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daum.net/costmgr/2815
"꼬리빵즈의 정체성에 관한 고찰 - 정연수" 분량이 길어서 본론 부분만 좀 잘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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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꼬리빵즈의 어원 및 유래 고찰
중국의 한족들은 조선족을 가리켜 꼬리빵즈라며 놀린다. 꼬리빵즈는 중국인들이 흔하게 쓰는 말이지만, 중국 어느 사전에도 해설은 나오지 않는다. 또 그 말을 쓰는 한족이나 듣는 조선족 모두 그 어원이나 유래를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꼬리빵즈’란 조선족을 지칭하는 말이며, 조롱할 때 쓰는 말로만 알고 있다. 꼬리빵즈의 어원에 있어 꼬리는 고려(高麗, 고려를 예전에는 고리로, 고구려는 고구리로 부름), 즉 조선족을 뜻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덧 붙여진 ‘빵즈’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따라서 꼬리빵즈의 어원 및 유래 분석은 조선족의 삶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의 길잡이가 될 것으로 보인다. 꼬리빵즈의 유래는 대체적으로 아래 열 가지로 정리되고 있다.
1) 일본과 중국의 연결고리역,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막대기)
(1)꼬리빵즈
꼬리빵즈를 ‘고려막대기’라 보는 경우이다. ‘빵즈(棒子)’는 막대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여기서는 중국과 일본간에 통역을 담당하는 연결고리로서의 막대기라는 뜻이다. 심양사범대학 중국어과의 한 교수(조선족)는 그 유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반도와 산동성의 연해도시가 일본의 식민지로 되면서 조선·중국·일본인이 함께 뒤엉켜 살아야 했다. 당시 일본인은 식민지 중국인과 조선인들에게 일본말을 가르쳐 일본말만 사용하게 하면서 일본인은 1등 공민, 조선인은 그 다음, 중국인은 최하층 민족으로 구분했다. 3개 국민이 한 공간에 섞여 살면서 일본인과 중국인간의 통역은 양국 말을 다 할 줄 아는 조선족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일본인이 미울 때는 한족에게 일본사람이 하지도 않은 말을 꾸며서 나쁘게 얘기하기도 하고, 한족이 미울 때는 일본인한테 나쁜 말을 꾸며서 말했다. 일본인과 중국인의 중간에서 그들의 갈등을 더 격화시켜주는 통역이었던 것이다. 또 당시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일본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만큼 중국인들은 조선인을 고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서 한족은 조선족을 가리켜 고려막대기 즉, ‘꼬리빵즈'라고 부르며 경멸하고 적대시했다. 이 과정에서 막대기처럼 연결하는 역의 꼬리빵즈(고려막대기)가 유래된 것이다.
꼬리빵즈의 유래를 중국과 일본의 고리역으로서의 고려막대기에서 찾는 것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조선인의 대량 이주가 이뤄지던 시점에 ‘꼬리빵즈’란 말이 빈번해진 것으로 보아 중일간의 연결고리서의 막대기 의미가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 일본의 대륙 침략이 자행되던 시기에 조선인의 중국 이주를 두고 중국인들은 ‘조선인을 따라 그 뒤에는 일본인이 쳐들어온다’는 시각을 갖고 몹시 경계하면서 적대시하곤 했었다. 일제강점기 때의 시대 현실만을 본다면 조선인, 즉 한국인들은 ‘자랑스런 황국신민(일본인)’으로 불려졌다. 그런 실정이니 중국인이 보기에는 일본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고 이 때문에 독립투사들 역시 일본의 앞잡이라는 오해를 받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한국 중국 일본의 삼각관계 속에서 생성된 꼬리빵즈였던 것이다.
또 중국에는 꼬리빵즈 외에도 산동지방 사람들을 가리키는 싼뚱빵즈란 말이 있다. 수 많은 지역민, 소수민족 중에서 유독 조선족을 꼬리빵즈, 산동지역 사람을 싼뚱빵즈라고 하는데 대한 공통점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산동사람들 또한 조선인처럼 일본말을 배워 일본인과 중국인의 통역에 나선 이들이 많았고, 그들도 서로에게 편리한 대로 통역을 하곤 했다. 중국의 22개성 중에서 유독 산동사람만 싼뚱빵즈라고 하는 것만 봐서도 중국과 일본의 통역에 나섰던 산동사람들이 막대기(빵즈)의 의미인 싼뚱빵즈라는 별명을 지닌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부지런한 조선인들의 노동 모습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멜대의 막대기, 지게 작대기 등이 중국과 일본 사이를 통역하는 연결고리로서의 막대기 상징성과 결합되면서 꼬리빵즈란 말을 쉽게 굳혀나갔다고 보여진다.
(2) 싼뚱빵즈
동북 3성에 있는 사람들은 관내를 벗어난 산동에 있는 사람들을 ‘싼뚱빵즈’라고 불렀다. 산동사람들은 중화민국 초기에 가난이 극심하여 동북3성에 대량 이주했는데 정착할 때까지 원주민들과 충돌이 잦았다. 그 당시 조선족들도 대량 이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싼뚱빵즈, 꼬리빵즈라고 불렀다.
청나라 말기에 위하성이 쓴 『계림구문록』란 책에 보면 용감하게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관내에 들어온 사람들이 어떤 때는 관병들의 추적에 쫓겨 가파른 산에서 떨어지거나 또는 산짐승들의 먹이로 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는 일도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백산과 흑수에 이민을 왔는데 어떤 사람들은 몰래 황무지를 개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다니며 장사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원주민들에게 고용되기도 하였다.
위하성의 글에는 일찌기 청조 말에 흑룡강과 우수리강 일대에 혁철인(赫哲人)들이 산동인을 고용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그 이야기에서 “혁철인들은 말할 줄도 모르고 또 무역과 교류를 할 줄 몰라 혁철인 집집마다 꼭 싼뚱빵즈를 고용하여 그들이 집 재산과 가무를 돌보게 하였다. 그래서 부르기를 ‘관쟈'(집 살림을 봐주는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싼뚱빵즈가 나온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산동사람들은 동북 사람 즉 원주민들의 관쟈(管家, 집안 관리해주는 사람)를 맡으면서 몽둥이를 들고 무리지어 다녔다. 또 그 전에도 이미 산동사람들은 나무막대기를 가지고 다녔다. 이 막대기는 중국전통의 병기막대기로 산동사람들은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가지고 다니면서 위험할 땐 자신을 보호하는 무기로도 삼았다. 기록에 의하면 “산동사람들은 어깨에 행장을 메고 다니면서 손에는 나무막대기를 들고 그 막대기는 산을 넘고 영을 지날 때 지팡이 삼아 쓰고 또 자기를 보호하는 무기로도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싼뚱빵즈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역시 위하성의 글에는 싼뚱빵즈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얘기도 전해진다.
또한 싼뚱빵즈에는 또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산동사람들이 관내에서 나올 때는 가족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 허락되지않아 오직 홀몸으로 나와야 되었다. 그래서 싼뚱빵즈란 초기에 동북에서 부른 독신 개척자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그들을 ‘개다리’ 혹은 ‘홀아비’라고 불렀다. 그들의 몸에서 봉건압박을 받는 잔혹한 면도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가 없는 노예생활을 하는 박해받고 압박 받는 문화의 비참한 면도 보여졌다. 청조 말에야 와서 대대적으로 문이 열려 ‘초민이간’(백성들을 초빙하고 이주하게 하여 황부지를 개간하게 함)이 되었다. 그리하여 관내로부터 대량의 사람들이 가족들과 자유롭게 동북에 와서 황무지를 개척는 시기였지만, 많은 독신들이 여전히 가족은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산동사람들은 ‘개다리’처럼 노예습성이 몸에 배어있는 채로 사는 살아가는 습성을 지니게 됐다.
싼뚱빵즈들은 원주민들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면서 봉건사회 관리층의 압박과 박해, 천대를 받아왔다. 원주민들의 노예처럼 살면서 비단 육체적 노동뿐 아니라 사회의 천대와 멸시, 정신적인 면에서도 자유가 전혀 없는 비참한 노예 생활을 했다. 그런 산동사람을 ‘개다리’라고 불렀다. ‘개다리’란 강한 사람한테 붙어 다니면서 주인이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으면서 주관이 없는 개의 다리, 즉 ‘앞잡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인이 일제강점기에 일본놈의 개다리였다는 점에서 산동사람들이 원주민의 개다리였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그리하여 중국인이 보기에 산동사람과 조선인을 동일시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또 산동지역 사람들이 가난한 만큼 위생관념이 좋지 못했다. 그리하여 중국 내에서도 산동사람들을 거지취급하였는데, 제나라에서 살지못해 남의 나라에 와서 빌붙어사는 조선인이 중국인의 눈에는 산동사람들과 같이 보였을 것이다.
① 조선민족의 성격이 막대기처럼 강직하기에 꼬리빵즈라는 말도 있습니다. 산동성 사람도 조선사람하고 성격이 비슷하여 산뚱빵즈라고 칭하는 등. 강하고 솔직한 성격을 빵즈라고 말합니다. 저는 솔직히 꼬리빵즈라는 말이 듣기 싫지는 않습니다.(모이자닷컴 ID :호김, 광동 동관 거주, 2004. 12.8)
② 할아버지(62세) 말씀이 싼뚱빵즈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욕하는 말이래요. 그래서 지금도 듣기 싫대요. 아빠(42세)도 많이 들었는데 화나도록 듣기 싫은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좋은 말이 아니래요.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가 더 듣기 싫어해요. 지금도 그 소리를 들으면 화를 낸대요. 누구나 모든 사람들이 싼뚱빵즈라는 소리는 욕이고 조소하는 말로 알고 있어 듣기 싫어해요. 그래서 산동사람들 앞에서는 그런말 잘 안해요.(은○○, 대학생, 산동성 연태시 거주)
③ 할아버지가 이십대 말이었을 때 동북에서 일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동북사람들이 산동사람들은 신체도 좋고 일도 잘해서 “싼뚱렌 헌 빵아(산동사람 신체 매우 튼튼하고 힘이 있다)”라고 했대요. 여기서 빵(膀)은 근육 같은 것이 불뚝불뚝 튀어나온 사람을 ‘빵’하다고 표현하거든요. 물론 신체가 좋고 일을 잘 한다는 것은 나쁜 말이 아니지만 그래도 싼뚱빵즈라고 하면 조소하고 조롱하는 의미가 들어있대요. 그래서 ‘싼뚱빵즈’ 하면 기분 나쁘게 들린다고 해요. 싼뚱빵즈라고 하면 할아버지가 20대 때에는 신체건강한 사람과 나쁜 의미 두 가지를 다 가리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기분 좋게 들리는 것은 아니래요. 기분이 몹시 나쁘대요. 할머니의 경우에는 싼뚱빵즈하면 무조건 듣기 싫은 말이래요. 60살 된 동네 어른들한테 물어봤더니 모두 다 안 좋은 말이라고 받아들였어요.(장○○, 대학생, 청도 거주)
일부,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①에서처럼 꼬리빵즈란 말을 산동사람과 조선족의 좋은 습성에 비춰 받아들여서 듣기에 싫지 않다고 밝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조선족이 꼬리빵즈를, 그리고 산동사람들은 싼뚱빵즈를 듣기 싫어했다. 오늘날 중국 내에서는 꼬리빵즈와 싼뚱빵즈라는 말을 듣는 것이 드물어지고 있다. 그것은 모두가 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 앞에서는 못하고 뒤에서만 하게되기 때문이다.
한편 앞서 설명된 산동사람과 일제강점기의 조선인의 삶의 여건이 서로 닮았다는 것 외에도 산동사람과 한국인의 비슷한 기후나 체질 등에서도 공통점이 보여진다. 산동지방이 조선족의 모국인 한국과 가깝고 기후나 체질 등의 조건이 비슷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사람들이 산동사람들을 좋아하고, 산동 지역에 한국의 많은 기업이 진출해 있는 것만 보아도 산동지역과 한국의 유대는 오래되었다. 꼬리빵즈와 싼뚱빵즈 중 어느 쪽이 먼저 생겨난 말인지는 몰라도 산동지역 사람들이 겪었던 설움과 함께 조선족의 설움의 역사가 꼬리빵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2) 멜대를 사용하는 조선인의 생활,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막대기)
꼬리빵즈를 고려막대기로 보면서도 그 유래를 조선족이 즐겨 사용하던 밴딴(扁擔, 멜대, 멜채)에서 찾는 경우이다. 밴딴이란 양쪽 끝에 물건을 달아 어깨에 메는 긴 나무로 만든 어깨걸이(멜대)를 말하는 것으로 평안도와 중국 조선족들은 변대 혹은 벤대라고 부른다. 이 밴딴을 이용해 거름을 져 나르기도 하고, 물을 길어 나르기도 하고, 똥오줌을 퍼 나르고, 연탄(석탄)을 나르는 등 온갖 노동에 활용했다.
또 조선인은 지게막대기 등 막대기를 즐겨 들고 다녔으니, 으레 조선족하면 나무 막대기를 어깨에 걸치거나 지게막대기를 손에 잡고 일하는 모습이 연상됐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조선족을 가리켜 꼬리빵즈(고려막대기)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비교적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 의식을 지니고 있다할 조선족 지식인(요녕조선족사범대학 교원)에게 꼬리빵즈의 의미를 물었을 때, 대체적으로 통역과 연결고리, 막대기 사용 생활풍습에 의한 종합적 의미의 꼬리빵즈(高麗棒子-고려막대기)라는 대답이 많았다. 이 응답에는 송○○강사(여, 32, 중국어학 전공), 정○○교수(남, 46, 중국어학 전공), 김○○교수(여, 38 조선어문학 전공), 박○○교수(정치학 전공), 강○○교수(심리학 전공)가 참여했다.
3) 고려패거리, 꼬리빵즈(高麗幇 : 고려패거리)
꼬리빵즈를 ‘고려패거리’로 보는 경우이다. 중국에서 ‘빵(幇)’이란 무리라는 말인데 주로 사람을 낮추어서 부르는 패거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꼬리빵즈는 고려무리, 혹은 고려패거리를 낮춰 부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못난 사람, 싫은 사람들의 무리를 낮잡아 부를 때 ‘빵’(幇)을 쓰고 있다.
한국이나 조선에서는 꼬리빵즈란 말이 없는데 유독 동북에서 그 말이 나온 것으로 보아 동북에 일본놈이 쳐들어왔을 때 생겨난 말이다. 1등 공민이라고 자칭하던 일본놈은 조선족을 2등 공민으로 대우해줬고, 그 때 조선인은 일본놈의 앞잡이로 나쁜 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중국사람들 눈에는 조선인이 자기들보다 높은 2등공민이지 그리고 또 앞잡이 노릇까지 하니까 미울 수밖에 없었다. 또 조선족은 부락으로 이뤄 살고 있었으니 ‘조선놈들’, ‘조선사람 무리들’이란 이름으로 꼬리빵즈라고 불렀다.
여기서 조선이 아니라 꼬리빵즈가 된 것은 중국인들이 조선족을 역사 속의 고구려와 연상시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는 발전하지 못했지만 싸움을 잘해 영토를 많이 확장시킨 고구려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그 때 중국은 지금처럼 통일된 큰 대국이 아니라 흉노족 등 작은 나라들로 구성됐는데, 고구려 병사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놀라곤 했다. 굳게 뭉쳐진 고구려는 무리지어 다녔고 힘도 강해서 인접해 있던 나라들이 제일 무서워했던 공포의 대상이었다. 여기서 고구려 무리 온다(꼬리빵 날이 라)는 말이 생겨났다.
중국은 22개 성인데, 유독 산동성만 싼뚱빵즈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족-한족-만주족 간의 관계 형성에 있다. 동북은 만주족이 건립한 나라로 만주족의 폐쇄성으로 기타민족을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개방물결을 타면서 조선족도 가만 가만 동북에 들어오게 되었고 한족들 가운데 살길을 찾아나선 거지와 못살던 산동사람들이 제일 먼저 동북에 들어오게 됐다. 그래서 점차 산동사람이 많아지면서 한족의 인구도 늘었는데 조선족들은 그걸 모르고 한족이면 다 산동무리로 알고 싼뚱빵즈라고 불렀던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꼬리빵즈가 조선족들이 막대기를 잘 사용하여 그렇게 부르는가 했었다. 하지만 역사공부를 하면서 빵즈는 막대기(棒子)가 아니고 패거리(幇)라는 걸 알게됐다. 그렇게 설명한 걸 어느 책에서 본 적도 있다.
심○○교수(여, 44, 역사학 전공, 연변 화룡시 출생, 현재 요녕성 조선족사범대학 교수)
‘산동 빵즈’란 말은 ‘꼬리 빵즈’와는 뜻이 다른 걸로 알고 있다. 산동사람들이 하나 같이 잘 뭉친다는 의미에서 왔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빵즈’는 ‘방망이’가 아니라 ‘무리’라는 뜻에 더 가까운 것 같다.(모이자닷컴 ID : 홍산도. 2004. 12. 11)
실제 꼬리빵즈라고 놀리던 한족 중에서는 꼬리빵즈를 ‘빵(幇)’의 의미를 떠올려 고려패거리로 생각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택동 아내 쟝칭(江靑), 왕훙원(王洪文), 장춘쵸우(張春橋), 요우원왼(姚文元) 등 네사람 악질 중앙간부를 중국 4인방(四人幇)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빵(幇)’을 패거리의 나쁜 의미보다는 무리라는 보통 의미로 쓰고 있다. 국가대표 3인방이니, 탤런트 3인방, 과학대표 3인방, 바둑 신예기사 4인 방 등 오히려 좋은 의미로 통용되는 실정이다. 중국에서도 ‘빵(幇)’의 고대 어원은 중성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나쁜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현재 발행되는 중국 사전에는 ‘낮잡아 말하는 뜻’이라고 나와 있을 정도이다. 한국에서 ‘빵(幇)’을 좋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옛날 중국 글자의 뜻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4) 용맹한 고구려병사의 몽둥이,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몽둥이)
꼬리빵즈를 고구려병사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경우이다. 빵즈(棒子)는 몽둥이(방망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고구려 시대에 중국 한족들에게 있어 용맹한 고구려 병사는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병사들의 용맹을 고구려의 몽둥이(방망이)로 본데서 ‘꼬리빵즈’가 유래했다는 것이다. 실제 많은 한족들 또한 “옛날 고구려는 대단했다”라면서 이 어원에 수긍을 한다.
① ‘꼬리빵즈’란 중학교 때 역사선생님이 가르치시기를, 고구려 때 중국과 변경을 사이 두고 충돌이 잦았는데 고구려병사들이 육모방망이(빵즈)를 들고 싸우는 것이 그렇게 용맹하고 날렵해서 중국병사들이 고려병사를 부르는 대명사랍데다. (모이자닷컴 ID별찌, 길림성 안도현, 남, 27세, 2004. 12.6)
② 꼬리빵즈란 말은 고구려 시대부터 내려온 말입니다. 고구려시대의 장수태왕 때부터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고구려 군사들은 용맹스럽기도 했지만 한족입장에서는 무자비했습니다. 반항하는 적들에게는 방망이로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꼬리빵즈라는 말은 한족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사실 한민족은 한족들처럼 넓은 땅에 살고 있지 않고 땅의 끝 쪽에 살다보니 전쟁이 나면 죽기살기로 싸운다고 합니다. 그런 정신이 오늘날 한국과 북한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한족들은 땅이 워낙 넓어서 그런지 전의를 상실하면 오합지졸이 되곤 한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아직도 ‘당나라군대’라는 말이 한국군대에서 쓰입니다. 그 뜻은 군기가 빠진 오합지졸 같다고 할 때 쓰입니다. 군대에서 고참이 졸병들 기합 줄 때 "여기가 당나라 군대인줄 알아?" 하면서 기합을 주곤 합니다.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한국에서는 조롱거리로 불립니다. (모이자닷컴 ID:고려청년, 산동성 연태시, 2004. 12.7)
③ 고려란 단어를 처음으로 들은 건 아주 어릴 적이었다. 아마 소학교 1·2 학년 정도? 하루는 한족남자애랑 놀다가 싸움이 일어났는데 나를 꼬리빵즈 라고 하는 거였다. 욕이라고 생각하고 정신 없이 싸웠지만 무슨 뜻인지 몰랐기에 집에 와서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는 껄껄 웃으시면서 그건 욕이 아니란다. 한족들이 옛날에 고구려 사람들한테 몽둥이에 죽도록 얻어 맞고 혼난 담부터 고려인들보고 꼬리빵즈 라고 한단다. 그래서 몽둥이에 죽도록 얻어터진 옛날 한족들이 고구려인 하면 먼저 생각난 게 무섭던 몽둥이여서 고려 몽둥이라고 불렀단다. 그 고려인이 바로 우리의 조상이란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어쩌면 욕인지도 모를 그 말에 자호감을 가졌다. 아무튼 우리는 대단했던 고구려의 자손이란 것만으로…(중략)… 그리고, 중학교 때 역사교과서에서 수양제가 고구려하고 전쟁하다 대패하는 과정을 배울 땐 고구려인의 후손이란 자긍심에 가슴이 뿌듯했다.(월드아리랑 ID:귀구(鬼廐) 2004. 9. 5)
④ 중국여행 시 기차 속에서 조선족을 만나 대화 할 일이 있었는데 옆에 듣고 있던 한족 청년 입에서 꼬리빵즈라는 욕설이 나왔던 것 같다. 그 때는 몰라서 넘어 갔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고구려 몽둥이’라는 뜻이란다. 수·당나라때 고구려 침략시 얼마나 고구려 백성들에게 몽둥이로 맞았으면 그런 표현이 생겨났을까 싶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아무튼 중국인들에게 한마디, 얻어맞을 짓은 하덜 마!(ID : 행복, 2004. 12. 4)
⑤ 꼬리빵즈란 유래를 가지고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고구려 몽둥이’라구 하였어요. 고구려 때 병사들이 몽둥이를 너무 잘 써서. 적병들이 질질 떨었다고 꼬리빵즈란 말이 나왔다 하던데요. 그리고 몇 년 전에 있은 일인데, 우리 연변오동팀이 상해팀과 상해에서 축구경기를 할 적에 상해관중석에서 ‘꼬리빵즈를 물리치자’는 글발이 적혀져 있는 것을 본적이 있어요. 기분이 나빴어요. 그럼 지네 상해사람들은 ‘쌍하이와쯔’인가? (모이자닷컴 ID : 럭키, 2004. 12.13)
많은 유래들이 모두 도리가 있는 말이라고는 느끼지만 중요한 것은 한족들이 우리를 꼬리빵즈라고 말할 때에는 대부분 상황에서는 우리를 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구려병사의 용맹성을 뜻하는 고려몽둥이로 이해를 하고자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속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자식이 저에게 꼬리빵즈란 무엇인가 하고 물어봐도 저는 그 뜻풀이로 알려 줄 생각입니다. 욕은 욕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대해 우리도 방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이자닷컴 ID : 김선철, 2004. 12.11)
많은 조선족들이 꼬리빵즈를 고구려몽둥이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설문에 참여한 많은 조선족이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꼬리빵즈는 고구려몽둥이에서 유래된 말로 배우며 자랐다고 증언했다.
고구려몽둥이로 받아들이는 데 대해서는 ‘스스로의 위안일 뿐’이라는 비판도 만만찮았다. 고구려의 기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나라 잃은 서러움과 타민족 속에 소수민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서러움을 고구려 조상의 정신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위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위 에서처럼 욕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기방어를 위한 방편으로 중국에 우위적 힘을 과시하던 고구려의 위상을 이어받고자 하는 의식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는 중국내 소수민족이 겪는 차별 - 공식적으로는 중국내 소수민족의 차별은 없다지만 현실 속에서는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 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고구려몽둥이 해석은 조선족들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어원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의식은 앞으로도 꼬리빵즈를 고구려의 몽둥이로 해석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고구려의 역사를 상기시키려는 조선족의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꼬리빵즈의 의미 변화는 한민족의 위상 변화라 하겠다. 중국인을 떨게 한 꼬리빵즈(고구려 몽둥이)가 고려의 후손 조선족을 비난하는 꼬리빵즈로 전락한 것은 민족의 전락을 역사 속에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맹한 고구려 병사의 기상을 지칭하던 꼬리빵즈(고구려 몽둥이)는 고구려의 몰락과 함께 위력을 잃고만 것이다. 결국 꼬리빵즈는 조국을 잃고 떠나온 조선인의 유이민이 급증하는 시기에 들면서 위력 있던 몽둥이에서 멸시와 조롱의 몽둥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조선족은 비록 중국내 소수민족으로 살아가지만 명석한 두뇌, 지대한 교육열,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가려는 노력, 전통의 계승과 보전 등을 통해 민족의 새로운 비전을 꿈꾸고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조선족의 위상이 중국내에서 제고되고 있는 만큼 한국인은 조선족의 경제성장을 도와나가야 한다. 그 길은 곧 꼬리빵즈의 옛 용맹과 기상을 되찾는 길이며, 중국내에서뿐 아니라 세계 속에서 한민족의 성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5) 빨래방망이를 사용하는 조선인의 생활,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방망이)
‘빵즈(棒子)’란 방망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만큼, 꼬리빵즈란 ‘고려방망이’에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 정착해 살아가던 조선인들은 조선(한국)에서 생활하던 그 풍습을 고스란히 지키며 생활했다. 한족들은 우물가에서 빨래할 때 빨래판을 쓰거나 비벼서 빠는데 비해 조선족 아낙네들은 빨래망치를 사용했다. 조선족의 생활은 중국인의 생활문화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족 여인의 빨래망치를 보면서 꼬리빵즈(고려 방망이)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제가 이전에 어른들한테서 듣건대 우리 민족 아낙네들이 빨래망치를 많이 쓰는데서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모이자닷컴 ID : 인준, 중국 장춘 거주 학생, 2004. 12.6)
빨래 방망이는 우리 조선족들만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변에서는 가끔 강가에서 빨래방망이로 빨래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해 저도 저의 언니가 부탁하기에 흥안시장에서 빨래방망이를 산 적이 있습니다. 한족들은 주로 빨래판으로 빨래를 합니다.(모이자닷컴 ID : 홍산도. 2004. 12. 11)
한족들은 빨래판을 쓰면서 비벼대서 빨래를 했지만, 조선족은 빨래할 때마다 망치질을 했어요. 한족들은 풀 먹이는 옷감이 없었지만, 우리는 옷에 풀을 먹여야 됐잖아요. 그래서 빨래가 마르고 나면 저녁상을 물린 후 밤이 늦도록 다듬이망치질을 하는 거예요. 밤낮없이 망치질을 했으니 중국인들이 보기에도 별달라 보였겠죠. 그래서 빨래망치 때문에 꼬리빵즈란 말이 생겨난 거예요.(박영애, 여, 51, 길림성 도문시, 전 은행근무) 박경애: 한족 소학교, 조선족 중학교, 한족고등학교 졸업. 조선족 학교 출신은 한어를 유창하게 못한다는 이유에서 부모가 중국어를 잘하도록 하기 위해 한족 학교를 보냈다.
꼬리빵즈를 조선족 여인들이 쓰던 빨래방망이에서 비롯됐다는 견해도 많았다. 조선족 여인들은 빨래할 때 너도나도 할 것없이 빨래방망이를 썼으니,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특이하게 보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빨래방망이를 사용하는 조선여인의 빨래 풍습에서 꼬리빵즈(고려방망이)가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여인들이 사용하는 빨래방망이는 주로 소백산 소철나무로 만들어졌다. 빨래방망이가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지 않도록 물에 가라앉는 재질이 필요한데, 소철나무는 물보다 비중이 높아서 인기가 있었다.
한편 꼬리빵즈의 유래는 조선족 여인들의 빨래방망이 사용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에 까지 닿아있다.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중국, 당시 수(隋)나라와 전쟁을 벌이던 마지막 싸움터에서는 여자들이 빨래방망이까지 가지고 나와 힘을 보태 수나라 군사들과 싸웠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구려여인들의 빨래방망이란 뜻에서 꼬리빵즈란 어원이 나왔다고 보기도 한다. 여인들이 빨래방망이를 들고 싸운다는 말을 통해서는 용맹성과 야만이란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꼬리빵즈의 유래가 되기도 한 빨래방망이는 한국에서 혹은 한국을 떠나 살아가는 조선족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인들의 전통적인 생활문화였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빨래방망이를 즐겨 사용하는 모습을 시골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세탁기의 대중화로 빨래방망이 사용 모습이 사라졌는데, 중국에서도 세탁기가 보급되면서 조선족의 빨래방망이 사용이 사라졌다. 지금은 중국 시골지역에서나 빨래방망이질을 하는 조선족 여인들을 가끔 볼 수 있을 뿐이다.
6) 조선사절단의 몽둥이,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몽둥이)
꼬리빵즈를 중국에 간 조선사절단이 휘두른 몽둥이라는 데서 비롯됐다고 보기도 한다.
옛날 조선인들이 종주국 중국에 공물(貢物)을 바치러 갈 때 도중에서 마적들에게 빼앗기는 예가 잦았다. 그래서 중국 조정에서 조선사절단에게 몽둥이로 접근하는 중국인을 족치는 특권을 주었다. 사절단이 이를 악용해 중국 양민까지 족쳤기 때문에 조선인을 ‘高麗棒子'라고 불렀다.(조선족, 「高麗棒子」, 베이징저널, 2002.9.06?)
조선사절단에게 접근하는 중국인을 방망이로 때리게 했기 때문에 꼬리빵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것이다. 이 설은 소수의 주장이며, 이 말에 수긍하는 이들은 적지만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7) 중국 땅의 방망이 같은 한반도의 지형,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방망이)
조선족의 생활상인 방망이와 함께 한반도의 지형적인 측면에서 방망이로 보는 견해이다. 이 의견 역시 소수이기는 해도 중국이 지니고 있는 땅 욕심에 연결시키고 있어 주목해볼만 하다. 특히 대륙기질을 지닌 중국인들은 중국 대륙의 한 귀퉁이에 붙어있는 듯한 한반도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손에 잡을 수 있는 방망이나 꼬리 정도로 치부했다. 조선의 역사를 중국 역사 속의 속국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그러한 모습을 반증한다.
역사적으로 한국을 중국의 속국 쯤으로 보아온 중국인의 의식이 한반도의 지형을 중국이 쥐는 방망이 뜻에서 꼬리빵즈(고려방망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땅 욕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 중국이란 나라 이름이 지향하는 중화세계 속에는 땅의 욕심이 여전히 남아있다.
김월의는 「고구려의 미래를 지키려면 오늘과 역사를 함께」란 칼럼에서 중화세계란 “중국인들이 곧잘 술김 반 진담 반으로 말하는, 중원(中原)을 중심으로 한 현재 영토 플러스 전통적 고유영토(조선, 오키나와, 대만, 외몽고, 북인도,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일본, 버어마, 태국, 월남)까지를 포함한 중국식 지리적 공간개념”이라면서 이 중화세계가 “오늘의 <동북공정>을 위한 기반을 닦아준 셈” 김월의, 「고구려의 미래를 지키려면 오늘과 역사를 함께」(문화재방송국, 2004. 8.18) 사이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8) 속어 똥자루,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 똥자루)
꼬리빵즈의 방망이를 속어로 직접 사용하는 경우이다. ‘빵즈’(방망이)의 의미를 확장하여 머리 없는 방망이이란 뜻에서 ‘머리 없는 자루’를 연상시켜, 고려자루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더 나쁜 의미의 ‘고려똥자루’라는 속된 표현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꼬리빵즈’를 욕으로 쓰면서 빵즈(棒子)가 지닌 원래 의미 중에서 가장 나쁜 의미를 찾아 연결시키는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9) 튀김과자 마화, 꼬리빵즈
꼬리빵즈를 ‘밸밸꼬인 튀김 음식인 마화’로 보는 경우이다. 중국의 서북부 러시아 근처에 위치한 신강 위글족 자치구에서는 튀김음식인 마화(mahua)를 꼬리빵즈라고 불렀다. 길이 20cm 크기에 밸밸 꼬인 모양으로 기름에 튀겨져 나오는 마화는 과자처럼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맛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한족들이 즐겨먹는 마화를 두고 상하이 사람들은 꼬리빵즈라고 부른다. 신강 위글족 자치구에서는 1968년 경 상하이에서 내려온 많은 하향지식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이 마화를 사면서 꼬리빵즈라고 부르던 것을 흔하게 들을 수 있었다. 독립투사로 유명한 양세봉 장군의 조카인 양이복씨가 마화 꼬리빵즈 때문에 겪은 에피소드가 있다.
1963년부터 1970년까지 7년 동안 신강 위글족자치구 우룸무치에서 생활할 때였어요. 그 때 상해에서 온 하향지식청년들이 마화를 사면서 꼬리빵즈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내가 뒤돌아보면서 “나를 지금 욕하는가?” 하고 다그쳐 물었어요. 그런데 그 하향지식청년들은 그냥 자기네는 마화보고 말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동북에서는 꼬리빵즈란 조선사람 욕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던 일이 있어요.
1982년 상해에 갔을 때 우룸무치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상해사람들한테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어요. “너네 마화 보고 꼬리빵즈라고 하네?”하고 물었더니 그들이 그렇다고 대답합디다. - 양이복(54, 전 료녕성 심양시 신민현 호태향 사방전 소학교 령도로 재직)
마화 즉 꼬리빵즈의 꼬여있는 모습과 조선족의 삶이 닮은 모습에서 마화를 조선족의 삶에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경우의 꼬리빵즈란 중국과 일본의 강대국 틈바구니에 살아가면서 중일전쟁처럼 열강의 패권 다툼 때마다 튀겨져 밸밸 꼬인 꽈배기 신세가 되는 조선족의 삶을 빗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양이복씨는 조선족이 밸밸 꼬인 물건들을 잘 만들고 잘 써서 붙여진 별명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조선족들은 새끼 꼬기를 잘 했으며, 또 배배꼬인 똬배기를 머리에 얹어 물건을 날랐다. 실제 생활에서 짚신 꼬기, 짚으로 배배꽈서 닭둥지 만들기 등 꼬아서 만든 생활용품들이 많았다. 그렇게 조선족들이 즐겨 사용하는 생활 소품들이 마치 밸밸 꼬인 마화를 닮았다는 데서 꼬리빵즈(마화)로 불려졌다는 것이다.
지금도 상해에서는 마화를 보고 꼬리빵즈라고 부르고 있다. 상해에서는 마화만이 아니라 마화처럼 꼬인 물건을 모두 ‘꼬리빵’ 혹은 ‘꼬리빵즈’라고 부르는 것이다.
10) 타지방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 꼬리빵즈(高麗膀子 : 고려촌뜨기)
대도시에서는 시골뜨기 정도의 의미로 ‘빵즈’라고 부른다. 그리고 막노동하는 사람들도 빵즈라 부르는데 여기서의 ‘빵즈(膀子)’는 촌뜨기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다. 북경의 골목에는 웃퉁을 활짝 벗어제친 배불뚝이 장노년층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을 가리켜 빵즈(膀子)라고 불렀다. 특히 동북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北京) 방언에 타지방에서 온 사람이나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얕잡아 ‘棒子'라 부르는 말이 있다. 이를테면 둥베이에서 온 사람을 '관둥(關東)빵즈', 손재간으로 벌어먹는 사람을 ‘서우이(手藝)빵즈', 체육인을 ‘티위(體育)빵즈’라고 한다. ‘티위빵즈'는 지금도 상용어로 쓰이고 있다. 우리말 중 시골사람을 ‘촌뜨기'라 하는 것과 비슷한 욕이다. ‘×장이' ‘×꾼'보다 폄의(貶意)가 좀 더 강한 칭호이다.
타지방뿐 아니라 타국의 타민족으로, 그것도 쪽박 차고 거의 동냥하다시피 들어온 우리민족을 이렇게 얕잡아 불렀을 것은 뻔하다. 이 말은 약 1백년 전에는 많이 쓰였지만 지금은 점점 없어져 가는 상황이다. (조선족, 「高麗棒子」, 베이징저널, 2002)
위의 글에서는 빵즈에 시골뜨기 정도의 의미뿐아니라 우리말로 천한일을 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접미사 ‘장이’에 해당하는 의미까지 지니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럴 경우 이 ‘빵즈(膀子)’는 천한 무리 전체에게 해당하면서 한국 즉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조선족을 ‘꼬리빵즈( 高麗膀子)라고 불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꼬리빵즈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열 가지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대체로 꼬리빵즈는 ‘幇’의 패거리, ‘棒’의 막대기, ‘棒’의 몽둥이 혹은 빨래망치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있음이 확인됐다. 여기서 패거리를 나타내는 빵(幇)은 ‘꼬리빵’으로만 발음되기 때문에 ‘꼬리빵즈’와는 다른 말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꼬리빵즈가 막대기, 몽둥이, 빨래망치, 무리의 뜻 중 어느 것에서 유래된 것인지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언어적인 측면에서 비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이 말이 중국인이 조선족을 상대로 사용하면서 경멸하고 조롱할 때 쓰는 욕으로 쓰여지고 있으며 그 어원을 살펴볼 때 한국의 역사와 생활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을 칭하는 일본어 ‘조센징’이 조선인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욕이 된 것처럼, 나라를 잃고 중국이라는 남의 나라에서 삶을 살아가던 조선인이 겪던 비애라 하겠다. 용맹한 고구려의 몽둥이의 의미를 지닌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중국으로 이주해 갈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나라의 민족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의 틈바귀에 살면서 생겨난 서러운 이름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꼬리빵즈라고 부른다 하여서 화낼 것이 아니라 느긋하게 받아들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몽둥이에는 용감한 고구려병사의 국토방위의 몽둥이, 조선족 여인의 빨래방망이, 다듬이 방망이 등의 조선인(한국인)의 생활 특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화에서 비롯됐다 하더라도 짚을 꼬아 생활하던 우리 민족의 정겨운 삶이 묻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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