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2586104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부여기(扶餘記) 

고구려는 한민족에게 어떤 의미일까.

한민족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시기ㅡ.

숫제 그런 의미일까.

 

한반도라는 손바닥만한 땅덩어리 안에 사는 것을 불평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한번쯤은 고구려의 그 방대한 영토를 추억하며 감상에 젖은 일이 있을 것이다.

손바닥만한 땅덩어리와 협소한 국력.

그리고 사대주의에 물들어버린 우리나라의 관료들.

우리가 고구려를 동경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동경이란 자신이 처한 현실과 어긋날수록 더 강해지는 것이니까.

 

최근에는 중국의 어떤 사람들이 소위 동북공정을 운운하면서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 소수민족의 변방사로 편입시키려 하는데,

나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미친놈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중국에게 있어 고구려는 가장 껄끄러운 존재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고구려 때문에 지금의 중국 동북 지방으로의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수의 문제도, 그 아들 양제도,

심지어는 중국 최고의 성군이라 일컬어지는 당나라의 태종도 끝내

무릎꿇리지 못한 나라가 바로 고구려다.

 

한민족이 버젓이 살아있는 동안은 고구려를 완벽하게 중국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에게는 중화사상이라는 것이 있다.

말하자면 자기들 것만이 최고요 나머지는 오랑캐나 별볼일 없는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그걸 소위 중국식 패권주의라고 부른다.

 

고구려는 그 발전 과정을 봐도 중국과는 엄연히 다르다.

우선 나라의 이름도 그렇고(高句麗),

중국 왕의 칭호와는 다른 시호를 쓰는 28명의 왕이 존속했던 것이며,

끊임없이 중국의 여러 왕조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짧은 생각이다)

 

고구려가 진작 중국의 것이었다면 왜 사대주의의 극치를 달리던 김부식 양반이

<삼국사기>에 고구려를 집어넣었겠으며,

고려는 왜 고구려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채용했을까? 

 

우리가 이렇게 고구려의 역사를, 우리끼리만 논하고 있을 시간에도

중국은 기회만을 엿보며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동안,

중국이나 일본은 우리가 가진 것을 조금씩 뺏아가버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400년 전,

고구려는 중국의 통일왕조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을 물리쳤고,  

한민족의 자주성을 지킬 수 있었다.

이제는 우리들 차례다.

우리가 나서서 한민족 역사의 자주성을 지켜야 한다.

고구려가 수당의 침입을 격파함으로서 한민족의 자주성을 지켜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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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라는 나라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부여라는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부여라는 나라를 세운 사람은 저 머나먼 북쪽, 차갑게 얼어붙은 툰드라 지대에 살던 북이족의 동명이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동명의 이야기를 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기원전 1세기경 중국에서 편찬된 《논형》이라는 책인데, 여기에 동명설화의 가장 오래된 모본이 실려있다.

 

북이(北夷) 탁리국왕의 시비가 임신하였다. 왕이 그를 죽이려 하였다. 시비가 대답하기를

"달걀같은 큰 기운이 하늘에서 나에게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라 하였다. 뒤에 아들을 낳았다.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에 버려두어 말이 밟아 죽이도록 했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이 하늘의 아들이 아닌가 의심하여, 그 어미에게 돌려주고 노비처럼 기르게 하며,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소와 말을 치게 했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다. 왕은 그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동명은 남쪽으로 도망쳐서 엄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흩어지고 쫓던 병사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이로서 부여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으므로 북이에 부여국이 있게 되었다 한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했을 때, 하늘 아래로 기운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태어나자마자 그것을 버렸는데,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주어 살았고 장대해졌다. 왕이 그를 죽이려 하였다.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하늘이 명하여 마땅히 죽게 하지 않았으므로, 돼지와 말이 구하였고 도읍하여 부여에서 왕이 되었고,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준 덕택이라 하였다.

<논형> 길험편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나 《후한서》 부여전, 《수서》와 《북사》에 실린 백제열전 및 《양서》 고구려전에 모두 실려있는 이 동명설화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추모왕설화의 모티브로 알려져 있으며, 추모왕설화가 이 동명설화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미 정설로 굳어진 뒤다. 말하자면 로마가 그리스의 신화를 모방한 것과 같아서, 고구려의 추모왕설화는 바로 이 부여의 동명설화를 모방해서 후대에 가필된 설화인 것이다.

 

탁리국이라는 나라는 《삼국지》에는 고리지국(高離之國), 《후한서》에는 색리국(索離國)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그 나라가 옛 부여의 북쪽에 있었다고만 말할 뿐이지 정작 그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나라였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고 있다. 중국의 여러 기록들이 고구려와 백제의 기원을 말하면서 꼭 부여를 들먹였고 부여의 건국을 설명하면서 반드시 동명의 이야기를 했다. 

 

언젠가부터 부여의 동명과 고구려의 추모왕이 서로 동일인물로 여겨지면서 동명성왕=추모성왕이라는 공식이 성립해버렸지만, 사실 10세기까지도 동명왕과 추모왕은 동일인물이 아닌 서로 다른 두 인물로 구분되어 기록되었다. 고구려인으로서 당에서 죽은 천남산의 묘지명에는

 

옛날 동명은 기에 감응하여 물을 건너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태양으로 잉태되어 패수에 이르러 도읍을 열었다.

 

라고 기록하여 동명왕과 추모왕을 엄격하게 구별했다. 《쇼쿠니혼키(續日本紀)》에는 백제의 시조라는 인물로 도모대왕을 언급하고 있는데, 도모는 곧 동명이다.

 

[百濟遠祖都慕大王者, 河伯之女感日精而所生.]

백제의 먼 조상 도모대왕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령에 감응하여 태어난 바이다.

<쇼쿠니혼키> 엔랴쿠(延曆) 8년(789) 12월

 

[夫百濟太祖都慕大王者, 日神降靈, 奄扶餘而開國. 天帝授○, ○諸韓而稱王.]

무릇 백제 태조 도모대왕은 태양신이 강령하여 부여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는데, 천제가 명을 내려 여러 한에서 왕 노릇 하게 하였습니다.

<쇼쿠니혼키> 엔랴쿠(延曆) 9년(790) 7월

 

도모대왕(都母大王). 일본음으로는 '추모'와 흡사한 까닭에 동일인물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찬성씨록》에서는 백제의 도모와 고구려의 추모[朱蒙]를 명확히 구별해놓고 있다. 고려와 백제가 망하고 100년이 지난 뒤에 《쇼쿠니혼키》를 편찬할 때까지도 고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그들의 시조를 잊지 않고 있었고, 고려와 백제 저마다 독자적인 시조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동명설화 역시 추모왕설화와는 다른 독립적인 형태의 것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와 백제 본인들이 그러했고, 중국에서도 그런 인식을 반영해 역사를 기록했는데, 어째서 지금에 이르러서 동명이라는 인물은 추모왕과 동일한 인물인 것처럼 굳어져버리게 된 것일까. 그것은 아마 왕씨의 고려ㅡ12세기를 전후한 때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동명의 이야기가 있다.

 

[昔寧禀離王侍婢有娠, 相者占之曰 "貴而當王." 王曰 "非我之胤也, 當殺之." 婢曰 "氣從天來, 故我有娠." 及子之産, 謂爲不祥, 捐圈則猪噓, 棄欄則馬乳而得不死. 卒爲扶餘之王.]

옛날 영품리왕(寧禀離王)을 모시던 계집종이 임신하였다. 관상쟁이가 점을 쳐서 이르되

"귀하게 되어 반드시 왕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내 자식이 아니니 죽여야 되겠구나."

라고 하였다. 시비가 말하였다.

"기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임신한 겁니다."

사내아이를 낳기에 이르러, 상서롭지 못하다며 동물 우리에다 버렸는데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었다. 외양간에다 버리니 말이 젖을 먹여주어 죽지 않았다. 마침내 부여의 왕이 되었다.

《주림전(珠琳傳)》 제21권 인용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고구려

 

일연은 《주림전》, 즉 《법원주림》이라는 책을 인용해 부여의 건국전설을 소개했는데, 여기서 일연은 이 이야기를 가리켜서 "동명제(추모왕)가 졸본부여의 왕이 되었음을 이른 것이다. 이 졸본부여 역시 북부여의 별도이기에 부여왕이라 이른 것이다."라고 일방적으로 고구려의 건국신화라고 해석하고 영품리왕이라는 이름도 부루왕의 다른 이름이라며 자의적으로 해석해버렸다.

 

조선조에 이르러서 동명과 추모를 다르게 보는 시각이 다시 대두되기 시작했다. 조선조 후기의 '실학'의 대두와 함께 일어난 '국학'운동. 그 이전부터 이미 동명과 추모를 다르게 보는 시각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東明啓其赫業     동명은 그 밝은 위업을 열고,

朱蒙承其餘波     주몽은 그 나머지를 이어받았도다.

 

조선조 성종 때의 문신이었던 김천령(1469~1503)이 지은 '고구려부(高句麗賦)'라는 작품이,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실려 있는데, 한치윤은 이것을 인용하면서 이 설명이 명확하다고 했다. 동명과 추모를 별개의 인물로 인식했을 뿐 아니라 선후관계에 대해서도, 《연남산묘지명》에서 보였던 인식 그대로다. 하지만 조선조 초년만 하더라도 이러한 인식은 극히 소수의견에 불과했고, 김천령보다 조금 뒤의 인물인 김정국(1485~1541)이라는 문인이 자신의 문집 《사재집》에서 비판하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쓴 오류라고 비판할 정도로, 조선조 초기까지도 동명과 추모를 동일인물로 보는 부류가 동명과 추모를 별개의 인물로 보는 부류보다 더 '주류학계'에 속했고 '공식' 입장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동명과 추모를 동일인물이 아닌 별개의 인물로 구별해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존재했고,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그것은 '국학' 연구의 성과와 함께 점차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내가 살펴보니 동명의 탄생은 그 신이함이 우리나라 역사책과 《한서》가 대략 같다. 단지 《한서》에서는 동명을 부여 시조라 했고 우리나라 역사책에서는 동명을 고구려 시조라 했으니 이는 대단히 다른 것이다. 고구려는 이때에 문자가 없어서 세상에 널리 전하는 소문이 모두 항간의 이야기에서 나왔으니 실제로 틀리고 어긋난 것이 많다. 하지만 어찌 나온 곳까지 몰랐겠는가. 어떤 사람은

"고구려가 본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그 신령한 사적을 끌어다 내놓아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인 것이 아닐까?"

라고 하기도 하는데 감히 억지로 해석하지 못하겠다.

<동국지리지>

 

지리학자였던 한백겸(1552 ~ 1615)은 부여의 동명과 고구려의 추모가 서로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말을 그저 '실어놓기만' 했을 뿐 그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유보하고 있지만, 이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동명과 추모를 다른 인물로 봐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산경표'의 저자로 유명한 여암 신경준(1712 ~ 1781)은 그러한 한백겸의 논의를 이어받아 《강계고》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삼국사》를 살펴 관찰해보니, 주몽은 북부여왕 해모수의 아들이라 했고 해모수와 해부루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라 했다. 《동국기이》를 보니 해부루는 해모수의 아들이라 했고 《동사보유》는 주몽을 해부루의 이복동생이라 했으니 합당하다. 하지만 해모수의 개국은 신작 임술년에 있었고 주몽의 개국은 건소 갑신년에 있었으니, 그때의 나이가 스물 두 살이었다고 한다면 해모수가 개국한 이듬해에 주몽을 낳은 셈이다. 해부루가 늦도록 자식이 없다가 금와를 얻어서 이미 장성하자 해부루는 죽고 금와가 계승하여 왕이 되었고, 유화가 비로소 주몽 낳는 것을 보았다. 그 나이를 상고해본다면 곧 해부루는 마땅히 해모수의 아들이 될 수 없을 것 같으니 《삼국사》의 언급은 옳은 것이다. 대개 해부루는 본래 북부여의 왕이었는데 도읍을 옮겨 동부여의 왕이 된 사람이다. 해모수는 곧 해부루를 대신하여 북부여의 왕이 되었는데, 아마도 《후한서》에서 이른바

"색리국의 왕자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라고 한 것이 아닐까 한다. 《한서》에 이르기를

"천상에 크기가 달걀만한 기가 있어서 내려오더니 동명을 낳았다."

고 하였고, 우리나라 역사책에서도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이다."

라고 했으니 곧 해모수와 동명은 그 탄생의 신이함이 서로 같고 다른 나라에서 와서 부여의 왕이 된 것도 서로 같으며, 서한 말기에 일어났다는 것도 서로 같으니, 결과적으로 해모수는 동명이며, 해모수가 그 이름이고 동명은 곧 그 호가 되는가? 주몽은 동명에서 나왔으면서 어째서 동명을 갖고 그 호를 삼은 것일까? 주몽의 행적이 동명과 유사한 것이 있었기에 고구려 사람이 주몽의 호를 또한 동명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동천왕이 태어나면서 쉽게 눈을 뜨고 물건을 보는 것이 그 증조부 태조왕과 흡사했기에 위궁이라 이름지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 또한 구암 한백겸이 말한 바

"고구려는 본래 부여에서 나왔기에 신령스런 사적을 끌어다 내놓아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인 걸까?"

라고 한 것이 이것인가? 우리나라 역사책에서는 고구려의 동명을 《한서》의 동명으로 보고 있으니, 이는 《한서》에 실려 있는 동명의 신비한 사적을 《동명본기》안에다 옮겨 놓고 거기다가 우리나라 사람이 널리 전하는 항간의 이야기를 보탠 것이니 그 허무맹랑함이 심하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책 가운데 어떤 책에서는 주몽이 동부여에서 왔다고도 하고, 어떤 책에서는 북부여에서 건국했다고도 한다. 《삼국사》는 본기에서는 동부여에서 왔다고 해놓고 지리지에서는 북부여에서 왔다고 해놨으니 같은 책이 두 가지로 글을 써놔서 더 헷갈린다. 동명왕 14년에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자 금와가 예스럽게 장사지냈고 또한 동부여왕 대소가 일찌기 사신을 파견해서 유리왕에게 왕위를 선양하면서(?) 또한 이르기를

"우리 선왕과 그대의 선왕인 동명왕은 서로 우호적이었는데 우리 신하와 백성을 꾀어갖고 도망쳐서 나라를 이루었다."

라고 했고, 태조왕은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의 사당에 제사했다고 했으니 주몽은 동부여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옳다. 만약 《통전》처럼 주몽을 한 무제 이전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찌 그다지도 잘못될 수 있겠는가?

 

다산 선생은 저서 《아방강역고》(1811)에서 신경준의 주장을 이어 동명설화에 대한 긍정론을 펼치며 동명과 추모를 별개의 인물로 상정하고, 동명에 대해 재평가한다.

 

<다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또한 《후한서》와 《위략》을 살펴보니 똑같이

"북부여 시조의 이름은 동명이다."

라고 했고, 이상한 기운이나 돼지우리,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이룬 이야기 등이 들어 있다. 《위서》와 《북사》는 이 이야기를 고구려 시조 주몽의 일이라 했고, 햇빛이 비치고 개와 돼지,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든 일 등이 들어 있다. 김부식도 《북사》 주몽본기를 따라서 주몽의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그 뒤 우리나라의 역사를 찬술하는 자는 으레 고구려 시조 주몽의 호를 동명왕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이 잘못이라고 말한다. 북부여 시조 동명왕은 원래 북이의 나라인 색리국에서 도망쳐서 부여에 이르러 이치에도 안 맞게 신비한 이야기를 지어내서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먹었다. 북부여가 이미 망해버리자 고구려 사람들이 그 거룩하고 상서로운 것을 알고서, 살짝 그 이야기를 표절하고 아울러 동명의 이름까지도 빼앗아서 중국 사람들에게 과시하며, 중국의 역사 찬술자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말해준 바를 따라서 역사책에다 이를 기재한 것이다. 비록 그 황당한 말에 대해서 충분히 분별할 수는 없지만, 동명이라는 두 글자는 분명히 북부여 시조의 이름이지 주몽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방강역고> 권제3, 졸본고(卒本考)

 

"동명은 북부여 시조의 이름이지 주몽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고구려 사람들이 북부여 시조의 이야기를 베끼고 '동명'이라는 이름까지도 빼앗았다."

정약용의 주장은 '동명설화'를 긍정하는 가장 강력한 명제이자 멘트이다.

 

나 한진서가 삼가 동명의 사적을 살펴보니, 《후한서》 부여전에 이미 자세하게 나타나 있었다. 대개 동명은 고리국에서부터 도망쳐 부여에 이르러서 왕이 되었고, 그 후손인 주몽은 부여국에서부터 도망쳐 홀승골성에 이르러 살았다. 그 어려움에서 도망치고 물을 건너며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이룬 일이 우연히도 서로 같은데, 동명은 스스로 부여의 임금이 되고, 주몽은 스스로 고구려의 임금이 되었다. 김부식이 고구려본기를 찬술하면서 이에 이르기를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휘는 주몽이다."

라고 해서, 처음으로 동명과 주몽이 동일하다는 것을 합리화해놓아 다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여의 동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양서》에서 이른 바

"동명이 부여에서 비로소 왕이 되었으며, 나중에 별도로 갈려나와서 고구려의 종족이 되었다."

라고 한 것은 옳다. 우리 조선의 학사 김천령이 그 《고구려부》에 이르기를

"동명은 그 밝은 위업을 열었고, 주몽은 그 나머지를 이어받았도다."

라고 하였으니 이 설명이 명확하다.

<해동역사> 권제6, 고구려

 

숙부 한치윤의 못다한 업적을 이어, 중국과 일본의 여러 문헌 속에서 우리나라와 관련된 기록들을 모아 엮어 《해동역사(海東驛史)》라는 이름으로 편찬해낸 한진서(1786 ~ 1870)는 이러한 주장을 더 체계화시켰다. 그 주장의 골자는 세 가지,

 

1) 동명은 탁리국에서 도망쳐 부여왕이 되었다.

2) 동명의 후손인 주몽은 부여에서 도망쳐 고구려를 세웠다.

3) 김부식이 《삼국사》 고구려본기에서 동명과 주몽을 동일인물로 적어놓은 바람에 그 뒤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부여의 동명에 대해서 모르게 되고 말았다.

 

김부식 그 영감태기가 우리 역사에 참 몹쓸 짓 많이 하고 갔다고 예전부터 생각은 했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까지 해놨을 줄이야... 하지만 그걸 천년이 다 되도록 아무렇게나 믿어온 우리도

참 바보가 아닌가. 실학 시대의 '실사구시', 철저하게 사실만을 토대로 역사를 연구한다는 고증학의

정신에 눈을 뜬 대학자들이 종래까지 아무 비판도 없이 그저 그런 줄로 믿어왔던 기존의 학설에 대해

의문과 비판을 제기하고 합리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7백년이나 잘못되어 있던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학 연구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공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실학자들의 노력과 그 성과는 오늘날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듯 하다.

조선조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도 그랬지만,

부여 시조와 고구려 시조는 동일인물이 아님을 여러 자료를 가지고 밝혀놓고도

여전히 동명과 주몽은 같은 인물이라고 보는 주장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부여 건국신화 문제에 대한 근대적 연구의 효시로 꼽는 <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

제4장 고구려고(高句麗考)는 일본인 학자 나카 미치요(那珂通世)가 1894년에 발표한 것으로,

여기서는 어처구니없게도 동명설화의 독자성을 부정했다.

 

추모 즉 주몽은 고구려, 백제의 시조인데 《논형》에서 동명을 부여국의 시조처럼 기록한 것은 오류이다. (중략)또한 '탁'은 《위략》에서는 '고'라고 쓰고, '고구(高句)' 두 자의 오기라고도 보인다. 그러므로 부여에서부터 고구려가 나왔다고 하는 전설을 본말을 전도하여 고구려에서 부여가 나온 것처럼 잘못 기록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것을 《수서》81 동이전에서는 '고리'를 '고려'라고 고쳐서 동명을 백제시조라고 하고, 고려 주몽의 일은 《위서》에 근거해서 기록하고, 동명과 주몽은 전혀 별개의 인물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잘못됨이 아주 크다. 《통전》에서

"삭리국은 곧 고려국."

이라고 이르는 것은 《수서》의 오류를 계승한 것이다.

 

이 견해는 조선조 후기부터 실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어 왔던 많은 연구 성과들을 조금도 반영하지 않았고, 동명의 출생지 표기는 '탁리', '고리', '색리' 등 기록마다 다 다른데도 유독 '고리'라는 이름에만 집착해서 '고려'와 연결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너무도 비약적인 논리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학자의 부여 건국설화 부정론은 이병도 같은 작자한테 그대로 이어져서,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동명이라면 고구려 시조 추모만 생각하고 부여 시조가 동명인 줄은 또 모를 것이다.

 

하지만 동명은 틀림없이 있었다. 모든 부여족들 사이에서 동명은 시조로 추앙받았고, 동명의 나라에서부터 고구려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동명에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부여라는 나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고구려를 이야기하자면 부여를 이야기해야 한다. 여기서는 동명에서부터 부여의 역사를 잡고, 부여와 고구려의 역사를 함께 모아서 적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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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는 매우 강성한 나라였다. 주변의 읍루와 옥저, 동예를 휘하에 두고, 현도와 낙랑과도 견주었다. 기록된 것만 보자면 부여는 모두 세 개가 있었는데, 우선 동명의 부여 즉 해부루왕의 북부여와 훗날 동쪽으로 이주해서 세운 금와왕의 동부여(가슬라부여), 그리고 훗날 고구려의 모체가 되는 졸본부여다. 훗날 백제가 자신들을 '부여의 자손'이라고 한 것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광개토태왕릉비에서는 추모왕이 나온 곳을 북부여라고 했는데, 고구려(졸본부여)에서 봐서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에서 단순히 방위상의 명칭으로 북부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듯 하다. 추모왕이 건넜다는 부여의 '엄리대수'는 졸본부여에 있었는지, 아니면 북부여에 있었는지 모르나 아마도 북부여와 졸본부여의 경계가 되는 강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기서는 그냥 부여로 뭉뚱그려서 쓴다.

 

《자치통감》에 보면 원래 부여는 녹산(鹿山)에 있었다고 했다. 이곳에 있던 부여는 외침을 받아 서쪽으로 이동했는데, 놀랍게도 부여를 서쪽으로 옮겨가게 만든 것은 '백제'였다. 이건 백제의 요서진출설과 관련된 것이고 고구려의 역사와는 그닥 상관이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서 빼고, 녹산이라는 곳에 대해서 말해볼까 한다. 녹산의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는 곳은 지금의 길림 동단산 및 남성자 유적인데, 이곳에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6백년에 걸친 상류 계층의 무덤과 성터, 집터가 분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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