흐른다. 필자는 배를 타고 남벽으로 접근해 보았으나 물길이 깊어 가까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태자하 강변과 백암성의 남벽인 절벽이 어우러져 있다.
 
성을 쌓은 돌은 성의 산비탈에서 채취한 수성암계 점판암(水成岩系 粘板岩)이다. 돌은 길이 29cm, 너비 20cm, 두께 15cm 전후가 대부분이지만, 아주 큰 것은 길이 1.8m, 너비 0.7m, 두께 0.4m인 것도 있다. 축성방법은 양 끝을 뾰족하게 다듬어서 서로 맞물리게 쌓아 벽심(壁心)을 축조한 후, 바깥쪽에는 반듯하게 다듬어 층층이 쌓아 외벽을 구축했다. 성돌의 상호 결합으로 인장력을 강화했고, 진흙이나 석회 등의 접착제는 사용하지 않았다.

동벽은 동남 모서리를 기준으로 남·북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가장 높은 곳의 산마루를 따라 축조하였다. 남쪽 부분은 서남향으로 경사진 산비탈을 따라 성벽을 축조했는데, 길이 170m로서 태자하변의 수직절벽과 만나는 지점에서 끝난다. 북쪽 부분은 길이 300m로서 기단부는 비교적 평탄하며 기울기도 완만하다. 이에 잘 다듬은 성돌을 17~20층가량 층층이 쌓아 올려 높고 두터운 성벽을 구축했다. 지형상 안쪽이 높고 바깥쪽이 낮다. 내벽의 높이는 0.8~1.0m, 외벽의 높이는 5.5m이며, 윗면의 너비도 2.35m에 이른다.

북벽은 완만하게 경사진 산비탈을 따라 내려오면서 축조되었다. 성벽의 길이는 약 500m로서 평면은 바깥쪽으로 휜 활모양이다. 비교적 평탄한 산비탈을 따라 내려오면서 축조됐기 때문에 동벽과 달리 내외 벽의 높이차가 적으며, 성벽도 훨씬 높다. 가장 높은 곳은 내벽의 높이 5.3m, 외벽의 높이 7.8m이며, 윗면의 너비도 4.4m에 이른다.

성벽은 전체적으로 아주 가지런한 편이며, 성벽 가운데 꺾어져 각이 지는 부분은 둥그스름하게 다듬었다. 기단부를 포함해 성벽 아래쪽은 안으로 조금씩 물러 쌓는 물림쌓기 축성법을 이용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성벽이 안쪽으로 약간 기울었다.


백암성의 서벽은 마을과 연결돼 있으며 상당 부분 무너져 내렸다.
 
서벽은 산비탈 가장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다. 성문구 마을의 접경지역은 대부분 파괴되고 기단부만 일부 남아 있으며 북단에는 성문터가 남아 있다. 현재 남아있는 서문 터에서 동북쪽으로 곧게 뻗어 올라간 성벽은 압록강 이북에 남아 있는 고구려 성벽 가운데서 가장 견고하고 웅장하다.

이 직선상의 성벽에는 밖으로 3개의 치(雉)가 완벽하게 남아 있다. ‘치’는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네모나 반원형으로 쌓은 곳이다.


백암성을 쌓은 성돌의 근접 부분.
 
644년 11월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고구려국왕을 시해한 것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해 국경지대의 여러 성과 더불어 요하 동쪽에 있는 요동성을 격전 끝에 점령하게 된다. 그 뒤 공격목표를 백암성으로 정해 성의 서남부를 공격하자 성주 손대음(孫大音)은 요동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항복했다.

백암성을 뺏은 당 태종은 바로 안시성으로 쳐들어가는데 그 안시성 싸움에서 양만춘 장군에게 패하여 귀국했지만, 백암성을 위시한 10여 개 성과 요주(遼州)·개주(蓋州)·암주(巖州) 등의 3개 주가 당나라 영토에 편입되었다.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망아지들
 
그러한 연유로 백암성의 1만 명의 백성과 2400여 명의 병사가 포로가 됐지만 후일 안시성이 그 위치조차 알 수 없도록 철저히 파괴된 반면 백암성은 원형이 파괴되지 않고 고구려 산성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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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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