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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가을 일본인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이 답사한 뒤 1939년에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과 다카하시 쿄시료(高橋匡四郞)이 조사하였으며, 1941년에는 다카하시 쿄시료(高橋匡四郞)과 와타나베(渡邊三三)가 조사하였다. 1979년에는 중국 심양고궁박물관(瀋陽古宮博物館) 고고조사대가 요녕성(遼寧省) 일대의 청대(淸代) 유적에 대한 현황파악의 일환으로 조사하였고, 1986년 호소야 요시오(細谷良夫)를 비롯한 일본인 학자들이 현지를 답사하고 간략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도하자구노성
1) 학술조사
1937년 가을 일본인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이 답사한 뒤 1939년에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과 다카하시 쿄시료(高橋匡四郞)이 조사하였으며, 1941년에는 다카하시 쿄시료(高橋匡四郞)과 와타나베(渡邊三三)가 조사하였다. 1979년에는 중국 심양고궁박물관(瀋陽古宮博物館) 고고조사대가 요녕성(遼寧省) 일대의 청대(淸代) 유적에 대한 현황파악의 일환으로 조사하였고, 1986년 호소야 요시오(細谷良夫)를 비롯한 일본인 학자들이 현지를 답사하고 간략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신빈 이도하자 구노성 전경
2) 위치와 환경
이도하자구노성(二道河子舊老城)은 신빈현 영릉진(新賓縣 永陵鎭)에서 동남으로 7.5km 떨어진 이도하자촌(二道河子村) 동남쪽에 위치하였다. 이도하자구노성(二道河子舊老城)이 위치한 영릉촌(永陵村)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소자하 양안(蘇子河 兩岸)에는 좁고 기다란 충적평지가 소자하(蘇子河)를 따라 펼쳐져 있고, 소자하(蘇子河) 연안 일대에서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이다.
이도하자구노성(二道河子舊老城)이 위치한 지점은 영릉촌(永陵村) 소분지 남단에 해당된다. 산성 서북쪽에 이도하자촌(二道河子村)이 자리잡고 있으며, 산성 서쪽 아래로 환인~영릉진(桓仁~永陵鎭)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북쪽 4km 거리에 청대(淸代) 초기의 도성(都城)인 노성(老城) 곧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이 있으며 그 북쪽의 소자하(蘇子河) 건너편으로 신빈~심양(新賓~瀋陽)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서북쪽 4km 거리의 이도하자(二道河子) 서안(西岸)에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이 자리잡고 있다.
한편, 산성(山城)의 남쪽에는 합이살산(哈爾薩山), 동쪽에는 계명산(鷄鳴山), 서쪽에는 呼蘭哈達(지금의 烟突山) 등의 산이 산성을 둘러싸면서 서북방면으로 뻗어 천연장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가합하(嘉哈河)와 석리가하(碩里加河)가 산성 아래쪽을 감싸면서 산성 북쪽에서 합류하여 북쪽으로 흘러 소자하(蘇子河)로 유입되고 있는데, 마치 천연해자와 같은 형세이다. 이처럼 이도하자 구노성(二道河子 舊老城)은 동․남․서 삼면은 산으로 둘러싸고 있고, 서북방면은 시내와 강으로 가로막힌 천혜의 요새지이다.
3)유적의 현황과 성곽의 구조
이도하자 구노성(二道河子 舊老城)은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발 375m인 합이살산(哈爾薩山)에서 동북과 서북방향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의 자연 지세를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평면은 아주 불규칙한 형태를 띤다.
중국 고고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외성의 둘레는 5,660m이고, 내성의 둘레는 960m라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내성․외성의 성벽은 모두 토석혼축인데, 순수한 토석혼축이 아니고 자연석을 쌓은 다음 그 위에 성토(盛土)한 형태로서 잔고(殘高)는 3m에 이른다고 한다.
외성(外城)의 경우, 서문에서 합이살산(哈爾薩山) 서북․서남․동남쪽 산등성이를 돌아 동벽 남단에 이르는 구간의 서벽․남벽 길이가 2,290m이다. 이 구간에는 자연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은 부분도 많으며 인공성벽의 경우에는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다. 토석혼축 성벽으로 잔고(殘高) 0.5~1m, 너비 1.2~1.5m 전후라고 한다. 남벽 동단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등성이를 이용하여 축조한 동벽은 길이 1370m이며, 북쪽의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연결하여 축조한 북벽은 길이 1,100m이다. 외성은 총둘레 5,660m 가운데 순수한 인공성벽이 3,390m, 절벽 위에 인공성벽을 가미한 부분이 900m, 자연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은 부분이 1,370m 등이다. 내성은 외성의 동벽 중단에서 시작하여 외성 북벽의 합이살산(哈爾薩山) 사이의 골짜기를 가로지른 다음, 합이살산(哈爾薩山) 서북쪽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 남벽 중단에 이르는 구간에 축조하였다. 축조방법은 외성과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또한 외성 서북벽 안쪽에는 외성 북벽 중단과 서벽 중단을 잇는 동북~서남 방향의 차단벽이 있는데, 중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1595년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노이합적(努爾哈赤)의 거성(居城)으로 이용되고 있던 구노성(舊老城)을 방문하고 구노성(舊老城)의 당시 모습을 묘사한 조선 사신 신충일(朝鮮 使臣 申忠一)의 기록에 따르면, 구노성(舊老城)은 목책성(木柵城), 내성(內城), 외성(外城) 등 3중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바깥쪽의 외성(外城)은 높이 십 수척, 아래쪽 너비 4~5척, 위쪽 너비 1~2척이며, 성벽 위에는 성가퀴, 사대(射臺), 격대(隔臺) 등이 설치되어 있다. 성벽 축조방식은 독특하게, 돌로 3척 높이의 성벽을 쌓고 그 위에 둥근 목재(椽木)를 깐 다음, 다시 돌로 3척 높이의 성벽을 쌓고 둥근 목재를 설치하는 것을 반복하여 십 여척 높이의 성벽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외벽에는 진흙을 칠하여 성벽을 보강하는 한편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내성(內城)의 축조방식도 외성과 거의 비슷하였는데, 다만 외성과 달리 성벽 아래, 위의 너비가 7~8척으로 동일하였다고 한다. 내성의 성벽 위에도 외성처럼 성가퀴와 격대(隔臺) 등을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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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 동북문지 | 외성 성벽 | 신빈 이도하자 구노성의 평면도 |
4) 역사적 성격
이도하자 구노성(二道河子 舊老城)은 청 태조(淸 太祖) 노이합적(努爾哈赤)이 1587년 축조하여 1603년 노성(老城) 곧 혁도아납성(赫圖阿拉城)으로 천도할 때 16년간 도성으로 삼았던 곳이다. 노이합적(努爾哈赤)은 이 성을 근거지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여 천산산맥(千山山脈)과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 일대의 여진족을 정복․통합하였다.
구노성(舊老城)의 원명은 비아납성(費阿拉城)인데, ‘비아납(費阿拉)’은 구강(舊崗), 구성(舊城)을 뜻한다. 청나라를 건국한 건주여진족(建州女眞族)은 1424년경 환인(桓仁)지방으로 이주하였다가 1433년과 1437년 두 차례 조선의 공격을 받고 거의 괴멸되었다. 이에 건주여진족은 1438년 소자하(蘇子河) 방면으로 피하여 구노성(舊老城) 서쪽의 호난합달(呼蘭哈達) 아래에 신거주지를 마련하는 한편, 비아납성(費阿拉城) 곧 구노성(舊老城)을 축조하였다. 이때 노이합적(努爾哈赤)의 조상인 동산(董山)이 명(明)으로부터 건주좌위인(建州左衛人)을 받고 불아납성(佛阿拉城)을 영지(營地)로 삼아 활동하였다. 동산(董山)은 1466년 요동지역을 공격하다가 명(明)에 유인되어 살해되고, 비아납성(費阿拉城)은 1467년과 1473년 명의 잇따른 침공을 받아 폐허가 되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비아납성(費阿拉城)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문헌기록상으로는 구노성(舊老城) 곧 비아납성(費阿拉城)은 건주여진(建州女眞)에 의해 처음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다. 지리적으로 구노성(舊老城)은 소자하(蘇子河) 연안의 영릉진(永陵鎭)에서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환인지역으로 진입하는 교통로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북쪽에서 서류(西流)하는 소자하(蘇子河)나 산성(山城)의 서북과 동북 아래쪽을 감싸면서 북쪽으로 흘러가는 가합하(嘉哈河)와 석리가하(碩里加河) 등은 소자하(蘇子河)를 따라 서북방면에서 침공해 오던 중국측 세력을 가로막는 천연해자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구노성(舊老城)은 고구려 산성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시기 유물이 구노성(舊老城)에서 수집되었고 1980년대 초 구노성(舊老城)에서 서남쪽으로 2.5km 떨어진 유수향(楡樹鄕)에서 고구려 적석묘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 등은 주목된다. 구노성(舊老城)은 본래 고구려 산성(山城)이었고, 15세기 중반 조선군(朝鮮軍)에 쫓겨 소자하(蘇子河) 방면으로 피신한 건주여진족(建州女眞族)이 고구려 산성을 개축하여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구노성(舊老城)의 서북 4km 거리에는 한대(漢代) 제2현토군(玄菟郡)의 군치(郡治)였던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이 있는데, 조사 결과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에서 한대(漢代)의 문화층과 뚜렷이 구별되는 고구려 시기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이는 고구려가 제2현토군을 혼하(渾河)방면으로 구축한 다음 군치(郡治)였던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을 상당 기간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은 평지성일 뿐 아니라 이도하자(二道河子)의 서안(西岸)에 위치하여 서북방면에서 침공하던 중국측 세력을 방어하는데 상당한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구노성(舊老城)은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의 방어용 산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구노성(舊老城)은 둘레가 6km에 육박하는 대형산성으로서 단순한 방어용 산성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추정된다. 즉 구노성(舊老城)의 초축(初築)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660년대에는 구노성(舊老城)이 소자하(蘇子河) 연안에서 주요한 거점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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