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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이 말하는 역사│한국 음식문화의 외적 조건"에서 역사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3. 한국의 역사와 음식 문화
 
음식은 자연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라고 한다. 그만큼 음식은 자연 환경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일게다. 그런데 음식은 자연 속에서 그냥 만들어 지지 않는다. 그 자연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이 개재하지 않고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음식에는 그 음식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경험과 삶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음식은 사람과 역사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음식문화에 큰 영향을 준 한국 사람들의 역사적 경험을 무엇일까? 사람들은 저마나 나름의 주장과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한국음식 문화의 특징과 관련되는 역사적 사실의 사례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나누어 검토해보자. 

첫째, 고대 한(韓) 민족의 형성부터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민족의 형성이 곧 한국 음식 문화의 토대를 형성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에 민족의 형성과 관련하여 살펴보자. 한 민족의 형성을 어느 시점으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우리 민족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삼국의 형성기는 우리민족이 역사상 그 실체를 드러내는 시기라고 보는 데는 그다지 이의가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삼국은 주지하는 것처럼 한반도의 북부지방과 만주 일대를 무대로 일어난 고구려, 한반도의 중남부의 서쪽을 무대로 일어난 백제, 백제와 소백산맥을 경계로 동쪽에서 일어난 신라이다. 우리 민족 전통문화의 원형은 이 삼국문화를 모체로 형성되었으며, 신라의 통일에 의해 확립된다고 하겠다.

▲ 안악3호분의 벽화 중 부엌부분

그러면 이러한 민족문화의 형성과 통일은 음식문화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고구려는 북방의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신라와 백제는 남방 및 해양의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신라와 백제가 남방 해양의 음식문화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신라나 백제에는 남방 해양 계통의 음식문화 요소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북방의 음식문화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콩을 식재로 하는 장 문화와 육류를 직화구이로 먹는 맥적(貊炙)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남방 해양의 대표적인 것은 쌀을 주식으로 먹는 ‘밥 문화’와 야채를 절여 먹는 ‘절임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문화는 삼국시대에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였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해 북방 음식문화와 남방의 음식문화가 합쳐져서 우리 민족 초기의 음식문화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민족의 주거문화로서 한옥의 특징이 북방의 ‘온돌’문화와 남방의 ‘마루’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형성되었듯이 한국의 전통적 음식문화도 북방의 ‘장’문화 및 ‘맥적’문화가 남방의 ‘밥’문화 및 ‘절임’문화와 합쳐져 형성되었다고 본다. 

둘째,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까지 불교문화가 장려되어 보급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불교가 억압되고 유교가 숭상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민족의 음식문화에는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차(茶)라고 하면 차나무 잎을 물에 우려 마시는 녹차가 생각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차를 마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차의 전래는 수로왕 부인 허씨가 처음 전래하였다고 하는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더욱 널리 보급되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차문화가 불교의 성행과 더불어 상당히 발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와 같은 국가적인 행사에는 반드시 진다의식(進茶儀式)이 행해졌고, 사찰에는 다전(茶田)과 다천(茶泉)이 있을 정도로 차문화가 크게 번창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가 억압되면서 모든 의식의식이 유교적으로 바뀌어 가면서 술문화가 발전하는 한편 차문화가 침체되어 갔던 것으로 보여 진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담배와 같은 새로운 기호식품이 들어오면서 더욱 차문화의 여지가 줄어들었다. 한편 일상 식생활에 유교적 합리성이 고양되고 약식동의(藥食同意) 의식이 높아지면서 양생음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음청류(飮淸類)가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수준 높은 ‘술 문화’가 꽃이 피고 갖가지 ‘음청류’ 문화가 새롭게 발달하게 되었다. 즉 조선시대 각 가문마다 빚어진 가양주는 곡물을 발효하여 맛나는 알콜만을 빚기보다는 갖가지 좋은 약재를 혼합하여 몸에 좋은 보양주를 빚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유행한 음청류로서 화채, 밀수, 식혜, 수정과, 탕, 장수, 갈수, 숙수, 즙 등이 있었고 이들은 영양의 균형섭취의 원리에서 일상식에서 부족하거나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은 영양소를 보충하는 의미로 널리 애용되었다. 특히 장수(漿水)는 곡물의 젖산발효음료로서 일찍이 삼국사기 김유신조에도 나오는 것으로 우리민족 음식문화에 있어서 발효 기술의 발달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일제의 식민지배에는 우리민족의 음식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일본의 음식문화가 우리들 옆으로 다가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을 것이나, 일제식민지배의 성격과도 같이 우리 식문화를 침략하여 말살하는 악영향도 있었다. 이러한 부정적 성격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술문화에서 나타난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되기 전인 19세말에 우리나라의 각 가문에는 저마다 가양주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19세기말 일본인들이 대충 조사한 가양주의 수만 하더라도 1800여종이었다고 한다. “명가(名家)에 명주(名酒) 있다”는 말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그런데 일제의 식민지배가 본격화 하면서 주세령이 공포되자 우리민족 각 가문에서 즐기던 전통가양주를 만들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전통가양주는 사라지게 되었고, 일제의 살벌한 감시 하에 밀주로 제조하여 제례 등에 사용하면서 근근이 이어온 몇몇 가문의 가양주만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대의 역사적 경험 중에 우리의 음식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는 1960-70년대의 혼분식 장려정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6.25 전쟁 이후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인하여 절대적인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쌀밥 중심의 식생활을 개조하고자 하여 대대적인 식생활 개선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으로부터 잉여 농산물로 들어온 밀가루의 소비를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어 효과를 보기는 하였으나, 전통적인 식생활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음식문화는 자연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형성되고 변화해 간다. 따라서 음식문화를 현재의 현상을 통해서만 이해하기 보다는 자연환경 및 역사적 경험과 관련시켜 살피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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