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yeohwi.egloos.com/v/1398143
* "고구려의 남북도에 대한 토론"에서 일부만 가져왔습니다.
고구려 초기 산성과 중․후기 산성과의 차이점
* "고구려의 남북도에 대한 토론"에서 일부만 가져왔습니다.
고구려 초기 산성과 중․후기 산성과의 차이점
5. 고구려 초기 산성의 특징
선생님은 고구려 초기 산성의 특징으로 석성이라는 점, 성벽을 쌓을 때 쐐기형돌(楔形石)을 사용한 점, 성벽 상부에 돌구멍(石洞)이 공통적으로 확인된다는 점, 산성의 입지가 산정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산성을 둘러싼 바위와 같은 자연적인 조건을 최대한 이용한 산성이라는 점 등을 꼽으셨고, 이는 중국과 한국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제가 삼송산성을 답사했을 때, 성벽 일부 구간에 트렌치를 설치한 것처럼 성벽을 절개한 흔적을 확인할 수가 있었는데, 규모나 절개 방식으로 봤을 때 주민이 성돌을 파가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성벽 조사를 위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동안 삼송산성은 수직 절벽 사이의 트인 부분 4군데에 인공 성벽을 설치했다고 알려져 왔는데(王禹浪 · 王宏北 1994: 155), 그 지점은 인공 성벽이 설치된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흑구산성에서도 천연절벽 위의 너비 1m도 돼지 않는 구간에 1~2단의 성벽이 쌓인 것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는 기존에 인공성벽이 축조되었다고 알려진 구간이 아니었는데, 절벽의 틈 뿐만 아니라 바위 윗면에도 성벽이 축조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중국에 있는 고구려 산성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간 잘못 알려진 사항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추후 연구가 진행된다면 고구려 초기 산성의 특징이라고 알려진 부분에 대해서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 역시 초기 산성의 특징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반드시 초기만의 특징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중 돌구덩이만 초기 산성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현재 산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가 전면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혹시 답사 과정에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른 사실이 확인된 점이 있다거나, 앞으로 고구려 초기 산성 연구에 있어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6. 고구려 초기 산성과 중․후기 산성과의 차이점
본고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된 부분은 아니지만, 고구려 산성을 다년간 연구하셨기에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고구려 초기 산성의 특징 중 돌구덩이는 초기만의 특징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고구려 중․후기에도 독특한 고구려 산성만의 특징이 확인되는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산성의 규모나 입지, 내부시설, 산성을 통한 방어전설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혹시 이에 대해서도 정리하신 내용이 있으시다면 간략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는 3세기 말을 대외적으로 요동지역의 지배력이 느슨해지고, 대내적으로는 개별적이고 반자치적인 정치체제인 나부체제가 해체되어 고구려에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확립된 시기로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고구려 산성의 기본 모델이 형성되어 본격적으로 축성되는 시기로 보고 계신데(28쪽), 고구려 중․후기에 대해서도 이러한 분기 설정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으로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밖에 시기에 따라 고구려의 성곽 축조 현황이 달랐으며, 그에 발맞춰 성곽 방어체계 역시 변화가 있었다는 점, 그에 따라 시기별 침공세력에 대한 대응방식이 달라졌다는 점, 3세기 말 이후 4세기 중반까지 혼하 중류와 태자하 상류, 그리고 지금의 관전 지역을 잇는 선이 고구려의 서쪽 변경이었다는 점 등은 모두 동의하는 바, 전체적으로 토론자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기에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5~6번 답변 : 고구려 산성 편년과 관련된 부분은 추후 논고를 통해 자세히 밝힐 예정이다. 일단, 개인적으로 고구려 산성의 편년을 총 4시기로 나누고 있다는 것 정도만 언급하겠다.
1기는 건국 이후 3세기 말까지로 이 시기의 고고자료는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문헌에서 산성의 종류(산정식인지, 포곡식인지)와 규모를 추측할만한 단초가 확인될 뿐이다.
2기는 3세기 말~4세기로 오늘 논고에서 다룬 부분이다(첨언하자면, 이 시기는 고구려 산성이 제대로 축조되기 시작한 때로서 크게 산정식과 포곡식으로 나뉘는데, 포곡식은 지방거점성일 가능성이 높다. 모두 석축산성이며, 모두 설형석을 사용했고, 돌구덩이 및 성가퀴가 같이 확인된다. 규모는 환도산성과 오녀산성을 제외하면 대개 1,000~1,500m 규모의 중소형급이 많아 어느 정도 산성 규모의 선호도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 다양한 형태의 옹성이 확인되었고 이 시기의 치는 많이 축조되지 않아 지형이나 시설 주변에 선별적으로 축조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3기는 5세기~6세기 중엽으로 고구려가 서쪽으로 요동, 남쪽으로 한강유역까지 진출한 시점이다. 기존의 포곡식 산성이 보다 대형화되었으며, 축조기술이 향상되었다. 반면, 북한 지역(고구려 내지)에서는 평산성이 확인되기 시작한다.
4기는 6세기 중엽~멸망할때까지로 오히려 포곡식 산성의 규모가 작아지며, 토축산성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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