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조사는 ‘꼬리빵즈’의 어원 및 유래 조사를 위해 중국의 심양, 연변, 산동, 북경 등지에 거주하는 조선족, 한족들을 대상으로 직접 면담과 인터넷을 통한 서면답변 등의 방식으로 이뤄졌다. 특히 중국내 현지 조사에 있어서는 요녕조선족사범대학 한국어학과의 김춘련 교수(38, 요녕 무순출생, 연변대학원 아시아비교문학과 석사졸업)의 도움으로 조선족대학의 교직원, 조선족 및 한족 학생들의 면담조사가 2004년 10월1일부터 12월 15일까지 이뤄질 수 있었다. 그 외 2005년 1월 24일부터 1월 31일까지 8일간 심양, 연변 등지를 방문해 직접 면담을 진행했으며, 한국 내에 거주하는 조선족과 한족들을 대상으로 한 직접 면담 및 전화, 인터넷 인터넷 질의답변 등을 병행했다. 그리고 기존에 발표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각종 글에서도 꼬리빵즈의 쓰임새를 수집하여 참고했다.
2. 꼬리빵즈의 어원 및 유래 고찰
중국의 한족들은 조선족을 가리켜 꼬리빵즈라며 놀린다. 꼬리빵즈는 중국인들이 흔하게 쓰는 말이지만, 중국 어느 사전에도 해설은 나오지 않는다. 또 그 말을 쓰는 한족이나 듣는 조선족 모두 그 어원이나 유래를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꼬리빵즈’란 조선족을 지칭하는 말이며, 조롱할 때 쓰는 말로만 알고 있다. 꼬리빵즈의 어원에 있어 꼬리는 고려(高麗, 고려를 예전에는 고리로, 고구려는 고구리로 부름), 즉 조선족을 뜻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덧 붙여진 ‘빵즈’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따라서 꼬리빵즈의 어원 및 유래 분석은 조선족의 삶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의 길잡이가 될 것으로 보인다. 꼬리빵즈의 유래는 대체적으로 아래 열 가지로 정리되고 있다.
1) 일본과 중국의 연결고리역,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막대기)
(1)꼬리빵즈
꼬리빵즈를 ‘고려막대기’라 보는 경우이다. ‘빵즈(棒子)’는 막대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여기서는 중국과 일본간에 통역을 담당하는 연결고리로서의 막대기라는 뜻이다. 심양사범대학 중국어과의 한 교수(조선족)는 그 유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반도와 산동성의 연해도시가 일본의 식민지로 되면서 조선·중국·일본인이 함께 뒤엉켜 살아야 했다. 당시 일본인은 식민지 중국인과 조선인들에게 일본말을 가르쳐 일본말만 사용하게 하면서 일본인은 1등 공민, 조선인은 그 다음, 중국인은 최하층 민족으로 구분했다. 3개 국민이 한 공간에 섞여 살면서 일본인과 중국인간의 통역은 양국 말을 다 할 줄 아는 조선족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일본인이 미울 때는 한족에게 일본사람이 하지도 않은 말을 꾸며서 나쁘게 얘기하기도 하고, 한족이 미울 때는 일본인한테 나쁜 말을 꾸며서 말했다. 일본인과 중국인의 중간에서 그들의 갈등을 더 격화시켜주는 통역이었던 것이다. 또 당시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일본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만큼 중국인들은 조선인을 고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서 한족은 조선족을 가리켜 고려막대기 즉, ‘꼬리빵즈'라고 부르며 경멸하고 적대시했다. 이 과정에서 막대기처럼 연결하는 역의 꼬리빵즈(고려막대기)가 유래된 것이다.
꼬리빵즈의 유래를 중국과 일본의 고리역으로서의 고려막대기에서 찾는 것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조선인의 대량 이주가 이뤄지던 시점에 ‘꼬리빵즈’란 말이 빈번해진 것으로 보아 중일간의 연결고리서의 막대기 의미가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 일본의 대륙 침략이 자행되던 시기에 조선인의 중국 이주를 두고 중국인들은 ‘조선인을 따라 그 뒤에는 일본인이 쳐들어온다’는 시각을 갖고 몹시 경계하면서 적대시하곤 했었다. 일제강점기 때의 시대 현실만을 본다면 조선인, 즉 한국인들은 ‘자랑스런 황국신민(일본인)’으로 불려졌다. 그런 실정이니 중국인이 보기에는 일본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고 이 때문에 독립투사들 역시 일본의 앞잡이라는 오해를 받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한국 중국 일본의 삼각관계 속에서 생성된 꼬리빵즈였던 것이다.
또 중국에는 꼬리빵즈 외에도 산동지방 사람들을 가리키는 싼뚱빵즈란 말이 있다. 수 많은 지역민, 소수민족 중에서 유독 조선족을 꼬리빵즈, 산동지역 사람을 싼뚱빵즈라고 하는데 대한 공통점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산동사람들 또한 조선인처럼 일본말을 배워 일본인과 중국인의 통역에 나선 이들이 많았고, 그들도 서로에게 편리한 대로 통역을 하곤 했다. 중국의 22개성 중에서 유독 산동사람만 싼뚱빵즈라고 하는 것만 봐서도 중국과 일본의 통역에 나섰던 산동사람들이 막대기(빵즈)의 의미인 싼뚱빵즈라는 별명을 지닌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부지런한 조선인들의 노동 모습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멜대의 막대기, 지게 작대기 등이 중국과 일본 사이를 통역하는 연결고리로서의 막대기 상징성과 결합되면서 꼬리빵즈란 말을 쉽게 굳혀나갔다고 보여진다.
(2) 싼뚱빵즈
동북 3성에 있는 사람들은 관내를 벗어난 산동에 있는 사람들을 ‘싼뚱빵즈’라고 불렀다. 산동사람들은 중화민국 초기에 가난이 극심하여 동북3성에 대량 이주했는데 정착할 때까지 원주민들과 충돌이 잦았다. 그 당시 조선족들도 대량 이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싼뚱빵즈, 꼬리빵즈라고 불렀다.
청나라 말기에 위하성이 쓴 『계림구문록』란 책에 보면 용감하게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관내에 들어온 사람들이 어떤 때는 관병들의 추적에 쫓겨 가파른 산에서 떨어지거나 또는 산짐승들의 먹이로 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는 일도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백산과 흑수에 이민을 왔는데 어떤 사람들은 몰래 황무지를 개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다니며 장사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원주민들에게 고용되기도 하였다.
위하성의 글에는 일찌기 청조 말에 흑룡강과 우수리강 일대에 혁철인(赫哲人)들이 산동인을 고용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그 이야기에서 “혁철인들은 말할 줄도 모르고 또 무역과 교류를 할 줄 몰라 혁철인 집집마다 꼭 싼뚱빵즈를 고용하여 그들이 집 재산과 가무를 돌보게 하였다. 그래서 부르기를 ‘관쟈'(집 살림을 봐주는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싼뚱빵즈가 나온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산동사람들은 동북 사람 즉 원주민들의 관쟈(管家, 집안 관리해주는 사람)를 맡으면서 몽둥이를 들고 무리지어 다녔다. 또 그 전에도 이미 산동사람들은 나무막대기를 가지고 다녔다. 이 막대기는 중국전통의 병기막대기로 산동사람들은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가지고 다니면서 위험할 땐 자신을 보호하는 무기로도 삼았다. 기록에 의하면 “산동사람들은 어깨에 행장을 메고 다니면서 손에는 나무막대기를 들고 그 막대기는 산을 넘고 영을 지날 때 지팡이 삼아 쓰고 또 자기를 보호하는 무기로도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싼뚱빵즈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역시 위하성의 글에는 싼뚱빵즈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얘기도 전해진다.
또한 싼뚱빵즈에는 또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산동사람들이 관내에서 나올 때는 가족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 허락되지않아 오직 홀몸으로 나와야 되었다. 그래서 싼뚱빵즈란 초기에 동북에서 부른 독신 개척자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그들을 ‘개다리’ 혹은 ‘홀아비’라고 불렀다. 그들의 몸에서 봉건압박을 받는 잔혹한 면도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가 없는 노예생활을 하는 박해받고 압박 받는 문화의 비참한 면도 보여졌다. 청조 말에야 와서 대대적으로 문이 열려 ‘초민이간’(백성들을 초빙하고 이주하게 하여 황부지를 개간하게 함)이 되었다. 그리하여 관내로부터 대량의 사람들이 가족들과 자유롭게 동북에 와서 황무지를 개척는 시기였지만, 많은 독신들이 여전히 가족은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산동사람들은 ‘개다리’처럼 노예습성이 몸에 배어있는 채로 사는 살아가는 습성을 지니게 됐다.
싼뚱빵즈들은 원주민들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면서 봉건사회 관리층의 압박과 박해, 천대를 받아왔다. 원주민들의 노예처럼 살면서 비단 육체적 노동뿐 아니라 사회의 천대와 멸시, 정신적인 면에서도 자유가 전혀 없는 비참한 노예 생활을 했다. 그런 산동사람을 ‘개다리’라고 불렀다. ‘개다리’란 강한 사람한테 붙어 다니면서 주인이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으면서 주관이 없는 개의 다리, 즉 ‘앞잡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인이 일제강점기에 일본놈의 개다리였다는 점에서 산동사람들이 원주민의 개다리였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그리하여 중국인이 보기에 산동사람과 조선인을 동일시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또 산동지역 사람들이 가난한 만큼 위생관념이 좋지 못했다. 그리하여 중국 내에서도 산동사람들을 거지취급하였는데, 제나라에서 살지못해 남의 나라에 와서 빌붙어사는 조선인이 중국인의 눈에는 산동사람들과 같이 보였을 것이다.
① 조선민족의 성격이 막대기처럼 강직하기에 꼬리빵즈라는 말도 있습니다. 산동성 사람도 조선사람하고 성격이 비슷하여 산뚱빵즈라고 칭하는 등. 강하고 솔직한 성격을 빵즈라고 말합니다. 저는 솔직히 꼬리빵즈라는 말이 듣기 싫지는 않습니다.(모이자닷컴 ID :호김, 광동 동관 거주, 2004. 12.8)
② 할아버지(62세) 말씀이 싼뚱빵즈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욕하는 말이래요. 그래서 지금도 듣기 싫대요. 아빠(42세)도 많이 들었는데 화나도록 듣기 싫은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좋은 말이 아니래요.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가 더 듣기 싫어해요. 지금도 그 소리를 들으면 화를 낸대요. 누구나 모든 사람들이 싼뚱빵즈라는 소리는 욕이고 조소하는 말로 알고 있어 듣기 싫어해요. 그래서 산동사람들 앞에서는 그런말 잘 안해요.(은○○, 대학생, 산동성 연태시 거주)
③ 할아버지가 이십대 말이었을 때 동북에서 일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동북사람들이 산동사람들은 신체도 좋고 일도 잘해서 “싼뚱렌 헌 빵아(산동사람 신체 매우 튼튼하고 힘이 있다)”라고 했대요. 여기서 빵(膀)은 근육 같은 것이 불뚝불뚝 튀어나온 사람을 ‘빵’하다고 표현하거든요. 물론 신체가 좋고 일을 잘 한다는 것은 나쁜 말이 아니지만 그래도 싼뚱빵즈라고 하면 조소하고 조롱하는 의미가 들어있대요. 그래서 ‘싼뚱빵즈’ 하면 기분 나쁘게 들린다고 해요. 싼뚱빵즈라고 하면 할아버지가 20대 때에는 신체건강한 사람과 나쁜 의미 두 가지를 다 가리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기분 좋게 들리는 것은 아니래요. 기분이 몹시 나쁘대요. 할머니의 경우에는 싼뚱빵즈하면 무조건 듣기 싫은 말이래요. 60살 된 동네 어른들한테 물어봤더니 모두 다 안 좋은 말이라고 받아들였어요.(장○○, 대학생, 청도 거주)
일부,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①에서처럼 꼬리빵즈란 말을 산동사람과 조선족의 좋은 습성에 비춰 받아들여서 듣기에 싫지 않다고 밝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조선족이 꼬리빵즈를, 그리고 산동사람들은 싼뚱빵즈를 듣기 싫어했다. 오늘날 중국 내에서는 꼬리빵즈와 싼뚱빵즈라는 말을 듣는 것이 드물어지고 있다. 그것은 모두가 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 앞에서는 못하고 뒤에서만 하게되기 때문이다.
한편 앞서 설명된 산동사람과 일제강점기의 조선인의 삶의 여건이 서로 닮았다는 것 외에도 산동사람과 한국인의 비슷한 기후나 체질 등에서도 공통점이 보여진다. 산동지방이 조선족의 모국인 한국과 가깝고 기후나 체질 등의 조건이 비슷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사람들이 산동사람들을 좋아하고, 산동 지역에 한국의 많은 기업이 진출해 있는 것만 보아도 산동지역과 한국의 유대는 오래되었다. 꼬리빵즈와 싼뚱빵즈 중 어느 쪽이 먼저 생겨난 말인지는 몰라도 산동지역 사람들이 겪었던 설움과 함께 조선족의 설움의 역사가 꼬리빵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2) 멜대를 사용하는 조선인의 생활,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막대기)
꼬리빵즈를 고려막대기로 보면서도 그 유래를 조선족이 즐겨 사용하던 밴딴(扁擔, 멜대, 멜채)에서 찾는 경우이다. 밴딴이란 양쪽 끝에 물건을 달아 어깨에 메는 긴 나무로 만든 어깨걸이(멜대)를 말하는 것으로 평안도와 중국 조선족들은 변대 혹은 벤대라고 부른다. 이 밴딴을 이용해 거름을 져 나르기도 하고, 물을 길어 나르기도 하고, 똥오줌을 퍼 나르고, 연탄(석탄)을 나르는 등 온갖 노동에 활용했다.
또 조선인은 지게막대기 등 막대기를 즐겨 들고 다녔으니, 으레 조선족하면 나무 막대기를 어깨에 걸치거나 지게막대기를 손에 잡고 일하는 모습이 연상됐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조선족을 가리켜 꼬리빵즈(고려막대기)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비교적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 의식을 지니고 있다할 조선족 지식인(요녕조선족사범대학 교원)에게 꼬리빵즈의 의미를 물었을 때, 대체적으로 통역과 연결고리, 막대기 사용 생활풍습에 의한 종합적 의미의 꼬리빵즈(高麗棒子-고려막대기)라는 대답이 많았다. 이 응답에는 송○○강사(여, 32, 중국어학 전공), 정○○교수(남, 46, 중국어학 전공), 김○○교수(여, 38 조선어문학 전공), 박○○교수(정치학 전공), 강○○교수(심리학 전공)가 참여했다.
3) 고려패거리, 꼬리빵즈(高麗幇 : 고려패거리)
꼬리빵즈를 ‘고려패거리’로 보는 경우이다. 중국에서 ‘빵(幇)’이란 무리라는 말인데 주로 사람을 낮추어서 부르는 패거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꼬리빵즈는 고려무리, 혹은 고려패거리를 낮춰 부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못난 사람, 싫은 사람들의 무리를 낮잡아 부를 때 ‘빵’(幇)을 쓰고 있다.
한국이나 조선에서는 꼬리빵즈란 말이 없는데 유독 동북에서 그 말이 나온 것으로 보아 동북에 일본놈이 쳐들어왔을 때 생겨난 말이다. 1등 공민이라고 자칭하던 일본놈은 조선족을 2등 공민으로 대우해줬고, 그 때 조선인은 일본놈의 앞잡이로 나쁜 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중국사람들 눈에는 조선인이 자기들보다 높은 2등공민이지 그리고 또 앞잡이 노릇까지 하니까 미울 수밖에 없었다. 또 조선족은 부락으로 이뤄 살고 있었으니 ‘조선놈들’, ‘조선사람 무리들’이란 이름으로 꼬리빵즈라고 불렀다.
여기서 조선이 아니라 꼬리빵즈가 된 것은 중국인들이 조선족을 역사 속의 고구려와 연상시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는 발전하지 못했지만 싸움을 잘해 영토를 많이 확장시킨 고구려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그 때 중국은 지금처럼 통일된 큰 대국이 아니라 흉노족 등 작은 나라들로 구성됐는데, 고구려 병사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놀라곤 했다. 굳게 뭉쳐진 고구려는 무리지어 다녔고 힘도 강해서 인접해 있던 나라들이 제일 무서워했던 공포의 대상이었다. 여기서 고구려 무리 온다(꼬리빵 날이 라)는 말이 생겨났다.
중국은 22개 성인데, 유독 산동성만 싼뚱빵즈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족-한족-만주족 간의 관계 형성에 있다. 동북은 만주족이 건립한 나라로 만주족의 폐쇄성으로 기타민족을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개방물결을 타면서 조선족도 가만 가만 동북에 들어오게 되었고 한족들 가운데 살길을 찾아나선 거지와 못살던 산동사람들이 제일 먼저 동북에 들어오게 됐다. 그래서 점차 산동사람이 많아지면서 한족의 인구도 늘었는데 조선족들은 그걸 모르고 한족이면 다 산동무리로 알고 싼뚱빵즈라고 불렀던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꼬리빵즈가 조선족들이 막대기를 잘 사용하여 그렇게 부르는가 했었다. 하지만 역사공부를 하면서 빵즈는 막대기(棒子)가 아니고 패거리(幇)라는 걸 알게됐다. 그렇게 설명한 걸 어느 책에서 본 적도 있다.
심○○교수(여, 44, 역사학 전공, 연변 화룡시 출생, 현재 요녕성 조선족사범대학 교수)
‘산동 빵즈’란 말은 ‘꼬리 빵즈’와는 뜻이 다른 걸로 알고 있다. 산동사람들이 하나 같이 잘 뭉친다는 의미에서 왔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빵즈’는 ‘방망이’가 아니라 ‘무리’라는 뜻에 더 가까운 것 같다.(모이자닷컴 ID : 홍산도. 2004. 12. 11)
실제 꼬리빵즈라고 놀리던 한족 중에서는 꼬리빵즈를 ‘빵(幇)’의 의미를 떠올려 고려패거리로 생각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택동 아내 쟝칭(江靑), 왕훙원(王洪文), 장춘쵸우(張春橋), 요우원왼(姚文元) 등 네사람 악질 중앙간부를 중국 4인방(四人幇)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빵(幇)’을 패거리의 나쁜 의미보다는 무리라는 보통 의미로 쓰고 있다. 국가대표 3인방이니, 탤런트 3인방, 과학대표 3인방, 바둑 신예기사 4인 방 등 오히려 좋은 의미로 통용되는 실정이다. 중국에서도 ‘빵(幇)’의 고대 어원은 중성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나쁜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현재 발행되는 중국 사전에는 ‘낮잡아 말하는 뜻’이라고 나와 있을 정도이다. 한국에서 ‘빵(幇)’을 좋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옛날 중국 글자의 뜻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4) 용맹한 고구려병사의 몽둥이,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몽둥이)
꼬리빵즈를 고구려병사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경우이다. 빵즈(棒子)는 몽둥이(방망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고구려 시대에 중국 한족들에게 있어 용맹한 고구려 병사는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병사들의 용맹을 고구려의 몽둥이(방망이)로 본데서 ‘꼬리빵즈’가 유래했다는 것이다. 실제 많은 한족들 또한 “옛날 고구려는 대단했다”라면서 이 어원에 수긍을 한다.
① ‘꼬리빵즈’란 중학교 때 역사선생님이 가르치시기를, 고구려 때 중국과 변경을 사이 두고 충돌이 잦았는데 고구려병사들이 육모방망이(빵즈)를 들고 싸우는 것이 그렇게 용맹하고 날렵해서 중국병사들이 고려병사를 부르는 대명사랍데다. (모이자닷컴 ID별찌, 길림성 안도현, 남, 27세, 2004. 12.6)
② 꼬리빵즈란 말은 고구려 시대부터 내려온 말입니다. 고구려시대의 장수태왕 때부터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고구려 군사들은 용맹스럽기도 했지만 한족입장에서는 무자비했습니다. 반항하는 적들에게는 방망이로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꼬리빵즈라는 말은 한족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사실 한민족은 한족들처럼 넓은 땅에 살고 있지 않고 땅의 끝 쪽에 살다보니 전쟁이 나면 죽기살기로 싸운다고 합니다. 그런 정신이 오늘날 한국과 북한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한족들은 땅이 워낙 넓어서 그런지 전의를 상실하면 오합지졸이 되곤 한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아직도 ‘당나라군대’라는 말이 한국군대에서 쓰입니다. 그 뜻은 군기가 빠진 오합지졸 같다고 할 때 쓰입니다. 군대에서 고참이 졸병들 기합 줄 때 "여기가 당나라 군대인줄 알아?" 하면서 기합을 주곤 합니다.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한국에서는 조롱거리로 불립니다. (모이자닷컴 ID:고려청년, 산동성 연태시, 2004. 12.7)
③ 고려란 단어를 처음으로 들은 건 아주 어릴 적이었다. 아마 소학교 1·2 학년 정도? 하루는 한족남자애랑 놀다가 싸움이 일어났는데 나를 꼬리빵즈 라고 하는 거였다. 욕이라고 생각하고 정신 없이 싸웠지만 무슨 뜻인지 몰랐기에 집에 와서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는 껄껄 웃으시면서 그건 욕이 아니란다. 한족들이 옛날에 고구려 사람들한테 몽둥이에 죽도록 얻어 맞고 혼난 담부터 고려인들보고 꼬리빵즈 라고 한단다. 그래서 몽둥이에 죽도록 얻어터진 옛날 한족들이 고구려인 하면 먼저 생각난 게 무섭던 몽둥이여서 고려 몽둥이라고 불렀단다. 그 고려인이 바로 우리의 조상이란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어쩌면 욕인지도 모를 그 말에 자호감을 가졌다. 아무튼 우리는 대단했던 고구려의 자손이란 것만으로…(중략)… 그리고, 중학교 때 역사교과서에서 수양제가 고구려하고 전쟁하다 대패하는 과정을 배울 땐 고구려인의 후손이란 자긍심에 가슴이 뿌듯했다.(월드아리랑 ID:귀구(鬼廐) 2004. 9. 5)
④ 중국여행 시 기차 속에서 조선족을 만나 대화 할 일이 있었는데 옆에 듣고 있던 한족 청년 입에서 꼬리빵즈라는 욕설이 나왔던 것 같다. 그 때는 몰라서 넘어 갔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고구려 몽둥이’라는 뜻이란다. 수·당나라때 고구려 침략시 얼마나 고구려 백성들에게 몽둥이로 맞았으면 그런 표현이 생겨났을까 싶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아무튼 중국인들에게 한마디, 얻어맞을 짓은 하덜 마!(ID : 행복, 2004. 12. 4)
⑤ 꼬리빵즈란 유래를 가지고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고구려 몽둥이’라구 하였어요. 고구려 때 병사들이 몽둥이를 너무 잘 써서. 적병들이 질질 떨었다고 꼬리빵즈란 말이 나왔다 하던데요. 그리고 몇 년 전에 있은 일인데, 우리 연변오동팀이 상해팀과 상해에서 축구경기를 할 적에 상해관중석에서 ‘꼬리빵즈를 물리치자’는 글발이 적혀져 있는 것을 본적이 있어요. 기분이 나빴어요. 그럼 지네 상해사람들은 ‘쌍하이와쯔’인가? (모이자닷컴 ID : 럭키, 2004. 12.13)
많은 유래들이 모두 도리가 있는 말이라고는 느끼지만 중요한 것은 한족들이 우리를 꼬리빵즈라고 말할 때에는 대부분 상황에서는 우리를 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구려병사의 용맹성을 뜻하는 고려몽둥이로 이해를 하고자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속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자식이 저에게 꼬리빵즈란 무엇인가 하고 물어봐도 저는 그 뜻풀이로 알려 줄 생각입니다. 욕은 욕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대해 우리도 방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이자닷컴 ID : 김선철, 2004. 12.11)
많은 조선족들이 꼬리빵즈를 고구려몽둥이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설문에 참여한 많은 조선족이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꼬리빵즈는 고구려몽둥이에서 유래된 말로 배우며 자랐다고 증언했다.
고구려몽둥이로 받아들이는 데 대해서는 ‘스스로의 위안일 뿐’이라는 비판도 만만찮았다. 고구려의 기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나라 잃은 서러움과 타민족 속에 소수민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서러움을 고구려 조상의 정신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위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위 에서처럼 욕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기방어를 위한 방편으로 중국에 우위적 힘을 과시하던 고구려의 위상을 이어받고자 하는 의식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는 중국내 소수민족이 겪는 차별 - 공식적으로는 중국내 소수민족의 차별은 없다지만 현실 속에서는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 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고구려몽둥이 해석은 조선족들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어원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의식은 앞으로도 꼬리빵즈를 고구려의 몽둥이로 해석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고구려의 역사를 상기시키려는 조선족의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꼬리빵즈의 의미 변화는 한민족의 위상 변화라 하겠다. 중국인을 떨게 한 꼬리빵즈(고구려 몽둥이)가 고려의 후손 조선족을 비난하는 꼬리빵즈로 전락한 것은 민족의 전락을 역사 속에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맹한 고구려 병사의 기상을 지칭하던 꼬리빵즈(고구려 몽둥이)는 고구려의 몰락과 함께 위력을 잃고만 것이다. 결국 꼬리빵즈는 조국을 잃고 떠나온 조선인의 유이민이 급증하는 시기에 들면서 위력 있던 몽둥이에서 멸시와 조롱의 몽둥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조선족은 비록 중국내 소수민족으로 살아가지만 명석한 두뇌, 지대한 교육열,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가려는 노력, 전통의 계승과 보전 등을 통해 민족의 새로운 비전을 꿈꾸고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조선족의 위상이 중국내에서 제고되고 있는 만큼 한국인은 조선족의 경제성장을 도와나가야 한다. 그 길은 곧 꼬리빵즈의 옛 용맹과 기상을 되찾는 길이며, 중국내에서뿐 아니라 세계 속에서 한민족의 성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5) 빨래방망이를 사용하는 조선인의 생활,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방망이)
‘빵즈(棒子)’란 방망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만큼, 꼬리빵즈란 ‘고려방망이’에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 정착해 살아가던 조선인들은 조선(한국)에서 생활하던 그 풍습을 고스란히 지키며 생활했다. 한족들은 우물가에서 빨래할 때 빨래판을 쓰거나 비벼서 빠는데 비해 조선족 아낙네들은 빨래망치를 사용했다. 조선족의 생활은 중국인의 생활문화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족 여인의 빨래망치를 보면서 꼬리빵즈(고려 방망이)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제가 이전에 어른들한테서 듣건대 우리 민족 아낙네들이 빨래망치를 많이 쓰는데서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모이자닷컴 ID : 인준, 중국 장춘 거주 학생, 2004. 12.6)
빨래 방망이는 우리 조선족들만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변에서는 가끔 강가에서 빨래방망이로 빨래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해 저도 저의 언니가 부탁하기에 흥안시장에서 빨래방망이를 산 적이 있습니다. 한족들은 주로 빨래판으로 빨래를 합니다.(모이자닷컴 ID : 홍산도. 2004. 12. 11)
한족들은 빨래판을 쓰면서 비벼대서 빨래를 했지만, 조선족은 빨래할 때마다 망치질을 했어요. 한족들은 풀 먹이는 옷감이 없었지만, 우리는 옷에 풀을 먹여야 됐잖아요. 그래서 빨래가 마르고 나면 저녁상을 물린 후 밤이 늦도록 다듬이망치질을 하는 거예요. 밤낮없이 망치질을 했으니 중국인들이 보기에도 별달라 보였겠죠. 그래서 빨래망치 때문에 꼬리빵즈란 말이 생겨난 거예요.(박영애, 여, 51, 길림성 도문시, 전 은행근무) 박경애: 한족 소학교, 조선족 중학교, 한족고등학교 졸업. 조선족 학교 출신은 한어를 유창하게 못한다는 이유에서 부모가 중국어를 잘하도록 하기 위해 한족 학교를 보냈다.
꼬리빵즈를 조선족 여인들이 쓰던 빨래방망이에서 비롯됐다는 견해도 많았다. 조선족 여인들은 빨래할 때 너도나도 할 것없이 빨래방망이를 썼으니,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특이하게 보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빨래방망이를 사용하는 조선여인의 빨래 풍습에서 꼬리빵즈(고려방망이)가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여인들이 사용하는 빨래방망이는 주로 소백산 소철나무로 만들어졌다. 빨래방망이가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지 않도록 물에 가라앉는 재질이 필요한데, 소철나무는 물보다 비중이 높아서 인기가 있었다.
한편 꼬리빵즈의 유래는 조선족 여인들의 빨래방망이 사용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에 까지 닿아있다.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중국, 당시 수(隋)나라와 전쟁을 벌이던 마지막 싸움터에서는 여자들이 빨래방망이까지 가지고 나와 힘을 보태 수나라 군사들과 싸웠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구려여인들의 빨래방망이란 뜻에서 꼬리빵즈란 어원이 나왔다고 보기도 한다. 여인들이 빨래방망이를 들고 싸운다는 말을 통해서는 용맹성과 야만이란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꼬리빵즈의 유래가 되기도 한 빨래방망이는 한국에서 혹은 한국을 떠나 살아가는 조선족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인들의 전통적인 생활문화였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빨래방망이를 즐겨 사용하는 모습을 시골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세탁기의 대중화로 빨래방망이 사용 모습이 사라졌는데, 중국에서도 세탁기가 보급되면서 조선족의 빨래방망이 사용이 사라졌다. 지금은 중국 시골지역에서나 빨래방망이질을 하는 조선족 여인들을 가끔 볼 수 있을 뿐이다.
6) 조선사절단의 몽둥이,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몽둥이)
꼬리빵즈를 중국에 간 조선사절단이 휘두른 몽둥이라는 데서 비롯됐다고 보기도 한다.
옛날 조선인들이 종주국 중국에 공물(貢物)을 바치러 갈 때 도중에서 마적들에게 빼앗기는 예가 잦았다. 그래서 중국 조정에서 조선사절단에게 몽둥이로 접근하는 중국인을 족치는 특권을 주었다. 사절단이 이를 악용해 중국 양민까지 족쳤기 때문에 조선인을 ‘高麗棒子'라고 불렀다.(조선족, 「高麗棒子」, 베이징저널, 2002.9.06?)
조선사절단에게 접근하는 중국인을 방망이로 때리게 했기 때문에 꼬리빵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것이다. 이 설은 소수의 주장이며, 이 말에 수긍하는 이들은 적지만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7) 중국 땅의 방망이 같은 한반도의 지형,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방망이)
조선족의 생활상인 방망이와 함께 한반도의 지형적인 측면에서 방망이로 보는 견해이다. 이 의견 역시 소수이기는 해도 중국이 지니고 있는 땅 욕심에 연결시키고 있어 주목해볼만 하다. 특히 대륙기질을 지닌 중국인들은 중국 대륙의 한 귀퉁이에 붙어있는 듯한 한반도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손에 잡을 수 있는 방망이나 꼬리 정도로 치부했다. 조선의 역사를 중국 역사 속의 속국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그러한 모습을 반증한다.
역사적으로 한국을 중국의 속국 쯤으로 보아온 중국인의 의식이 한반도의 지형을 중국이 쥐는 방망이 뜻에서 꼬리빵즈(고려방망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땅 욕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 중국이란 나라 이름이 지향하는 중화세계 속에는 땅의 욕심이 여전히 남아있다.
김월의는 「고구려의 미래를 지키려면 오늘과 역사를 함께」란 칼럼에서 중화세계란 “중국인들이 곧잘 술김 반 진담 반으로 말하는, 중원(中原)을 중심으로 한 현재 영토 플러스 전통적 고유영토(조선, 오키나와, 대만, 외몽고, 북인도,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일본, 버어마, 태국, 월남)까지를 포함한 중국식 지리적 공간개념”이라면서 이 중화세계가 “오늘의 <동북공정>을 위한 기반을 닦아준 셈” 김월의, 「고구려의 미래를 지키려면 오늘과 역사를 함께」(문화재방송국, 2004. 8.18) 사이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8) 속어 똥자루, 꼬리빵즈(高麗棒子 : 고려 똥자루)
꼬리빵즈의 방망이를 속어로 직접 사용하는 경우이다. ‘빵즈’(방망이)의 의미를 확장하여 머리 없는 방망이이란 뜻에서 ‘머리 없는 자루’를 연상시켜, 고려자루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더 나쁜 의미의 ‘고려똥자루’라는 속된 표현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꼬리빵즈’를 욕으로 쓰면서 빵즈(棒子)가 지닌 원래 의미 중에서 가장 나쁜 의미를 찾아 연결시키는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9) 튀김과자 마화, 꼬리빵즈
꼬리빵즈를 ‘밸밸꼬인 튀김 음식인 마화’로 보는 경우이다. 중국의 서북부 러시아 근처에 위치한 신강 위글족 자치구에서는 튀김음식인 마화(mahua)를 꼬리빵즈라고 불렀다. 길이 20cm 크기에 밸밸 꼬인 모양으로 기름에 튀겨져 나오는 마화는 과자처럼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맛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한족들이 즐겨먹는 마화를 두고 상하이 사람들은 꼬리빵즈라고 부른다. 신강 위글족 자치구에서는 1968년 경 상하이에서 내려온 많은 하향지식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이 마화를 사면서 꼬리빵즈라고 부르던 것을 흔하게 들을 수 있었다. 독립투사로 유명한 양세봉 장군의 조카인 양이복씨가 마화 꼬리빵즈 때문에 겪은 에피소드가 있다.
1963년부터 1970년까지 7년 동안 신강 위글족자치구 우룸무치에서 생활할 때였어요. 그 때 상해에서 온 하향지식청년들이 마화를 사면서 꼬리빵즈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내가 뒤돌아보면서 “나를 지금 욕하는가?” 하고 다그쳐 물었어요. 그런데 그 하향지식청년들은 그냥 자기네는 마화보고 말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동북에서는 꼬리빵즈란 조선사람 욕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던 일이 있어요.
1982년 상해에 갔을 때 우룸무치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상해사람들한테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어요. “너네 마화 보고 꼬리빵즈라고 하네?”하고 물었더니 그들이 그렇다고 대답합디다. - 양이복(54, 전 료녕성 심양시 신민현 호태향 사방전 소학교 령도로 재직)
마화 즉 꼬리빵즈의 꼬여있는 모습과 조선족의 삶이 닮은 모습에서 마화를 조선족의 삶에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경우의 꼬리빵즈란 중국과 일본의 강대국 틈바구니에 살아가면서 중일전쟁처럼 열강의 패권 다툼 때마다 튀겨져 밸밸 꼬인 꽈배기 신세가 되는 조선족의 삶을 빗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양이복씨는 조선족이 밸밸 꼬인 물건들을 잘 만들고 잘 써서 붙여진 별명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조선족들은 새끼 꼬기를 잘 했으며, 또 배배꼬인 똬배기를 머리에 얹어 물건을 날랐다. 실제 생활에서 짚신 꼬기, 짚으로 배배꽈서 닭둥지 만들기 등 꼬아서 만든 생활용품들이 많았다. 그렇게 조선족들이 즐겨 사용하는 생활 소품들이 마치 밸밸 꼬인 마화를 닮았다는 데서 꼬리빵즈(마화)로 불려졌다는 것이다.
지금도 상해에서는 마화를 보고 꼬리빵즈라고 부르고 있다. 상해에서는 마화만이 아니라 마화처럼 꼬인 물건을 모두 ‘꼬리빵’ 혹은 ‘꼬리빵즈’라고 부르는 것이다.
10) 타지방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 꼬리빵즈(高麗膀子 : 고려촌뜨기)
대도시에서는 시골뜨기 정도의 의미로 ‘빵즈’라고 부른다. 그리고 막노동하는 사람들도 빵즈라 부르는데 여기서의 ‘빵즈(膀子)’는 촌뜨기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다. 북경의 골목에는 웃퉁을 활짝 벗어제친 배불뚝이 장노년층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을 가리켜 빵즈(膀子)라고 불렀다. 특히 동북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北京) 방언에 타지방에서 온 사람이나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얕잡아 ‘棒子'라 부르는 말이 있다. 이를테면 둥베이에서 온 사람을 '관둥(關東)빵즈', 손재간으로 벌어먹는 사람을 ‘서우이(手藝)빵즈', 체육인을 ‘티위(體育)빵즈’라고 한다. ‘티위빵즈'는 지금도 상용어로 쓰이고 있다. 우리말 중 시골사람을 ‘촌뜨기'라 하는 것과 비슷한 욕이다. ‘×장이' ‘×꾼'보다 폄의(貶意)가 좀 더 강한 칭호이다.
타지방뿐 아니라 타국의 타민족으로, 그것도 쪽박 차고 거의 동냥하다시피 들어온 우리민족을 이렇게 얕잡아 불렀을 것은 뻔하다. 이 말은 약 1백년 전에는 많이 쓰였지만 지금은 점점 없어져 가는 상황이다. (조선족, 「高麗棒子」, 베이징저널, 2002)
위의 글에서는 빵즈에 시골뜨기 정도의 의미뿐아니라 우리말로 천한일을 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접미사 ‘장이’에 해당하는 의미까지 지니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럴 경우 이 ‘빵즈(膀子)’는 천한 무리 전체에게 해당하면서 한국 즉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조선족을 ‘꼬리빵즈( 高麗膀子)라고 불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꼬리빵즈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열 가지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대체로 꼬리빵즈는 ‘幇’의 패거리, ‘棒’의 막대기, ‘棒’의 몽둥이 혹은 빨래망치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있음이 확인됐다. 여기서 패거리를 나타내는 빵(幇)은 ‘꼬리빵’으로만 발음되기 때문에 ‘꼬리빵즈’와는 다른 말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꼬리빵즈가 막대기, 몽둥이, 빨래망치, 무리의 뜻 중 어느 것에서 유래된 것인지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언어적인 측면에서 비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이 말이 중국인이 조선족을 상대로 사용하면서 경멸하고 조롱할 때 쓰는 욕으로 쓰여지고 있으며 그 어원을 살펴볼 때 한국의 역사와 생활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을 칭하는 일본어 ‘조센징’이 조선인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욕이 된 것처럼, 나라를 잃고 중국이라는 남의 나라에서 삶을 살아가던 조선인이 겪던 비애라 하겠다. 용맹한 고구려의 몽둥이의 의미를 지닌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중국으로 이주해 갈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나라의 민족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의 틈바귀에 살면서 생겨난 서러운 이름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꼬리빵즈라고 부른다 하여서 화낼 것이 아니라 느긋하게 받아들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몽둥이에는 용감한 고구려병사의 국토방위의 몽둥이, 조선족 여인의 빨래방망이, 다듬이 방망이 등의 조선인(한국인)의 생활 특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화에서 비롯됐다 하더라도 짚을 꼬아 생활하던 우리 민족의 정겨운 삶이 묻어나는 것이다.
3. 한민족의 또 하나의 서러운 이름, 꼬리빵즈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부터 조선족은 중국인(한족)으로부터 꼬리빵즈라는 말을 들으면서 살아왔다. 그 말은 힘없고 나라 없는 민족, 거대 한족의 틈바구니에 끼여 살아가는 소수민족 조선족을 무시하는 말이었다. ‘꼬리빵즈’의 어원이 갖는 역사적 생활문화적 의미보다는 자신의 삶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중국인으로부터 삶을 무시당하고 있다는 서러움과 모멸감부터 느꼈던 것이다.
옛날 소학교 때는 꼬리빵즈 소리가 정말 듣기 싫었어요. 시내로 영화 보러 가기 위해 친구들이랑 차를 타고 갈 때면, 차안에서 말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어요. 우리가 말을 하면 혹시 누군가 조선족인 줄 알고 꼬리빵즈라고 욕할까봐 그게 두려웠던 거죠.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휴!’하고 안도의 숨을 쉬곤 했어요.
또 한족부락을 지날 때는 막 뛰어갔어요. 우리가 꼬리빵즈라는 걸 알면 돌맹이도 던지면서 꼬리빵즈하면서 쫓아왔어요. 그러면 우린 막 뛰고 그랬어요.(김○○, 38, 여, 조선족사범대학 교수)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꼬리빵즈’란 욕을 들어봤을 것이다. 물론 현재는 여러 소수민족가운데서 단연 앞자리에 있는 조선족 앞에서 맞대놓고 그런 욕은 하지 못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대립국의 나라이다 보니 그런 욕은 수두룩히 먹었을 것이고 일제치하에서는 나라를 잃고 남의 땅에 빌붙어 사는 신세라 그런 욕은 밥먹듯 먹고 다녔다는 말을 할아버지로부터 들어서 익히 알고 있다. 3세인 나도 어린 시절 늘 한족애들과 조선족애들이 패로 나뉘여 ‘싼뚱빵즈’(한족을 욕하는 말), ‘꼬리빵즈’(조선족을 욕하는 말)해가며 싸우던 기억이 아련히 남아있다. (김월의, 「고구려의 미래를 지키려면 오늘과 역사를 함께」, 문화재방송국(http://www.icpn.co.kr), 2004. 8.18)
꼬리빵즈로 불리는 조선족 대다수는 동북 3성으로 불리는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랴오닝성(遼寧省)에 살고 있는데, 특히 연길, 룡정, 화룡 등 연변조선족 자치주에 80여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조선족의 중국 내 정착은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강점기에는 흉년과 기근, 그리고 대륙침략 발판 마련을 위한 일제의 이주정책 등으로 인해 대규모 이동이 이뤄졌으니, 꼬리빵즈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지닌 서러움의 역사라 하겠다.
이주 초기부터 한족들은 조선족들을 가리켜 ‘꼬리빵즈'라고 부르며 경멸하고 적대시했다. 당시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일본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중국인들은 일제 식민지에서 온 조선인들을 모두 일본의 앞잡이로 볼 정도였다.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사재를 털어 중국행을 감행한 조선후기 명문가인 이회영 일가 또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망명을 했으면서도 중국인들로부터 오해를 받아 정착과정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것이 그 때문이다.
아까부터 제일 큰소리로 떠들던 한 아줌마가 “핫하하. 초우쌘주마? 꼬리빵즈!(조선족이야? 꼬리빵즈네)”라는 한마디가 쌩 들려온다. 아마 내 얼굴이 금시 파래났을거다. 그런데 하도 조선족마당 수 년 생활에서 성질 다 죽여오다 보니 아무것도 그 아줌마를 향해 날리진 못했다. 또 분위기로 봐서는 입이 다사한 아줌마의 제딴에는 농담이라고 한다는 분위기였으니… 그리고 꼬리빵즈란 말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보였다.
참 오랜만에 그것도 이 미국 뉴욕 땅에서 들어보는 꼬리빵즈란 칭호다. 아주 어릴적, 우리 마을에는 조선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이 다 살았는데 신짝 벗어뿌리면서 늘 한족애들과 꼬리빵즈, 싼둥빵즈 쌈을 했었다. 조선애들이 한족애들을 먼저 싼둥빵즈라 욕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갸들이 늘 우리를 꼬리빵즈라 지껄여오는 것이다. 우리의 반격은 “싼둥빵즈, 마이타이(더럽다)” 이거였고.
전에 아주 인상깊게 읽은 러브유님의 글 한편에 산재지구에서의 꼬리빵즈 싼둥빵즈들의 혈전들이 잘 묘사되었는데 우리도 중학교 때까지 혈전이 자주 있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시교에 있다보니 부근에 중국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한족애들이 늘 교문 앞에서 우리학교 남자애들을 집적거리고 돈을 뺏기도 하고. 그래서 그들을 족치러 나선 게 자랑스런 우리 반 건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외에도 정의감 또한 어찌도 강하고 후에 알고보니 쌈도 어찌 잘하는지, 물론 학교로서도 한족애들의 학교 교란이 골치 아픈 탓도 있었고 또 우리 반 남자애들이 공부안하고 쌈만 하는 애들이 아닌지라 눈을 많이 감아준 덕에 전투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런 중학생들의 싸움에서도 행주의 전설은 이어져서 그 싸움판에 빠질 수 없는 우리 여군들의 역할은 행주치마에 돌멩이들이랑 날라 사기를 돋구어드리는 것이었으니…. 그렇게 한달을 실랭이질하더니 결국 그 애들을 물리치고 말았던 우리 반 남자애들 또 우리반 여자애들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감미롭다. 그리고는 고중에 가서부터는 학교와 집이 다 조선족 집거동네이다 보니 한족애들과 접근할 기회가 거의 없었고 대학에서는 의연히 조선남자들과 조선여자들이 강하다보니 꼬리빵즈란 말은 그때부터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모임이 끝나서 폴님과 투덜거렸다, 나 아까 참은게 바보였지? 무언가 하다못해 손에 들었던 고기덩이라도 날려뻐려야 했는데. 폴님은 그런데 반대의 생각이다. 남자의 여유로움인가.
“그런 거 가지고 머 신경써? 꼬리빵즈란 말을 듣는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 이미 거의 동화된 몽고족에 대해선 그 사람들이 아무 신경도 안 쓰잖아?”
듣구보니 그것도 그랬다. 그래서 아주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주 정중하게 결심발표를 한마디했다. ‘그래 나는 꼬리빵즈다! 나는 꼬리빵즈가 좋다! 왜?’
(조선족마당 ID:춘,「그래 나는 꼬리빵즈다」http://bud21.com)
꼬리빵즈 그러는 거 떼놈들 조선사람한테 열등감 있어서 그래요. 옛날에 연개소문 있잖습니까. 그 때 혼줄 나서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한족 애들한테 삥뜯긴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저희 그 때는 떼놈 학생들 저희 학교 주변에 얼씬도 못했습니다. 떼놈들하고 싸움나면 거의 삽이고, 몽둥이 들고 전교 출동할 정도였으니까요. 선생님들이 막아도 쓸데 없었죠.
한족 애들 왈 “조선애들은 너무 무식해~"
하긴 좀 무식하긴 했죠. 그 당시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다보면, 심심찮게 한족학생 부모가 맞아터진 애를 데리고, 학교에 강리(講理)하러 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죠.(조선족 마당, ID: 요동, http://bud21.com)
꼬리빵즈로 살아가는 서러움과 그 고난의 여정을 담은 노래도 만들어져 불려지고 있다. 2002년 7월에 결성된 중국조선족 무명가수(2mc)의 노래가 조선족 사이트를 타고 울려퍼진 것이다. 다음은 가사의 일부이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우리 아버지 손목잡고/두만강 건너실때 겨울이였어/손이 시리고 발이 시렸어/쌩 쌩 차거운 칼 바람 속에 강가의 /어둠속에 얼어붙은 나루배/하얀눈위로 가지런히 찍혀지는/크고 작은 발자국/무서운 어둠을 가로질렀어/한숨짓고 뒤돌아 보며 눈물을/흘리셨어 그리고 힘내여 걸으셨어/하지만 남겨둔게 너무 많으셨어/그리고 꼬리빵즈 되셨어/만주땅에 꼬리빵즈 되셨어/세월이 흘러갔어 왔어 내가 왔어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교포? 동포? 나는 차이나 메이데인 차이나<MADE IN CHINA>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꼬리빵즈라고 부르는 한족들 중에는 ‘꼬리빵즈’를 욕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이번 조사 대상에서 일부 젊은층 한족들(20~40대)은 조선인에 대한 별칭으로 부르는 것이지 그리 큰 욕은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꼬리빵즈는 조선족에 대한 심한 욕으로 쓰는 것은 아니예요. 꼬리빵즈는 조선족에 대한 별명이지 큰 욕은 아니어서 무심히 쓰기도 해요. 조선족이 싫어하는 것은 알지만 큰 욕이라기보다는 그냥 부르는 별명같은 거예요. 그런데도 조선족들은 무척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요. 그걸 보면서 더 놀리는 말로 쓰기도 했어요. 우리는 그저 시내사람들이 시골사람들보고 “촌뜨기다", "촌사람이다", "시골사람이다" 하는 말과 같은 뜻으로 ‘꼬리빵즈’를 쓰고 있어요. 아마 시골사람들에게 ‘촌사람이다’고 하면 깔보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 나빠지는 것 같아요. 조선족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요즘에는 꼬리빵즈라고 잘 안 불러요. 서른살 넘는 사람들이 많이 불렀대요.”(22, 한족, 왕월 王越, 길림성 도문시, 한국유학생, 2004. 12.6)
하지만 모든 조선족은 한족들로부터 꼬리빵즈를 들을 때마다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민족 세대로서, 또 소수민족으로 겪어야 했던 그 수모는 조선족들을 더욱 위축시켰다. 대항할 수 없는 무력감은 치욕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떨기까지 했다. 꼬리빵즈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참지 않고 대응해서 그에 상응하는 욕을 같이 하기도 했다. 또 때로는 폭력적인 싸움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꼬리빵즈가 조선족에게 얼마나 듣기 싫은 욕인지 보여주는 일화들은 많다.
꼬리빵즈라는 말을 들으면 무척 기분이 나빴어요. 꼬리렌 하면 괜찮은데, 꼬리빵즈라고 하면 그건 한족들이 우리를 멸시해서 욕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만 참지를 못했어요. 그렇게 부르면 쫓아가서 패줬어요. 내가 동북사범대학에 다닐 때 한족들이 꼬리빵즈라고 할 때마다 대판 싸웠죠.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다른 조선족한테는 그렇게 말해도 나한테는 절대 그렇게 말하지 못했지요. 지금도 누가 날더러 꼬리빵즈라 하면 싸워요. 그 어원이 나쁜 뜻이 아니라 해도 그 말은 한족들이 우리를 멸시하면서 우리 민족을 욕하기 위해 쓰는 말이기 때문이죠.(42, 조○○씨, 심양시)
이번 월드컵 때 한국이 승승장구로 이기자 일부 중국인들이 불만 정서를 토로했으며 극히 일부긴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한국인을 ‘꼬리빵즈(高麗棒子)'라고 매도했다. '高麗棒子'는 도대체 무슨 욕인가?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필자는 어릴 때 ’꼬리빵즈'라는 욕을 많이 먹으며 자랐다.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둥베이(東北) 3성의 조선족자치마을의 어린이들과 한족어린이들은 잘 어울리지 못했다.
조선족어린이는 조선족어린이대로, 한족 어린이는 한족어린이끼리 무리를 지어 놀았다. 이들 두 무리가 부딪치면 상대방에서 우리를 ‘꼬리빵즈!'라고 욕하기 일쑤였다. 그러면 우리도 ‘싼뚱빵즈' 또는 ‘칭궈(淸國)빵즈'라고 맞받아 욕을 하곤 했다. 둥베이3성 한족의 대부분이 산둥 사람이고 또 우리 조상의 나라가 ‘꼬리'인데 반해 그들 조상의 나라는 ‘칭궈'이기 때문에 그렇게 욕했던 것이다. 그러나 ‘몽둥이'의 뜻인 ‘빵즈'가 무슨 욕인지 처음에는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상대방이 이렇게 욕하니 우리도 그 욕을 써먹었을 따름이다.(조선족, 「高麗棒子」, 베이징저널, 2002)
1960년대에 아버지는 인민공사(오늘의 진 정부)의 한 간부일원으로서 당지부의 파견을 받고 농촌마을에 조사를 다녀왔다. 한 주일의 농촌실태조사를 마치고 인민공사로 돌아 온 아버지는 집에도 들리지 않고 노고도 풀 사이도 없이 곧장 당위서기의 사무실로 향했다.
아버지는 당위서기의 책상을 마주 하고 앉아 지난 한 주일동안 농촌실태조사내용을 또박또박 적은 수첩을 들여다보며 조사내용을 당위서기에게 회보하기 시작하였다. 1940년대 초에 중국으로 이주한 아버지는 20여년 중국에서 생활하였지만 중국어는 아주 유창한 편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업회보를 듣던 당위서기는 불쑥 이런 말을 내던졌다.
"꼬리빵즈"
"뭐~~야!"
다음은…철썩! 철썩!!
당위서기는 놀란 토끼마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입만 하- 벌리고 아버지만 쳐다보았다.
"쭤샤"(앉으세요.)
아버지의 위엄 있는 말에 당위서기는 벌겋게 달아오른 두 볼을 슬슬 어루만지며 그 자리에 눌러 앉았다. 아버지는 계속 수첩을 꺼내들고 사업보고를 하기 시작하였다. 당위서기는 용케도 아버지의 사업보고를 끝마칠 때가지 들어주었다. 당위서기의 사무실에서 나올 때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한마디 남겼다.
"사업시간에 꼬리빵즈가 뭡니까. 다른 장난의 말이나 나 자신 한사람을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선민족을 모욕하는 그런 말은 저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손을 대여 미안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발생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당위서기는 "예, 예"하며 복도까지 바래다주었다.
그 후 당위서기는 아버지를 각별히 존중했고 그 일이 어떻게 밖으로 새여 나갔는지 다른 한족간부들도 아버지 있는 장소에서는 절대 꼬리빵즈 라는 말을 감히 꺼내지 못했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소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 중기였다. 어느 날, 학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조선마을과 한족마을이 인접해있는 곳에서 왁짝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에 동학들과 함께 달려가 보니 곡괭이를 들고 있는 아버지에게 한족부부가 손이야 발이야 하고 빌고 있었다. 그 한족부부의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뒤에서 꼬리빵즈라고 욕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한족아이의 뒤를 쫓아 집에까지 찾아가 아이를 어떻게 교육했는가 하며 아이를 제대로 교육하지 않으면 곡괭이로 밥 해먹는 큰솥을 부숴 치우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후 나는 거리에서 한족들에게 꼬리빵즈 라는 말을 별로 들어 못 보았다. (모이자닷컴 ID : 고개길,「나는 정말 아버지의 손색없는 훌륭한 아들이고 싶다!」, 2004. 2.17)
조선족은 꼬리빵즈라는 말을 들으면 얼굴에 격분한 기색까지 띄우면서 대든다. 한족들이 꼬리빵즈라고 놀려댈 때마다 “니 쌔쓰개 아이야”(너 미친놈 아니야?) 라거나 ‘쭝꿔쭈(中國猪, 중국돼지)' 혹은 ‘칭궈빵즈(淸國棒子, 청나라빵즈)’라고 응수하곤 했는데, 지역마다 맞받아치는 말이 달랐다.
조선족이 자치주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연변에서는 꼬리빵즈라고 한족이 놀리면 “니 쌔쓰개 아이야”(너 미친놈 아니야?) 혹은 ‘쭝꿔쭈(中國猪,중국돼지)'하고 응수하곤 했다. 쌔쓰개는 연변에서 쓰이는 방언으로, 연변 아닌 다른 지역에서는 조선족들조차 못 알아듣는 속어이다. 연변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요녕성 출신의 한 조선족은 “연변사람들은 쩍하면 뭐 ‘쌔쓰개 같다’ 거나 ‘안까이(아내를 뜻함) 새끼’ 같은 말을 많이 하는데, 우리 외성사람들이 제일 듣기 거북해하고 싫어하는 말이 쌔쓰개 같다는 말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한족에게는 ‘쭝꿔쭈(中國猪,중국돼지)'라고 응수했는데, 중국에서는 돼지란 말이 매우 모욕적인 큰 욕에 해당된다. 한족들을 돼지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한족들이 위생을 잘 지키지 않아 더럽다는 의미로 쓰이면서부터이다. 그래서 조선족은 한족들에게서 “뙤놈냄새가 난다”고도 한다. 연변에서는 꼬리빵즈에 대한 응수로 ‘싼뚱빵즈’도 쓰고 있다. 안수길의 소설 『북간도』에 보면 청인의 ‘꼬리빵즈!’에 대한 응수로 ‘똥되놈 새끼!’하고 응수한 것이 보인다.
요녕성의 심양시나 무순시, 북경, 상해 등의 지역에서는 한족들로부터 꼬리빵즈라는 말을 들으면 ‘칭궈빵즈(淸國棒子)’라며 맞받는다. 중국은 예전에 청나라(淸國)였기 때문에 ‘칭궈빵즈’라면서 똑같은 욕으로 한족들에게 응수하는 것이다.
비록 조선족이 소수이긴 했어도 농사법을 잘 알고 있는 데다 부지런해서 한족보다 경제적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조선족보다 못살아 꾀죄죄한 살림살이를 보이는 한족을 향해 칭궈빵즈라고 되받아 치곤 했던 것이다. 칭궈빵즈에는 가난한 나라사람이라는 동음이의어 활용도 담겨있다. 조선족 보다 못사는 한족들의 나라, 즉 츙궈(窮國, 가난한 나라)의 발음과 칭궈(淸國)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꼬리빵즈에 대한 조롱을 한족들 못 산다는 의미의 칭궈빵즈로 되받아 치며 놀렸던 것이다.
4. 변화하는 꼬리빵즈의 위상
최근 들어 꼬리빵즈에 대한 시각은 바뀌고 있다. 그것은 한반도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나라, 못사는 나라, 중국의 속국, 반으로 쪼개진 나라, 일본과 중국에 끼여 꼼짝도 못하는 나라에서 당당하게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조선족 중에서 “처음엔 한족들이 우리보고 꼬리빵즈라면 굉장히 싫었지만 이제는 욕으로 안 들려요”라고 조선족의 위치에 당당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아직은 일부에 불과할 뿐 대다수 조선족이 느끼는 어감은 역시 꼬리빵즈는 조선족에 대한 경멸이다. 중국에 많은 한국인들이 진출하면서 한족들은 한국과 한국인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중국 내 거주하는 한국인을 두고 ‘한선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한국인 또한 ‘꼬리빵즈’라고 부르기도 한다. 꼬리빵즈가 조선족과 한국인을 폭넓게 가리키는 이름으로 변화하면서 속어로 불리던 꼬리빵즈 의미마저 중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우리가 꼬리빵즈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족만을 말하는 게 아니예요. 한국인, 조선인(북한), 그리고 미국이나 일본에 사는 한국인 등 전세계의 모든 조선인을 꼬리빵즈라고 부르는 거죠.(22. 한족. 왕월 王越, 길림성 도문시, 한국유학생, 2004. 12.6)
조선족은 소수민족이라 하더라도 한족에 버금가는 문화수준을 지닌 문화민족으로, 높은 대학 진학률이 보여주듯 자녀 교육열이 높아 희망이 있는 민족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조선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문화를 지켜갈 줄 아는 민족적 자부심이 매우 강한 민족이 꼬리빵즈라 하겠다. 이제 조선족의 뿌리인 모국 한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중국 내에서 꼬리빵즈의 위치가 새롭게 변화되고 있다. 그런 변화는 박옥남의 수필 「조선족과 한국 그리고 한글」에서도 감지된다.
전에는 ‘꼬리빵즈’라고 골려 주던 것들이 요즘엔 한국 사람은 물론 우리 조선족들에게까지 선호의 눈길을 보낸다.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지 못했던들 중국인들이 우리에게 그런 선망의 눈길을 보낼 리 없으며 중국이 개방 정책을 실시하고 한국 제품이 여기까지 들어오지 않았던들 여기 중국인들은 한국이란 나라가 어느 구석에 위치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며 나아가서 자기 집 아이들을 꼬리빵즈 학교에까지 보내는 기문은 만들지 않을 것이다. (박옥남, 흑룡강성 통하현 조선족 중학 교원)
한족사람들은요, 옛날에는 우리가 못산다고, 소수민족이라고 꼬리빵즈라고 욕을 잘했어요. 내가 김치장사에 처음 나섰을 떄가 80년대 초기였는데 그때만 해도 김치는 맛있다고 잘들 사먹으면서도 한족사람들은 깔보려고 했는데 한국이 있고부터는 오히려 날 부러워해요. 조선김치도 이젠 한궈(한국)김치라고 그네들 자신들이 부르거든요. 한국 경상도가 내 고향인데 고향을 떠나 이렇게 대국땅에서 살면서 고국이 잘 사니까 우리도 의지가 되네요.(김치장사 조선족 할머니, 재인용, 찐원쉐(김문학), 『코리언드림』, 우석출판사, 2000.)
어릴 때 꼬리빵즈라는 놀림을 받을까봐 대중 장소에서 조선말을 쓰지 못하고 숨죽여 살던 조선족이 “이제는 우리말로 말을 해도 무섭지가 않아요”라며 당당하게 조선말을 사용하고 있다. 어떤 조선족은 “한국 경제가 발달하면서 한국을 부러워하는 한족이 많기 때문에, 한족 앞에서 조선말을 쓰면 오히려 어깨가 으쓱거려 진다”고까지 말한다. 그 달라진 모습을 한 조선족은 이렇게 말한다.
한족들이 이제는 우리 앞에서는 꼬리빵즈라고 부르지 못해요. 저희 한족들끼리만 모였을때 부르는 말이 됐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주로 ‘꼬리빵즈 대단하다’, ‘꼬리빵즈 머리 좋다’, ‘꼬리빵즈 매운 것 잘 먹는다’, ‘꼬리빵즈 춤 잘 한다’하고 말하죠. 예전의 꼬리빵즈 하고 부를 때의 경멸과 멸시의 의미는 사라지고 조선족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으로 자리하고 있어요. 물론 한족들이 말하는 ‘꼬리빵즈 여자 좋아한다’ 라든가 ‘꼬리빵즈 술 잘 마신다’ 등의 부정적인 민족성은 우리보다 더 부지런한 한족들로부터 본받아나가야 돼요.(47,여, 임○○씨)
앞서 살펴본 대로 지금의 조선족에게 있어 꼬리빵즈란 이름은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물론 한족들로부터 듣는 꼬리빵즈가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예전에 느끼던 모욕만큼은 느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족의 삶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을 뜻하며, 중국 내에서 꼬리빵즈의 위치가 조금씩 부상하고 있음을 뜻한다.
5. 한국 매체 속의 꼬리빵즈와 그 오류
조선족이 한족들로부터 꼬리빵즈를 들으면서 전쟁을 치르다시피 하면서 살아왔지만 한국내에서의 그 단어는 생소했다. 하지만 한중수교가 이뤄지고 조선족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국내에서의 꼬리빵즈 단어 사용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다음은 꼬리빵즈를 쓰고 있는 한국 내의 문학작품, 일반 도서, 신문, 인터넷 등의 글들이다.
① 근래 필자는 베이징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서 할아버지가 충청도 출신인 길림성에서 온 한 청년을 만났다. 그의 입에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릴 적에 중국 아이들은 자신을 보고 "거우리 팡스"라고 욕질을 했다고 한다. 곧 "고구려 새끼"라는 얕보는 뜻을 담았다. (이이화, 「한국사 바로보기 -고구려·백제·신라는 한 민족인가 」, 경향신문, 2004.10.28)
②조선이 일제에 병합을 당한 뒤 많은 인사들이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중국 사람들은 거의 이들 망명객을 보고 "꺼우리 팡즈"(高句麗 幇子)라고 얕보는 말로 깔보았다. 중국 사람들은 난폭하고 망나니 같은 사람들을 보면 이 욕설을 내뱉는다고 한다. 나라를 잃은 조선사람들이 고구려의 후예라고 꾸짖은 것이다. (이이화, 「한국사 바로보기 - 고구려사는 누구의 역사인가(上)」경향신문, 2004.7.22)
③많은 핍박을 받은 끝에 죽음을 당했으며 일반 유민들도 이민족의 대우를 받아 압박을 받았다. 그리하여 욕을 할 때에도 '꺼우리 팡스(高句麗幇子)'라고 하면서 얕보거나 무시했다.(...중략..) 중국사람들은 우리의 독립투사들을 보고 ‘망꿔노(亡國奴)’라는 말과함께 ‘꺼우리 팡스’라 욕질을 했던 것이다. (이이화,『역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산처럼, 2004)
④고구려 유민을 보고 "거우리 팡쯔"(句麗 幇子)라 불렀다.(이이화, 「한국사 바로보기 -국호로 본 조선과 한국의 정체성 上」 경향신문, 2004.8.5)
⑤그들은 우리의 독립투사들을 보고 "망꿔노"(亡國奴)라는 말과 함께 "꺼우리 팡스"(高句麗幇)라고 욕질을 하였던 것이다.(이이화,「동북공정은 고구려 도둑질...감정대응 금물」, 오마이뉴스, 2004. 3. 11)
⑥“옛 중국인들은 한국인을 그들의 속국인 이라 해서 얕보는 호칭으로 꼬리빵즈(高麗房子)라 불렀다. 우리가 그들을 "돼놈"이라 하는 것과 같은 천한 말이며 "속국놈"이란 뜻이 담겨 있다.”(김일훈,「중국 여행 여적」(이슈투데이 http://www.issuetoday.com, 2000. 9. 2)
⑦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 유민을'고려의 종'(高麗奴)이라고 불렀다. 이를 중국말로'꺼우리 팡스'라고 한다. 아주 천하게 여기는 호칭이었다. 오랫동안 고구려 침공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들의 의식에는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된 뒤 독립투사들이 중국으로 망명하였을 때에도 그들은 걸핏하면 ‘꺼우리 팡스’라고 하며 얕잡아 보았다.(이이화,『한국사 이야기 3』, 한길사, 1998)
⑧중국사람들과 중국을 맹종한 신라사람들은 걸핏하면 발해를 말갈이라고 얕잡아 불렀다. 중국 사람들이 말갈을 보는 눈은 편견 그 자체이다. '말갈' 이라는 말은'꺼우리 팡스'(高麗奴)보다 더 심하게 얕보는 용어이다. 말갈의 뿌리는 예전 숙신(肅愼)이나 물길(勿吉)이나 읍루에 있다. 말갈족은 동북쪽의 치우친 곳에 살면서 문화수준이 낮아 옷을 입지 않고 그 대신 추위를 막으려고 돼지기름을 몸에 바른다고 하였다. 이들에 대한 인식은 후에 그대로 이어졌다.(이이화,『한국사 이야기 4』, 한길사, 1998)
⑨일제의 동척에게 농토를 빼앗기고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갔으되 화전민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중국농(中國農) 소작인으로서 '꼬오리 빵즈─고려놈들'로 천대받아야 했다.(권명아,「여성 수난사의 이야기와 파시즘의 젠더 정치학」, 김철 외 지음,『문학속의 파시즘』(삼인, 2001.)
⑩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비하하는 호칭으로 `가오리팡즈(高麗棒子)`라는 말을 사용한 게 천년이 넘었다. 지금도 중국 땅에서 현지인들과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고려봉자`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다.(이용웅 문화부장,「東北工程의 노림수」, 서울경제, 2004.9.5)
⑪“중국에서는 딱 두 지역의 사람만을 '빵즈'(棒子)라고 부른다. 하나는 ‘산둥 빵즈', 다른 하나는 ‘까오리(高麗) 빵즈'. 전자는 산둥사람을 후자는 한국사람과 조선족을 가리킨다. 빵즈란 ‘남의 봉이 되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솔직하고 화끈한 자’를 의미한다. 대개 산동사람들 이러한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강효백,『중국인의 상술』, 한길사, 2002)
⑫중국 정부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중국의 서민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지안 우뉘펑 고구려 채석장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이곳의 관광안내원 겸 산림관리원인 츠상위(55)에게 "고구려와 중국 중원정부는 무슨 관계였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점잖게도 "그런 문제는 우리로선 말하기 곤란하다"고 회피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고구려와 오늘날 한국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고구려는 한국의 (고대) 국가 가운데 하나 아닌가." 한 가지 더 물어보았다. "중국인이 조선족을 욕할 때 뭐라고 부르는가." 츠는 묘한 표정으로 계면쩍게 웃으며 소리쳤다. "가오리 방즈(고구려놈들)!" "왜 조선족을 "고구려놈들"이라고 욕하는가." "고구려나 조선이나 다 같기 때문이지 뭐." (이상수 특파원, 한겨레신문, 2004.7.20)
⑬“나는 동무들에게 우사령이 내가 가면 무엇 때문에 죽이겠는가고 물었다. 동무들은 그것 어떻게 알겠는가. 들어갔다고 ≪꼬리빵즈≫하고 죽이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들이 다 죽는데 너라고 못죽일게 뭔가, 왕청 관부대사건 때문에 요즈음은 구국군이 조선청년들이라면 더 눈을 밝힌다는데 너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5장 5절, 「아무런 신변안전 담보도 없는 모험의 길」)
우리의 문학에서도 꼬리빵즈는 적잖이 발견된다. 안수길 소설 『북간도』, 리근전 소설『범바위』, 유치환 시 「도포」등에 등장하고 있다.
⑭ “꺼우리 팡즈!” / “똥되놈 새끼!”(안수길, 『북간도』)
⑮ 그들은 치백령감과 김동하를 가리키며 <꼬리빵즈>라느니 <얼구이즈>라느니 하면서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다가 손찌검을 하려들었다.(리근전,『범바위』)
⑯ 호(胡)ㅅ나라 호동(胡同)에서 보는 해는
어둡고 슬픈 무리(暈)를 쓰고
때묻은 얼굴을 하고
옆대기에서 첨과(甛瓜)를 바수어 먹는 니--야여
나는 한궈인이요
할아버지의 할아버짓적 물러받은
도포(道袍) 같은 슬픔을 나는 입었소
벗으려도 벗을 수 없는 슬픔이요
---나는 한궈인이요
가라면 어디라도 갈
---꺼우리팡스요
유치환, 「도포(道袍)」,『생명의 서』, p.74.
⑰ “청마는 나라 없이 쫓겨간 먼 이역에서 만주인, 일본인, 한국인 등 여러 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상황에서 일본인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제 옷의 이를 잡아먹는 胡族으로부터도 망국민과 거지를 합친 의미의 "꺼우리팡스(高麗房子)"라고 불리며 멸시와 증오를 당하는 동족들을 보면서 자신이 한국인임을, 벗어나려해도 벗어날 수 없는 핏줄로 이어진 후예임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이혜선 ,「유치환 시에 나타난 민족의식」,『동악어문론집』31집 (동악어문학회,1996)
위의 활용예에서 본 것처럼 한자와 한글발음 또한 제각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자는 의미 해석에 따라 나눠지거나, 임의로 한자를 쓰기도 한다. 그리고 발음은 꼬리빵즈, 꼬리팡즈, 꼬리팡스, 꼬리방즈, 꺼우리빵즈, 꺼우리팡즈, 꺼우리팡스, 거우리팡스, 가오리방즈 등 제각각으로 나타난다.
발음은 그렇다고 쳐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과 조선족의 전문가로 자부하는 많은 한국인조차 꼬리빵즈의 의미에 대한 분석이 빗나가고 있어 꼬리빵즈에 대한 실체를 모르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 오류들은 다음과 같다.
① "어릴 적에 중국 아이들은 자신을 보고 "거우리 팡스"라고 욕질을 했다고 한다. 곧 "고구려 새끼"라는 얕보는 뜻을 담았다."고 했다. (한국의 역사학자 이이화)
② "슬픈 이야기로 중국땅에서 애국 투사인 한국인.중국인을 고발하는 일제의 앞잡이는 조선인이 압도적으로 많아 중국인의 원성을 샀다 하니 그네들이 조선인을 비하하여 "까오리 빵즈(高麗棒子:고려거러지새끼)"라는 욕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제주산업정보대 중국문학 서성봉 교수) 제주일보, 「호가호위(狐假虎威)」에서
③ “까오리 빵즈......고려 몽둥이.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몽둥이로 부인들이나 아이들을 때렸대요. 고려시대도 그랬으니까, 매우 오래된 말이죠. 즉 무식하게 사람을 몽둥이로 팰줄만 아는 민족이었단 얘기죠. 그래서, 우릴 우습게 보구요,“(네이버 지식Q&A, ID : dragon0518, 2003. 2. 22)
④ 중국과 일본에서 한국사람을 비하할 때, 다들 아시다시피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라고 하지요. 중국에서는 '까오리빵즈(高麗棒子)'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고려의 방망이(棒子)라는 뜻으로 특히 성인남성을 욕할 때 사용합니다. 방망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굳이 말 안해도 아시겠지요. (네이버 지식Q&A, ID : freeben, 2003. 1. 13)
⑤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꼬오리빵즈(高麗棒子gaolibangzi,고려거시기놈’란 욕을 들어봤을 것이다.(중략)
정관음(貞觀音)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꼬오리빵즈(高麗棒子gaolibangzi,고려거시기놈) 들쯤이야 한낱 주머니에 든 소지품일 뿐(自謂囊中一物耳)이라고 큰소리 치더니, "검은 꽃(玄花, 눈알)"이 "흰 깃 (白羽, 화살)"에 박혀 외눈박이 될 줄이야(那知玄花落白羽)"
고려시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당나라 2대 왕, 태종(太宗, 598-649) 이세민(李世民)이 애꾸눈 된 곡절을 읊은 시다.(김월의, 「고구려의 미래를 지키려면 오늘과 역사를 함께」(문화재방송국, 2004.8.18)
⑥“중국에서는 딱 두 지역의 사람만을 '빵즈'(棒子)라고 부른다. 하나는 '산둥 빵즈', 다른 하나는 '까오리(高麗) 빵즈'. 전자는 산둥사람을 후자는 한국사람과 조선족을 가리킨다. 빵즈란 '남의 봉이 되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솔직하고 화끈한 자‘를 의미한다. 대개 산동사람들 이러한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한국의 화교가운데 대부분은 산둥출신이고 중국사람 중에서도 한국사람과 정서와 성격이 비슷한 자들은 대개 산둥출신이다. 흔히들 산둥사람의 기질의 위의 빵즈 기질과 더불어 소박하고 선량하고 옛것을 지키고 현실상황에 안주하며 쉽게 만족하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규정되어 왔다.“고 밝히고 있다. - 강효백,『중국인의 상술』( 한길사, 2002) 저자 강효백은 타이완에서 법학박사 취득, 중국화동정법대에서 수년간 강의, 주 타이완 대표부와 상하이 총영사관, 주 중국대사관 외교관 재직. 저서로는「협객의 나라 중국」「차이니즈 나이트 1,2」「협객의 칼끝에 천하가 춤춘다」「중국? 중국. 중국!」「동양스승, 서양제자」와 동인시집「야간열차, 바닷가에서」등이 있다. '중국의 경제특구 발전전략', '중국 중심항구 선정 논쟁', '영수증 복권제' 등 여러 편의 중국 관련 논문과 칼럼을 썼으며「중국 내 한민족 항일독립운동 100대 사적」을 시디롬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⑦ 일본인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제 옷의 이를 잡아먹는 胡族으로부터도 망국민과 거지를 합친 의미의 "꺼우리팡스(高麗房子)"라고 불리며 멸시와 증오를 당하는 동족들을 보면서 자신이 한국인임을, 벗어나려해도 벗어날 수 없는 핏줄로 이어진 후예임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이혜선 ,「유치환 시에 나타난 민족의식」,『동악어문론집』31집 (동악어문학회,1996)
이상의 일곱가지를 보면 중국통, 조선족통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꼬리빵즈의 어원을 참뜻과 달리 해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오류를 바로잡지 않으면 한중 교류 확대와 함께 사용이 늘어나는 꼬리빵즈의 본뜻은 점점 왜곡될 것이므로 서둘러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 역사학자는 빵즈를 ‘새끼'로 중국문학을 전공한 한 교수는 ‘거러지새끼'로, 조선족출신 문인은 ‘거시기놈'으로, 한 문학 논문에서는 ‘망국민과 거지를 합친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더욱 가관인 것은 전문가들이야 아니겠지만 역사적으로 해석한다면서 조상들이 아내를 몽둥이로 잘 때려서 꼬리빵즈가 생겨났다는 식의 의견이 대중적인 인기 검색사이트인 네이버 지식 문답코너에 버젓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꼬리빵즈를 이색의 시 정관음에 연결시켜 고구려의 용맹성과 고구려방망이를 내세우고 있지만 시 정관음에는 꼬리빵즈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한편 유치환의 시에 대한 꼬리빵즈의 어원을 잘못 해석하여 빵즈를 방자(房子)로 표기하면서 ‘망국민과 거지를 합친 의미의 꺼우리팡스(高麗房子)’로 적는 논문도 나타났다. ‘망국민과 거지’를 합친 의미라는 해석도 무리지만, 한자를 표기하면서 사용된 방자(房子)는 꼬리빵즈가 지닌 의미와는 무관하다. 방자(房子)란 고려시대 잡류직(雜類職)으로 중국 사신과 그 수행원이 머무는 사관(使館)에 배속되어 접대와 심부름을 하던 이, 혹은 조선시대에 관아에서 심부름하던 남자 또는 상궁(尙宮)의 살림집에서 붙박이로 일하던 가정부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통으로 일컬어지는 강효백은 아예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의 책 『중국인의 상술』 중 ‘산둥사람과 한국사람의 빵즈 기질’이란 제하의 글에서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솔직하고 화끈한 자'를 의미한다. 대개 산동사람들 이러한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적고 있다. 산뚱빵즈이든, 꼬리빵즈이든 모두가 싫어하는 이 빵즈를 좋은 의미라고까지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들어 한국내에서 꼬리빵즈의 단어 사용이 늘어가고 있지만 중국내에서 쓰이고 받아들여지는 의미는 왜곡되고 있다. 산동사람들이 싼뚱빵즈라는 호칭을 조선족이 꼬리빵즈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만 보는 시각은 중국과 조선족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조선족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꼬리빵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6. 한국과 중국, 그 역사 속의 꼬리빵즈
전세계에서 살아가는 6백만명이 넘는 재외 한국인 중 2백여만 명이 꼬리빵즈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56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은 94% 이상을 한족(漢族)이 차지하고 있으며, 조선족을 비롯한 장족, 회족, 묘족, 만주족 등 55개의 소수민족이 나머지 6% 정도를 차지한다. 중국 내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조선족은 광대한 영토와 13억명의 인구를 지닌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꼬리빵즈"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끈질긴 문화의 생명력을 지켜가고 있다. 중국 내 많은 소수민족 중에서도 꼬리빵즈는 독특한 민족이다."한글"이라는 민족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는가 하면, ‘한국(조선)’이라는 조국을 갖고 있다. 비록 분단되긴 했지만, 민족의 모국인 남한과 북한을 비교적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살아가는 이들 꼬리빵즈는 중국 내에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조선족은 문화혁명의 과정에서 많은 수난을 겪었으며, 출신의 한계 때문에 사회 안정기에도 신분 상승의 제약을 받고 있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유랑 의식이 조선족의 숙명이었다면, 중국과 한국 사회의 안정과 국가간 교류 속에서도 중심점이 되지 못하고 양국으로부터 소외 당하는 것도 숙명이라 하겠다.
중국과 한국의 수교가 맺어졌지만 조선족의 고향 방문이 자유롭지 못하면서 조선족 사이에서는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키워온 조국 중국과 낳아준 조국 한국 사이에서 방황하는 꼬리빵즈는 ‘중국은 조국, 한국은 고국’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그들의 삶이 고달프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2년 연변조선족 자치주 민족사무위원회 당시 주임인 김종국이 연변 거주 조선족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평균 70%이상이 중국을 조국으로 꼽았다.
조선족의 정체성 두고 ‘며느리론’에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정판룡의 "며느리론"에 의하면 조선족은 중국으로 시집 온 조선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며느리로서 생활해가고 있는 조선족의 삶이 지닌 어떤 숙명을 보게 된다. 남존여비 풍습이 지배적인 유교문화권에서 아들이 아니라 딸, 사위가 아니라 며느리라는 점에서 중국내 조선족의 위치를 시사해준다. 그래서 이러한 며느리론을 두고 조선의 딸로서 중국 사회에 동화되고 싶어하는 양면성과 중국이란 현실 속에서 몸을 사리며 조심하면서 지내고 있는 비굴한 모습을 내세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한편 조선족의 정체성을 ‘사과 배’로 표현하기도 한다. 연변대학교 김관웅 교수는 「사과배와 중국조선족」이라는 글에서 “연변의 사과배는 중국조선족이라는 변연문화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변의 사과배는 북조선 북청에서 가져온 잡목에다 연변의 돌배라는 접본(接本)에 가접시켜서 만든 새로운 배품종이다. 연변의 명물 사과배와 유사한 것이 우리 중국조선족문화”라고 했다. 민족의 정체성이 원뿌리 한국과 살고있는 터전 중국의 문화가 복합체로 작용되면서 삶의 정체성 또한 양쪽의 모든 문화를 지니고 있는 데서 나온 말일 것이다.
하지만 ‘사과 배’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스스로 다음 세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접본 품종인 사과배는 지나치게 비하된 비유이므로 차라리 중국의 기후와 풍토를 극복하고 만주벌판에 넘실거리는 조선의 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비유라는 반박이다. 또 조선족의 문화가 중국의 변두리에서 복합문화를 꾸리는 변연문화(邊緣文化)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이 가해진다. 5천년의 문화와 전통을 가진 한민족의 삶은 중국문화의 변방이 아니라 한민족의 전통이 살아숨쉬는 정통성의 문화를 통해 중국 문화와 교유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논의들은 그만큼 조선족의 삶이 지닌 특수성을 대변해주고 있다.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조선족의 입지는 더욱 애매해졌는데, 조국으로 부르는 중국과 고국으로 부르는 한국과 조선(북한을 지칭)이 있어 ‘세 부모를 다 섬겨야 할 형편’이라는 말이 그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만큼 조선족의 정체성에 혼돈이 오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중 수교가 이뤄지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족과 북한의 관계가 원만했지만, 한중수교 이후 경제적으로 성장한 한국과 교류하는 조선족이 늘면서 그 관계 또한 소원해지고 있다. 남한과 북한의 적대시 혹은 껄끄러운 관계를 짐작한 조선족은 남한사람을 만나면 북한과 애써 거리를 두고있는 것처럼 행동하곤 한다. 이처럼 조선족은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또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것이다.
조선족의 삶을 다룬 조선족 작가 허련순은 조선족을 ‘바람꽃’에다 비유했다. 소설 『바람꽃』은 조선족을 “바람이 불어왔던 곳과 바람이 자는 그 곳, 두 세계 중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바람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머무르지 못하고 바람따라 부유하는 그 유랑의 삶은 늘 ‘추억과 망각’ 그리고 ‘그리움과 원망’의 갈등 속에서 두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지금 꼬리빵즈는 바람꽃이 되어 날리고 있다. 실제 한국에 거주하는 많은 조선족들은 한국인으로부터 “당신은 중국사람도 아니고 한국사람도 아니다”는 반응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있다. 이는 조국의 발전에 기뻐하면서 그리운 조국의 품으로 한걸음에 달려왔다가 얻은 배신감의 상처이기도 하다.
6·25 전쟁 직후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싸움에 환멸을 느끼거나 아예 그걸 기화로 조국을 등진 해외 동포들이 많음을 우리는 보아왔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은 남과 북 그 어느 곳도 갈 곳이 없어 회색지대를 선택했다. 그 회색지대의 선택과 그리고 죽음의 비극은 우리 민족의 서러운 역사가 만들어낸 것일진대, 조선족의 삶이 또 그 회색지대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지금의 조선족사회 내적으로는 인구가 감소해 조선족 공동체의 와해 위기까지 겹쳐있다. 한 보고서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인구비율이 1953년엔 63.9%나 됐지만 1996년엔 39.3%로 떨어졌다. 2050년에는 15% 선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금까지 꼬리빵즈는 늘 부당한 대우 속에서 살아왔다.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억압과 빈곤을 피해 이주한 중국에서 새로운 삶을 일구는 동안 중국인으로부터 꼬리빵즈라는 멸시를 참아야 했다. 이제 조국 한국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중국 동포인 꼬리빵즈의 위상이 제고되었다고 기뻐하는 그 순간, 한국인들은 꼬리빵즈를 중국인처럼 취급하고 나섰다.
최근 10여년간 한국인들은 몇 년짜리 적금 통장을 깨 어쩌다 나선 중국여행을 통해, 혹은 중소기업의 중국 진출을 통해 중국의 경제를 만만히 보아온 게 사실이다. 지금 우리는 뙤놈, 대국(大國)의 중국을 이겼다고 자만하고 그들을 멸시의 눈으로 봐 온 것이 사실이다. 수 천년 동안 중국의 위세에 억눌려 왔던 한국은 위대한 1900년대 후반을 보내면서 중국을 내려다 볼 수 있었고, 중국을 얕보는 근성까지 갖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 앞에서 큰소리 치던 역사는 이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미 석학들은 “우리가 중국을 우습게 여긴 시간은 지금까지의 30여년 뿐이다”고 진단했다. 중국인은 그 누구도 한국인에게 눌렸다는 생각을 가진 바 없다. 그것은 중국인 특유의 느긋한 대륙 기질이자, 루쉰이 그의 소설 『아큐정전(阿Q正傳)』에서 중국인의 전형으로 내세운 바 있던 중국인 특유의 정신승리법일지도 모른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비록 지금까지의 1세대 30년 동안이나마 중국을 능가했다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무대에서 한국의 이름으로 활개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인의 위대함을 확인했다. 한반도는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였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해 보였다. 하지만 이제 중국 앞에서는 보다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은 더 이상은 만만히 대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중국은 이 지구상에서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 미국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닉네임을 얻고 있다. 중국은 이미 세계 최강이 되기 위한 발판을 다져놓았다. 상해나 심천 등 발달한 남방의 도시는 이미 한국을 앞질러 있다. 중국의 시골에는 유선 전화기가 없을지는 몰라도 휴대폰은 흔하다. 지금 한국이 3천만대의 휴대폰을 보유한 기술에 자만하고 있을 때, 이미 중국의 휴대폰은 1억5천만 대를 돌파했다. 이 무한의 저력을 가진 나라, 중국은 벌써 자체 기술로 개발한 유인 우주선을 띄웠다.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만 돌아보고 와서, 백두산 천지에 감탄만 하다 와서 중국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우리는 지난 1세대 30년 동안 우리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능가했으며, 그것은 영원히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대였다고 감히 자부해도 될 것이다. 이 위대한 세대가 어찌하여 중국의 거대한 틈바구니 속에서 꼬리빵즈라는 설움을 극복하면서 오늘의 역사를 살아가는 조선족에게 한국인이 맞는 영광을 함께 누릴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인가. 민족의 혈통을 중시하는 우리는 중국 속에서 우리의 혈통을 이어가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해 나가는 조선족과 함께 축배를 들어야 한다.
미국, 영국, 독일의 한국 동포를 가리켜 재미교포·재영교포·재독교포라고 하면서 유독 중국의 동포는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물론 중국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민족 고유의 이름인 조선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조선족이라는 이름 속에 그들을 얕잡아보는 의식은 없는지 반성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조선족이라는 비하 뉘앙스를 통해 그들을 새로운 꼬리빵즈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많은 꼬리빵즈가 조국 한국을 찾아오고 있다. 그것이 꼬리빵즈 개인의 경제적 성장과 한풀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지금 한국을 찾아 온 꼬리빵즈는 그들이 배고프고 힘들 때 그들을 거둬들이고 키워준 조국 중국을 떠나 이곳에 와 있는 ‘바람꽃’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고, 정겨운 딱친구와 짜개바지 친구까지 헤어진 뒤 낳아준 조국에서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끊임없이 먹을 것을 찾아 유랑하는 꼬리빵즈의 설움은 비단 조선족만의 설움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의 설움이며, 그들의 유랑은 한민족 전체의 유랑인 것이다. 꼬리빵즈는 한국으로부터 뿌리를 갖고 있는 우리 한겨레 민족이다. 좁은 한반도의 지형적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 속에 우뚝 서게 만들기 위해 세계를 향해 개척해 나가는 우리의 해외 동포인 것이다. 우리는 조선족을 귀찮은 군식구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고, 우리의 운명을 함께 하는 민족공동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꼬리빵즈라는 것도 잊지말아야 한다.
7. 결론 - 꼬리빵즈, 그 통일 한국의 주역들
‘꼬리빵즈'가 지닌 어원의 유래를 통해 조선족의 삶에 접근하는 것은 조선족을 두고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는 정체성 규명에도 도움될 것으로 기대한다. 꼬리빵즈는 말을 듣는 조선족과 말을 하는 중국 한족에 따라 그 뜻이 각각 달리 연상될 수 있는 것도 한 특징이다. 앞서 살핀 대로 열가지나 된다하더라도 그 의미가 모두 개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꼬리빵즈가 속어로 정착하기까지 조선족의 삶과 역사가 파란만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속어란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설득력을 가질 때 자연스레 전파되어 민중의 언어로 자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꼬리빵즈는 중국 문자(한어)로 분명하게 규정하지 못하면서도 구어체로서 사회적 언어로 소통되고 있는 것은 어느 한가지의 의미보다는 열 가지의 복합의미가 더 크다고 보여진다. 꼬리빵즈의 열 가지 어원 속에는 역사적 배경, 조선족의 생활상, 한국 중국 일본의 연관성 등을 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꼬리빵즈’라고 말하는 사람마다 그 뜻이 다르고, 듣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뜻이 다르더라도 조선족의 역사와 생활상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이다.
앞으로 꼬리빵즈가 지닌 의미는 계속적인 변화를 할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 속에서 용맹을 떨친 고구려 몽둥이라는 꼬리빵즈가 고구려 후예들을 위축시키는 말로 전락됐다면, 그 후예들의 새로운 위상을 통해 이름의 의미가 달라져갈 것이다.
꼬리빵즈에는 분명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와 기상, 그리고 그 후예인 조선족과 한국인의 민족혼이 깃들어 있다. 최근 들어 동북공정, 고구려사 왜곡 등의 문제를 놓고 한·중간의 갈등이 심화되는데 이 때 꼬리빵즈의 어원 고찰은 고구려 민족의 정체성 파악에도 기여할 것이다. 한족들이 조선인을 부를 때 꼬리빵즈라고 부른 데서도 확인되듯 중국인(한족) 스스로 조선인의 뿌리를 고려(고구려)라고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꼬리빵즈를 밴대, 빨래방망이로 볼 경우 꼬리빵즈에는 조선족의 전통적인 생활 양식이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꼬리빵즈의 어원 고찰은 조선족, 나아가서는 한민족의 민족공동체 정서 회복과 밴대와 빨래방망이를 즐겨 사용하던 한민족의 삶의 문화를 확인하는 길이기도 하다. 한민족의 독특한 삶의 문화가 중국 내에서 이질적인 문화요소로 작용하면서 꼬리빵즈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여기서 꼬리빵즈는 한민족의 삶이 한국을 떠나 어느 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더라도 전통을 지키며 살아 숨쉬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끈질긴 생명력은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면서도 조선족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는 힘이 됐다. 그런 정신이 한민족의 문화를 전세계에 뿌리내릴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꼬리빵즈의 어원을 확인하는 것은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길이기도 하다.
또 꼬리빵즈를 마화나 통역의 막대기로 볼 경우 한국이 중국과 일본 등 인접국가와 얽혀 살아가는 관계를 보여준다. 꼬리빵즈를 중국과 일본의 통역이라는 연결막대기에서 나온 것으로 볼 경우 이제 꼬리빵즈의 쓰임새도 달라질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꼬리빵즈가 중국과 일본을 잇는 통역 막대기 역할의 꼬리빵즈였다면, 오늘의 꼬리빵즈는 남과 북을 잇는 통일의 꼬리빵즈로 나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 나라 내 민족의 통일 앞에서도 남북한 당사자의 대화가 아니라 미국 등 강대국의 눈치 속에 4자 회담이니, 6자 회담이니 하는 논의를 계속해야 하는 것이 한반도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중국이란 강대국 속에 남북한의 통일을 기원하는 중국국민으로 살아가는 조선족의 역할은 매우 크다고 본다. 특히 남북한의 분단 극복이라는 통일과업은 남북한과 각각 교류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재일교포와 더불어 중국의 조선족사회의 역할이 지대할 수밖에 없다. 다소 폐쇄적인 북한 당국을 움직이는데는 북한과 우호적인 일본동포와 중국동포가 한국의 그 어떤 정책보다 효과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꼬리빵즈(고려막대기)는 통일 주역으로서 역할이 증대할 것이다.
그동안 서러운 역사를 가진 한반도와 그 서러운 이름의 꼬리빵즈, 이제는 서러움에서 벗어나 새 역사 속의 꼬리빵즈로 거듭날 때가 됐다. 그리고 한국인은 경제성장에 자만하기보다는 새로운 시각으로 조선족을 돌아볼 때가 됐다. 한국인들은 꼬리빵즈가 떳떳한 중국 조선족으로, 대한겨레의 뜨거운 피를 이어갈 수 있도록 가슴을 열어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통일시대를 맞이하는 준비일 것이다.
꼬리빵즈는 조선시대 말 가난의 역사와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의 순간에도 중국 땅에서 조국의 발전과 해방을 기원하면서 민족의 정신을 지켜왔다. 꼬리빵즈에 대한 조명 작업을 통해 한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고수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온 조선족의 힘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꼬리빵즈는 1세기도 안 되는 사이에 중국의 공산혁명, 6·25 한국전쟁, 문화대혁명, 개방주의 등의 다변화를 겪으면서도 민족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지켜왔다. 따라서 이 힘은 한민족이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세계 속의 한민족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