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50809183344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0> 몽골, 또 다른 한국 - 프레시안"에서 문화 관련 내용을 부분부분 가져오고 제목은 내용에 따라 임의로 붙였습니다.
몽골과 한국 문화의 유사성
(전략)
(중략)
(5) 오해하고 싶은 중국인
(전략)
(6) 슐랭에서 설렁탕까지
(전략)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0> 몽골, 또 다른 한국 - 프레시안"에서 문화 관련 내용을 부분부분 가져오고 제목은 내용에 따라 임의로 붙였습니다.
몽골과 한국 문화의 유사성
(전략)
몽골에서는 한반도를 '솔롱고스', 즉 '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즐겨 입는 무지개의 일곱 색깔 그 색동옷의 고향이 바로 몽골입니다. 솔롱고스, 한마디로 '꿈의 나라'입니다. 모질게 춥고 힘든 유목생활에서 끝없이 남으로 내려오고 싶은 몽골의 소망의 표현이 바로 '솔롱고스'가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 '몽골은 또 다른 한국'이고, '한국은 또 다른 몽골'입니다.
한국에서는 복숭아나무를 귀신을 쫓는 나무라고 하여 불에 태우지를 않지요. 몽골은 불로써 모든 부정을 없애는데 복숭아나무를 절대로 불에 넣어 태우지 못하게 합니다. 몽골에 있어서도 복숭아나무는 바로 귀신을 쫓는 나무지요.
터키 말이나 몽골어·한국어·일본어가 유사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긴 이야기는 못하고 제가 별로 아는 바도 없으니 한두 가지 예만 들도록 하겠습니다. 가령 검다(black)라는 말에 대해서 이들 언어들을 보면 다음과 같지요.
터키어 ――― 몽골어 ――― 한국어 ――― 일본어
카라(kara) 카르(kar) 검다 구로(くろ)
그리고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Kharakorum)의 경우 중국의 문헌에는 각라화림(喀喇和林), 또는 생략하여 화림(和林) ·화령(和寧) 등으로 쓰입니다. 유목민들이 가진 천손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 태양(太陽, 日)을 보면 몽골어에서는 '나ㄹ'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말[날]과 완전히 같지요. 유목민들이 동쪽을 향해 예를 올리는 것은 흉노·돌궐·거란 이래의 전통입니다.
몽골은 전통적으로 태음력으로 1월1일을 차강사르(흰색의 달)라고 하여 최고의 명절로 칩니다. 설날을 차강사르라고 부르는 것은 백색이 길상·풍부·순결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빔을 입고 밖으로 나가 동이 트기를 기다리고 동이 트면 먼저 해가 뜨는 방향으로 오른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립니다. 하늘에 예를 올릴 때 마유주나 우유 등을 하늘로 뿌리는데 이것을 차찰[배천(拜天 : 하늘에 절함)]이라고 한다. 이 같은 의식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샤만 신앙의 유풍이지요. 우리가 하는 해맞이 풍습과 다를 바 없지요.
몽골은 우리와 같이 백색 숭배의 풍습이 강합니다(몽골이 훨씬 더 심하죠). 몽골인은 종종 겔의 입구에 천마(天馬)를 그린 깃발을 내걸고 있는데 말은 행운을 상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애마(愛馬)를 순장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후 말이 없으면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몽골인들은 백마(白馬)를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한답니다.
동몽골의 다리강가 지방에는 한국의 색동저고리와 같은 전통의상이 내려오고 있지요. 이 일대는 고대의 코리(貊)족의 이동과 관계가 있고, 또 그들이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성이 깊습니다. 겨울철에 몽골의 아이들은 비석치기나 '샤가'를 합니다. 샤가는 우리의 윷놀이와 같은 놀이죠. 이러한 풍경은 30~40년 전에 한국의 겨울에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었습니다. 물론 윷놀이는 아직도 즐기는 놀이이지만요.
(중략)
(5) 오해하고 싶은 중국인
(전략)
몽골과 꼬우리족은 족보를 매우 중시하는 민족으로 몽골 속담에 "7대 조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숲 속의 원숭이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쥬신을 마치 조상과 예의도 모르는 오랑캐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인들이 얼마나 쥬신에 대해 무지한지를 보여줍니다.
세계에서 가장 족보를 중시하는 백성들이 쥬신입니다. 그리고 그 쥬신 가운데서도 가장 족보를 중시하는 백성이 한국이지요. 한국의 보학(譜學 : 족보학)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것도 조상을 중시하는 쥬신의 전통 때문입니다. 이것은 원래부터 족보를 중시하는데다가 중국에서 유입된 유학의 영향 때문입니다. 몽골은 결혼의 경우에도 족외혼이 엄격하게 시행됩니다. 몽골에서는 "모르도흐"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말 타고 떠난다."라는 뜻입니다. 즉 엄격하게 족외혼이 시행되었으므로 딸은 한번 시집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말의 "시집가다"라는 의미와 거의 유사하죠.
쥬신이 예의를 중시한다는 것은 말에도 잘 나타나있습니다. 대부분의 쥬신어(한국어·일본어·몽골어·만주어)들은 존대법이 고도로 발달해 있습니다(오히려 이 때문에 디지털 사회에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중국어에는 영어와 마찬가지로 존대법이 없지요. 다만 몇 개의 단어로, 또는 그 사람의 직위 등으로 존칭을 표현할 뿐입니다.
쥬신이 예절을 중시하는 예들은 매우 많습니다. 몽골의 예를 들면 음주나 흡연에 대한 연장자의 예의규범은 아주 엄격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나 일본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몽골의 경우 만약 연장자 앞에서 흡연을 할 경우 버릇이 없다는 말을 듣고 연회나 결혼 등 특별한 사유로 인하여 청년이 연장자와 함께 동석해야만 하는 경우 그는 연장자의 허락을 받아 비로소 술을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젊은이들이 술집에서 싸우는 일 가운데 대부분이 "너, 왜 반말하니?"하는 식의 예절문제 때문일 겁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일본이나 한국에는 선배들에게 '줄 방망이(선배들로부터 방망이로 엉덩이를 맞는 것)'를 맞는 일은 흔한 일이었죠. 한국이나 일본이나 연장자를 존중하는 관습이 남아서 때로는 엉뚱한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흔히 논쟁이나 말싸움이 벌어지다가 안 되면, "야, 너 몇 살이야? 네가 내게 그럴 수 있어?" 라는 엉뚱한 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참으로 한국적인, 아니 쥬신적인 풍경이지요. 물론 이것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몽골 쥬신의 이동식 가옥인 겔도 여기저기 아무나 함께 자고 들어가고 앉고 하는 듯이 보이지만 나이에 따라 다 순서가 있고 위계가 엄격합니다.
『몽골비사』에도 조상이나 연장자들을 숭배하거나 존중하는 기록이 많이 나오고 『황금사(黃金史)』에도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안락한 생활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평안한 생활을 누리게 해 준다"라는 오고타이 칸의 치세 목표까지 기록되어있지요.
『고려사(高麗史)』에는 "칭기즈칸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정말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적다면 하늘은 반드시 이를 알 것이다(成吉思嘗 人苟小有孝心 天必知之)."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쥬신의 사회가 사마천이 말하는 귀장천노(貴壯賤老)가 아니라 노인이나 연장자를 대단히 공경하는 사회임을 문헌적으로 입증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풍습은 오늘날 몽골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6) 슐랭에서 설렁탕까지
(전략)
몽골과 한국, 그리고 일본 참으로 멀리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몽골은 유목민, 한국과 일본은 농경민인데 아무리 쥬신족이라 해도 음식문화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농경민과 유목민의 음식문화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데도 공통성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역사적으로 몽골과 한국은 음식을 조리할 때 탕을 위주로 한 조리법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름 튀김을 위주로 하는 중국이나 바비큐를 위주로 하는 돌궐, 또는 유럽인들과는 많이 다르지요. 이러한 음식 문화의 유사성 때문에 원나라 때에는 고려의 음식들이 유행하기도 했지요. 갈비를 먹을 때 끝까지 벗겨먹는 것도 두 민족만의 특징입니다[박원길,『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민속원 : 1999)]
한국 음식은 어떤 의미에서 유목민인 쥬신의 음식이 농경민족으로 변화되었을 때의 변형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독특하지요. 원나라 당시 몽골 쥬신들이 반도쥬신(고려) 음식을 보았을 때 그 느낌이 어떠했을까요? 무엇인가 공통적이고 비슷한데 그 재료가 좀 달라져서 새롭게 어우러진 느낌이니 얼마나 음식궁합이 맞았겠습니까?
고려의 상추쌈을 먹어본 원나라 시인 양윤부(楊允浮)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이성우, 『韓國食生活의 歷史』(修學社 : 1996) 58쪽 참고].
"해당화는 꽃이 붉어 아름답고 살구는 노랗게 익어 보기 좋구나,
더 좋은 것은 고려의 상추,
마고(麻姑) 향기보다 그윽하네."
꼬우리족이나 몽골족들은 소의 갈비를 구워서 뜯어먹거나 소와 같은 가축의 뼈를 푹 삶아서 그 물에 소금과 파를 넣어서 간편한 식사를 합니다. 그들은 이것을'슐렝'이라고 하는데 설렁탕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겠지요. 『몽골비사』에 보면 고대 몽골인들이 슐렝(sulen)으로 아침식사를 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몽골비사』229절). 조선 영조(1724~1776) 때 간행된 몽골 사전인 『몽어유해(蒙語類解)』에 따르면, 몽골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인 것을 '공탕(空湯)'이라고 적고 '슈루'라고 읽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한국이 원조(元朝) 같았던 곰탕이나 설렁탕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아시겠죠.
어떤 분은 몽골시대의 풍습이 남았을 뿐이라고 비아냥거리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중국은 1백년 이상 직접 지배를 받았는데도 왜 설렁탕을 먹지 않습니까?
관련 전문가에 따르면, 조선 시대 요리서의 기본인 『산림경제』(1715)의 요리편의 고기 요리는 60%가 원나라 초기의 가정백과사전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서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 나타나는 고기요리법은 80~90%가 굽는 요리라는 것이지요(이성우, 앞의 책, 61쪽).
이것은 과거 수천 년 전의 맥적(貊炙)의 전통을 이은 것이지요. 적(炙)이란 한국인들이 즐겨먹는 것으로 미리 조미하여(『儀禮』) 꼬챙이에 꽂아서 불 위에 굽는 것(『禮記』)이라고 합니다. 한족(漢族)들은 미리 조미하지 않고 굽거나 삶아서 조미료에 무쳐먹는 데 반하여 예맥은 미리 조미하여 구어서 먹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같습니다. 전문가에 의하면 상하기 쉬운 고기는 부추나 마늘로 조미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이성우, 앞의 책 24쪽).
그런데 반도쥬신은 오랫동안 농경생활을 하다 보니 '고기 잡는 법'도 다 잊어 먹어버린 모양입니다. 고려시대 때 송나라 사신으로 온 서긍(徐兢)의 말이 걸작입니다(이성우, 앞의 책, 60쪽 참고).
"고려에 와보니 사신을 대접한답시고 양이나 돼지를 도살하는데 네 다리를 묶고 불 위에 내던지고, 만일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때려죽인다. 이러니 뱃속의 창자가 온통 갈라져 오물이 흘러나와, 이 고기로 요리한 음식에 고약한 냄새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몽골 제국 시대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도살법이 고려에 많이 전수된 것으로 보입니다.
몽골인들이 즐겨먹는 전통요리인 랍샤는 신기하게도 우리의 칼국수와 제작과정이나 맛이 거의 동일합니다. 그리고 몽골인들은 파나 야생마늘과 같이 다른 민족들, 특히 한족(漢族)들이 피하는 음식을 먹기도 합니다.
몽골의 경우 중국과는 달리 남녀의 역할 구분이 뚜렷하기 때문에 요리를 포함한 부엌의 일이나 가사 일은 철저히 여성의 몫입니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몽골 남성들이 매우 게으른 것으로 보이지만 대가축의 방목(放牧)이나 야생짐승들로부터, 또는 외부 침입자로부터 가축을 보호하거나 수렵의 일이 남자들의 일이기 때문에 가사(家事)를 돌볼 틈이 없지요. 몽골의 남자들은 밖에서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겔(이동식 가옥)에서는 그냥 쉬고 있는 것뿐이지요. 외부인들이 볼 때는 아내가 열심히 일하는데 그저 가만히 빈둥거리는 남자만 보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유풍은 한국이나 일본에 그대로 남아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미 오래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농경사회로 정착해온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이 같은 유풍이 남아서 남녀간의 역할분담에 대한 갈등이 심화되고 있지요. 즉 현재의 한국 사회는 돌볼 가축이 없는 상태인데도 남녀의 역할은 변함이 없어 (맞벌이 부부라도) 여성의 가사분담이 매우 심한 고통이 되고 있죠. 특히 극단적인 경우 명절날에 여자들만 일을 하여 한국 여성들은 심각한 정도의 우울증과 정신질환에 시달린다는 보고가 여러 번 나왔습니다.
같은 형태의 농경민족인 중국인들은 남자들도 요리를 즐길 뿐만 아니라 요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德目)이기도 합니다. 한국인들은 모든 것은 중국인 흉내를 내면서 어찌 이 부분만은 안 따라하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가사(家事) 일을 열심히 하는 편이라 이런 점에서만은 비쥬신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한(恨)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어차피"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자살율(自殺率)도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일본도 마찬가지지요). '한(恨)'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일종의 쥬신이 가진 '집단 무의식'으로 '집단 우울증'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 쥬신은 어떤 지역에 있든지 유목생활에서 오는 어떤 집단 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단한 유목생활과 떨어져 살아가야 하니 외롭고 쓸쓸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울증 같은 것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니 사람을 보는 게 더없이 반갑고 신체적 접촉을 통하여 따뜻함을 나누려 하지요. 반면 전형적인 농경민인 중국인의 경우에는 사람의 살이 맞닿는 것을 싫어합니다.
한국의 한(恨)과 몽골 쥬신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염세사상(厭世思想)은 일맥상통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오고타이칸의 언행입니다. 오고타이칸은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寡婦)들을 위해 재물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오고타이칸은 "재물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돈은 무엇인가?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만 사라지는 존재인 것을 …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 다만 인간의 기억뿐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오고타이칸은 만호장 가운데 재물을 모으는 자가 있자 훈시하여 말합니다.
"그대는 물질의 진가를 구분하는 눈이 없군 그래. 사람은 멋있게 살고 멋있게 죽어야 하는 것이오. 그대는 그대의 재산이 그대의 죽음으로부터 그대를 지켜줄 것으로 보는가?"
당시 몽골에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기 때문에 오고타이칸의 훈시는 불교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몽골의 고유사상으로 봐야겠지요.
몽골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한자어(漢字語)나 한문(漢文) 표현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몽골에는 한국과는 달리 중국 문화를 숭상하는 전통이 없지요. 그래서 몽골어는 한문을 가공하여 배우고 쓰기에 편리하게 만든 일본어와도 다릅니다.
그러나 몽골어는 기본적으로 어순이 우리말이나 일본어와 같고 문법관계를 조사와 어미로 나타내는 것도 우리말과 동일하고 관계대명사·관사·부정관사·성(性)과 수(數)의 일치가 없는 것도 우리말과 같습니다. 몽골어는 성조의 강세가 없지요. 이 또한 한국어와 같은 것이죠. 몽골 사람들은 1200년대부터 1940년대 초까지 거의 7백여 년을 전통 몽골문자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통문자는 우리말과 같이 실제 생활에 나타나는 많은 것들을 생생하게 발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키릴문자에 두 글자를 첨가하여 오늘날과 같은 문자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몽골의 나이 관념은 우리와 흡사합니다. 우리나라는 '한국 나이'라는 이상한 나이 개념이 있죠? 그런데 이런 한국 나이 개념이 몽골과 똑같다는 거죠. 몽골은 여자가 임신하는 순간부터 태아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간주합니다(천손사상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몽골인의 나이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사람들보다 한 살이 많게 됩니다. 중국과는 다르지요. 아이를 기를 때는 실이나 천으로 천막의 기둥과 기둥을 묶어서 흔들거리는 장치(요람)에다가 둡니다.
의복 생활에 있어서도 몽골은 한국과 유사한 측면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몽골은 외투도 무릎 아래로 내려가는 법이 없어서 매우 간편합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말 타기에 편하게 만든 것이죠. 여자의 치마도 주름을 잡아서 둘러 입는데 이것은 한족들에게 이상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중국인과는 달리 주름치마를 즐겨 입죠.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상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접촉을 싫어하는 중국인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몽골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 친밀감을 표시합니다. 이것은 쥬신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몽골은 설날이면) 서로 껴안고 인사를 나눈다."라고 말합니다.
이 점은 만주 쥬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주 쥬신의 인사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만나면 머리를 숙여 인사합니다. 이것은 요즘 한국인들이 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둘째, 친구나 연인을 만났을 때 반드시 얼굴을 껴안고 얼굴을 맞댑니다(李民寏『建州見聞錄』). 이것을 포견례(抱見禮 : 허리를 끌어안고 서로 좋아하는 것)라고 하지요. 셋째, 부녀자가 집안에서 서로 만나면 무릎을 꿇어 앉아 오른 손가락을 눈썹 끝에 갖다 댑니다(李民寏『建州見聞錄』).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이 가운데 만주쥬신의 가장 보편적인 전통 인사법은 바로 포견례(抱見禮)라고 합니다(『世宗實錄』59 15年 2月).
이 포견례는 요즘 한국에서는 많이 사라진 감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손님들이 오면 버선발로 나가 손을 잡고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고 부둥켜 안고 하면서 반가움을 표시하는 일을 집안에서 흔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10~20년 전만 해도 우리의 가구들을 보면 작은 가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붙박이 농경민들에게는 있을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죠. 즉 우리는 오래전에 농경생활을 시작했는데도 이동이 쉬운 작은 가구들이 많이 발달해 있었다는 것이죠. 이 또한 유목민의 생활습관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에이 설마,"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요즘 한국을 보세요. 아파트문화가 고도화되었는데도 한국인들은 아직도 맹목적으로 가구(家具)들을 들고 다닙니다. 그래서 30층, 또는 그 이상이나 되는 아파트도 이사할 때 무거운 가구를 올린다고 아슬아슬한 광경이 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합리적인 사람이라 가구를 없애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집안사람들도 설득을 못하고 있습니다. 농경을 한 지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별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몽골인들은 우리와 같이 손님을 잘 접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마 쥬신족들은 이방인(異邦人)을 가장 환영하는 민족일 겁니다. 이것은 외롭고 고단한 유목생활에서 오는 전통이겠지요. 어느 곳을 가든지 여행객들은 큰 대접과 환영을 받지요. 몽골은 이방인들이나 여행객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언제든지 우유를 주어 여행에 따른 피로를 식혀주지요.
이 점과 관련해서 저는 한국에서는 확실히 경험했습니다. 저는 1980년대 초 대학 다닐 때 돈 한 푼 없이 한국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때 느낀 것은 우리나라는 참으로 인심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환영을 받았습니다. 생긴 몰골은 오랜 여행으로 '상거지'였는데도 음식이나 잠자리는 어느 때나 다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 마을을 찾아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입니다. 당시의 여행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전혀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관찰해본 결과 도시화(都市化)나 자본주의화가 느리게 진행된 곳일수록 예외 없이 인심이 좋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많이 달라집디다. 요즘 대학생들은 무전여행을 하면 안 됩니다. 굶어죽기 알맞지요. 그런 점을 보면 한국은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제가 일일이 경험한 것이라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불과 20년 전만해도 한국은 무전여행이 가능한 나라였습니다. 언젠가 세월이 조금 흐른 뒤 미국인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가 제가 머리가 돈 사람이 아닌가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몽골에서 가장 보편적인 놀이는 씨름입니다. 우리나라도 30~40년 전까지는 가장 일반적인 놀이였죠. 씨름은 흉노나 고구려의 벽화에도 등장하는 북방고유의 무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씨름은 북방 기마병들이 육탄전을 벌일 때 쓰는 무술입니다. 일본의 스모나 한국의 씨름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죠. 몽골어에서 '쉬룬'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뜻은 "격한, 포악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쉬룬(몽골) - 씨름(한국) - 스모(일본) 등의 변화 과정 속에서 씨름은 다소 변형되어 정착합니다[박원길,『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민속원 : 1999) 129쪽].
오늘날 몽골씨름의 원형은 일반적으로 요(遼 : 거란)의 씨름으로 보고 있습니다. 1931년 요나라 동경(東京遺址)에서 팔각형 백색 도관(陶罐)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의 8면에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지요. 그리고 이 씨름은 요나라를 이은 금나라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금(金)나라 때는 주류민족이었던 만주쥬신(여진)은 물론 피지배층이었던 한족(漢族)들도 씨름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씨름이 일종의 전투무술이었기 때문에 한족들이 씨름에 몰두하는 것을 금나라 조정에서는 크게 우려합니다. 그리고 전투무술의 비결들이 알려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겠죠. 그래서 금나라의 장종(章宗 : 1189~1208)은 '여진인들만 씨름을 하라'는 칙령을 반포하여 중국에서는 씨름이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금나라에서 씨름은 현재의 태권도와 같은 국기(國技)였던 것이죠[장장식,『몽골민속기행』(서울 : 자우출판, 2002) 311쪽]. 그 후 이 씨름의 전통은 몽골이 계승하게 되지요.
결국 거란 - 금 - 몽골 쥬신족에게 있어서 씨름은 오늘날의 씨름과 같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라 전투무술을 포함한 상무적인 무술로 생각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권법도 포함되겠지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금나라의 장종이 한족들이 씨름을 하는 것을 금할 까닭이 없지요.
그런데 요나라의 씨름도 결국 그 근원에는 고구려의 수박(手搏)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다소 특이합니다. 고구려 벽화에서는 서로 엉켜서 하는 씨름 장면도 있고 마치 두 사람이 태권도 대련을 하듯이 거리를 두고서 손바닥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벽화에는 게임의 내용이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죠. 그래서 지금의 씨름과는 조금 다른 것이죠. 그리고 이 무술이 고구려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도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에 "충청도 은진현에 매년 7월 15일 인근의 사람들이 모여 수박을 즐기고 승부를 다투었다(忠淸道恩津縣界每歲七月十五日 傍近兩道居民聚爲手搏戱以 爭勝負 : 『新東國與地勝覽』卷34)"는 기록이 보입니다.
고구려의 멸망(668)·발해의 멸망(926)·통일신라의 멸망(935) 등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여러 형태의 유민(遺民)이 발생하고 이들이 이 같은 맨손무술, 또는 씨름을 확산시켰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발해·요(遼 : 거란)·금(金)·몽골·후금 등과 한반도(고려)의 씨름이 동시에 발전하였겠죠. 그렇다면 씨름은 쥬신 전역에 걸쳐서 독특하게 현지에 맞게 적용되고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신체적 접촉을 싫어하는 중국은 소림무술(少林武術)과 같은 권법(拳法)으로 발전했겠고, 쥬신족들은 서로 엉켜서 하는 유도(柔道)나 레슬링·씨름 쪽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몽골과 우리 사이에 놓여진 많은 쥬신적인 요소들을 보았습니다. 몽골은 어떤 의미에서 오래 전에 우리가 떠나온 고향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긴 세월 동안 변화하지 않으면서 고향을 묵묵히 지켜온 그들에게 저는 경의를 표합니다. 비록 그 동안 우리가 중화의 그늘과 늪에 빠져 그들을 형제로 대하지 못했지만 이젠 그들과 함께 새로운 디지털 시대를 열어가는 동반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한국사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최초의 배는 어떻게 생겼을까? : 창녕 비봉리패총 출토 배 - 오마이뉴스 (0) | 2013.08.09 |
---|---|
삼한의 건국과 교통 - 자동차생활 (0) | 2013.08.02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6> 예맥 = 동호 = 숙신 : 범쥬신 - 프레시안 (0) | 2013.05.30 |
꼬리빵즈의 정체성에 관한 고찰 - 정연수 (0) | 2013.03.29 |
꼬리빵즈의 어원 및 유래 고찰 - 정연수 (0) | 2013.03.29 |